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141화 (218/256)

141화

“아니야. 그건 아닐 거야.”

한 박자 늦게 심 박사가 부정했다. 하지만 즉시 대답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운한 확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것뿐이야. 분명히 원인이 있을 거야. 그걸 내가 알아야 하는데.”

창조주는 입술을 짓씹었다. 패드 화면을 휙휙 넘기는 손짓이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제 피조물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데 대한 당혹감이 번졌다.

-내가 도움이 될 수 있을 듯하네만.

내내 공기처럼, 하지만 사고 방지를 위해 유황 냄새를 섞은 가스처럼 은은한 존재감을 발휘하던 노년의 가이드가 입을 열었다.

“영감은 좀 빠지지?”

기술적 문제에 있어선 꿔다 놓은 보릿자루보다 못해도, 제 가이드에 대해서만큼은 지구상 누구보다도 예민한 에스퍼가 포악한 기세를 뿜었다. 강수혁의 능력과 성정에 대해 사나운 방식으로 충분히 체득했을 노리스는 두려운 기색은커녕 전혀 꺼리지도 않았다. 노련한 건지, 혹은 늙어서 분별력이 떨어진 건지. 그는 본인을 향한 강수혁의 위협적인 기세를 무시하고 제 할 말에만 집중했다.

-내가 가이드가 된 것이 벌써 38년이 되었다네. 그간에 얼마나 많은 강화 인간을 보았겠나.

“대부분 에스퍼겠죠, 가이드는 극소수니까.”

-심, 자네는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군. 실전 배치된, 그러니까 완성된 가이드가 소수일 뿐. 제작 시도가 적은 건 아니라네. 절대로 적다고 할 수 없어. 단번에 완성작을 배출한 자네 같은 천재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맞는 말이다. 그러나 무턱대고 흥미롭게 받아들이기엔 내포된 의미가 끔찍했다.

개발 중에 얼마나 많은 가이드가 희생되었을까. 혹은 폐기되었을까. 외계 침공이라는 우주적인 공포와 인류의 존속이라는 지고한 의무 앞에서 얼마나 많은 생명이 덧없이 사라졌을까.

실제로 윤조 전에도 신체 변형 과정을 이기지 못하고 숨진 자원자가 두 명 있다. 애초에 죽을 가능성이 50퍼센트 이상임을 인지하고, 생명 포기 각서를 쓰고 도전했을 거다. 윤조도 그러했으니.

죽은 사람에 관해서는 심 박사는 철저하게 함구했다. 하지만 때때로 심 박사가 연차를 내고 자리를 비우는 날, 국립 안식원에 있는 어느 두 위폐 앞에 꽃이 놓인다는 사실을 윤조는 알고 있었다.

패드를 두드리던 손이 멈췄다. 심 박사는 낮은 한숨과 함께 노리스를 돌아봤다.

“뭐, 아는 거 있어요?”

노리스는 살포시 웃었다. 괜히 뜸을 들이는 꼴이 정말로 목회자 혹은 정치인 같아서 묘했다.

-이건 우리 합중국 측에서도 일급으로 다루는 기밀이라네. 현 대통령도 내막을 자세하게는 모르지.

“그 기밀을 왜 먼저 말씀하셨을까?”

심 박사가 비꼬자 노리스는 시선을 강수혁에게로 옮겼다.

-선의와 신뢰의 증표로 봐주길 바라네.

“일단 봐야 판단을 하지.”

대답하는 에스퍼는 한쪽 눈매를 일그러뜨렸다. 그래도 아까보다는 정중한 어투였다.

-내 경력을 걸었다는 것만 알아주길 바라네. 롭슨, 에이브리, 그리고 로아무아 자네도 말이야.

그때 에이브리는 놀란 눈으로 뒤를 홱 돌아봤다. 연구실 투명 차단막 밖에 로아무아 중령이 있었다. A급 텔레패서에게 존재를 숨길 수 있다니! 롭슨도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역시 파파 노리스. 눈치를 채고 계셨군요.

자동문이 스르륵 열리고 로아무아가 들어왔다.

-자네의 파동은 아주 힘차니까 말이야.

노리스가 슬며시 웃었다. 반대로 에이브리는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펄쩍 뛰었다.

-아니, 언제부터? 여기 텔레파시 차폐 시스템이 있나요?

-아까부터 있었는데? 텔레파시 차폐 시스템이 있기야 하지. 그런데 A급을 막을 정도는 아닐 텐데. 그런 기술이 개발되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어. 뭐 양키들이라면 개발해 놓고 함구했을 수도 있지만 말이야. 어떠합니까, 파파 노리스.

로아무아 중령이 말했다.

-C급까지는 가능해도 B급 차폐도 엄밀한 수준에선 불가능하다네. 그리고 에이브리, 자네는 본인의 능력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지 못하는구먼. 이 기회에 로아무아에게 배우는 게 어떻겠나? 로아무아는 에스퍼 능력 개발 부분에서 아주 뛰어난 성과를 보이고 있다네.

노리스가 그럴 수 있다고 해도 에이브리는 여전히 충격에서 헤어나오질 못했다. 어지간히도 제 능력을 과신한 모양이었다.

-아니 그전에 어떻게 안 들킬 수가 있는 거죠?

-가이드는 가능해. 가이드는. 캐나다 측 가이드가 안 가르쳐 주던가. 아, 그 양반 은퇴하고 새로운 초짜가 배치되었던가?

로아무아가 심드렁하게 팔짱을 꼈다.

-로아무아 자네가 유달리 ‘뮤트’에 능하지 않나. 에이브리, 너무 놀라지 말게. 연구실 차폐 시스템과 로아무아의 뮤트 실력이 시너지 효과를 일으켰고 무엇보다 여기에 아주 강렬한 에너지 발원체가 가까이 있어서 자네가 잠시 정신이 팔린 것뿐이야.

노리스는 강수혁을 가리켰다.

“아니 시발. 지금 그게 무슨 상관이야. 빨리 아는 거나 토해 내.”

짜증이 치민 수혁의 안광이 거세졌다. 은은한 오팔 빛이 홍채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진정하게. 조금 늦는다고 뭐가 바뀌는 건 아닐세.

항시 느긋하기 짝이 없는 노리스는 산책하듯 가볍게 걸어 인근에 있는 연구실 콘솔로 향했다. 주 시스템은 전원만 들어와 있는 상태로, 노리스가 생체 코드를 입력하자 금방 가동되기 시작했다.

시스템 가동을 기다리는 사이 심 박사는 수혁에게 다가가 은근히 물었다.

“너도 몰랐어?”

“왜 몰라, 저 섬 아줌마 심장 소리가 무슨 대장간 같은데.”

“그럼 됐다.”

-그보다는 ‘뮤트’라는 게 뭘까요? 제한된 채널입니다.

윤조가 두 사람에게만 들리도록 통신했다. 그러자 심 박사가 패널로 메시지를 보냈다.

-에스퍼와의 교감 능력을 특수하게 발휘. 감각을 속이는 방식. 능숙한 구사자가 있는지 몰랐음. 우리 망나니한테는 통하지 않는 수법이지만 유의 필요.

“하여간 별종들이 다 있어.”

어깨 넘어 심 박사의 문자를 읽은 수혁이 코웃음 쳤다. 그 바람에 심 박사와 윤조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물론 윤조는 셰이드 때문에 보이지 않았지만.

삐익―.

긴 경고음과 함께 시스템 스크린에 붉은 경고가 떴다. 굵고 험악한 고딕체 폰트로 특급 보안 사항임을 알리는 중에 노리스가 다시 한번 생체 코드를 입력했다. 그러자 붉은 경고가 사라지고 대신 작은 파일이 하나 떴다.

파일 안에는 각종 코드를 제목으로 단 무수한 파일 폴더가 있었다. 노리스는 그중에 8년 전으로 추정되는 날짜가 적힌 파일을 열었다. 그 안에는 어느 가이드의 신상 정보와 함께, 각종 의료 기록, 그리고 비디오 클립과 오디오 클립이 있었다.

-한때 내 뒤를 이을 재목이었지. 에스퍼와 교감율이 상당히 높은데 정서적 안정도도 최상이었지. 더욱이 그는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어. 가이드 시스템을 조금씩 업그레이드했고 실제로 효과도 있었어. 그런데 말이야.

목회자형 가이드의 정점을 찍은 노리스는 그쯤에서 연구실을 싹 돌아봤다.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형성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딴지를 걸면 오히려 더 시간을 끌 것을 알아차린 모두가 입을 꾹 다물자, 노리스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스크린을 돌아봤다.

-일단 보게.

화면에 비디오 클립이 떴다.

그것은 밤에 미국 중서부 사막으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발생한 소형 M형 게이트에 대응하는 에스퍼 부대 소속 누군가의 개인 전투복 녹화 기록이었다. 촬영 당사자는 백업 병력으로 부대의 야전 작전 지휘를 맡은 가이드 엄호도 겸했다.

영상의 주요 인물은 선명한 미국기가 새겨진 가이드 전투복을 입은 30대 중반 남성으로, 금발을 가진 코카서스계인 동시에 얼굴에 ‘미 해병 출신’이라고 적힌 수준이었다.

시작부터 게이트는 발생한 상황이었고 에스퍼들은 방사능이 멀리 퍼지기 전에 효율적으로 주변을 봉쇄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오는 머드형, 일명 슬라임을 빠르게 해치웠다. 소형 게이트라 수습이 얼마 걸리지 않았다. 문제는 영상이 한번 끊겼다가 다시 이어진 이후였다.

게이트가 거의 닫히면서 공중에 뜬 빛무리 같은 흔적만 남기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붉은 기운이 확 발사되었다. 게이트 안에서 레이저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그것이 하필 가이드에게 직사되었다. 촬영 당사자가 가이드를 향해 고함을 지른 순간 붉은 광선도, 게이트도 완전히 사라졌다.

스턴에 걸렸던 가이드가 그 자리에서 푹 쓰러졌다. 영상이 미친 듯이 흔들리고 사방에서 에스퍼 여럿이 달려왔다. 가이드가 당했다는 다급한 보고, 긴급 후송을 요청하는 외침이 이어지는 끝에 가이드의 안면이 부각되었다.

동공이 풀려서 헐떡대던 그는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키더니 사방을 다급하게 돌아보았다.

-모두 죽었어! 머피도! 캘리넌도! 제리코도! 전부 죽었어!

-뭐라고?

-전멸했다고! 내 대원들이 전부!

당황한 가이드가 벌떡 일어나서 주위를 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에스퍼가 그를 뒤따르기 시작했다.

-왜 그래? 무슨 문제야?

에스퍼 중 리더가 가이드의 어깨를 붙잡으며 물었다.

-죽었어! 누가 끔찍하게! 전부 죽었다고! 전부! 전부! 맞아서 죽었……!

급하게 사방을 둘러보던 가이드는 모든 에스퍼가 별다른 손상 없이 멀쩡한 채로 자신을 보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숨이 막히는지 입을 턱 벌렸다.

-저희는 모두 무사합니다. 게이트는 성공적으로 닫혔습니다.

촬영 에스퍼가 대답했다. 당황한 가이드가 에스퍼 대원을 다시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혼란스러운 듯이 주변을 둘러봤다.

-분명히 비명을 들었어. 전부 치명상이었는데.

-혹시 비명을 지른 적 있나?

에스퍼 리더가 제 대원들에게 물었다. 모두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가이드는 혼란스러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에스퍼 리더가 그를 부축하면서 영상이 끝났다.

영상이 끝난 후 노리스는 다시 한번 연구실에 있는 전부를 둘러봤다.

-누군가와 비슷하지 않나?

그 말에 모두의 시선이 회색 인큐베이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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