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군데군데 사용감이 한껏 밴 군용 체육복에 참 어울리지 않은 보석이었다. 하지만 자랑스럽게 내걸고 있는 걸 본 수혁의 입매가 움찔거렸다. 꽤 쑥스러운 듯했다. 그 덕분에 각국 관계자들 앞에서 인큐베이터 나체쇼 중인 윤조 또한 덩달아 쑥스러워졌다. 감정에는 전염성이 있는 덕분이었다.
두부 스캔은 다른 부위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래도 10분을 넘지는 않겠지만. 진행률 바가 얼마나 느리게 커지는지, 최강의 산소전도율을 자랑하는 인공 양수 속에 있으면서도 어쩐지 숨이 막혔다.
“갑자기 왜 부끄러워하고 그래?”
-……그걸 굳이 물으셔야 합니까?
“왜? 나야 네 가랑이 털 모공 개수까지 디자인한 사람이고, 얘는 네 애인이고. 아저씨에 할아버지뿐 아…… 젊은 아가씨가 있어서? 눈 감거나 뒤돌아서요.”
멀찍이 뒤에 서 있던 에이브리를 향해 심 박사가 턱짓했다.
-저 A급 텔레패서인데요?
A급 이상 텔레패서는 눈을 감든 말든 다른 사람의 인지를 공유할 수 있다. 즉, 이 공간에 눈 뜨고 있는 사람과 연결된다면 다 보고 들을 수 있다는 뜻이고 하필 여기에 에이브리와 같은 국적이자, 유일한 비(非)강화 인간인 롭슨이 있었다. 그는 제풀에 움찔했다.
-나도 나가란 소리는 아니죠?
“이 새끼, 당장 눈 감아. 눈깔 뽑기 전에.”
수혁이 대번에 얼굴을 구기면서 으름장을 놓았다. 뭔 말만 하면 바로 난장판 직전이었다.
-박사님. 가랑이 털 모공까지 디자인 얘기를 굳이 여기서 이 시점에 했어야 합니까? 그리고 기왕 디자인까지 했으면 제대로 달아 주시든가 민둥산이 뭡니까, 이 나이에. 그리고 소령님은 툭하면 협박하는 버릇 좀 고치시고요, 롭슨 대령님은 계속해서 계셔도 됩니다. 제가 알아서 셰이드 켤게요.
창피함은 오로지 윤조만의 몫이었다. 원래 사용하던 인큐베이터와 같은 베이스라 내부 명령 체계도 동일했다. 이미 연결된 뇌파를 이용해 덮개를 불투명 모드로 바꾸었다.
“이거 뭔데 나도 안 보여?”
이번엔 망나니가 유리를 톡톡 두드렸다.
“탄소를 양자 방정식에 따라 수시 재배열해서 시각 정보를 교란하는 방식이라 보이면 이상하지.”
심 박사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김윤조 봐야 하는데 왜 이런 걸 만들었어.”
“앞으로 후속체도 완성될 건데 너 같은 변태 놈이 또 있으면 곤란하잖아. 여러 가지 보안 측면에서 대비한 거지.”
“후속체? 무슨 후속체? 가이드 후속체?”
“그래.”
“그런 걸 뭐 하러?”
막 패드를 두들기던 소리가 뚝 멈췄다.
“언제는 만들라고 알아서 살점에 피까지 떠안겨 놓고는.”
“내가? 언제?”
“이게 아주 뻔뻔하게 나오네. 머리 리셋한 건 김윤조인데 왜 네가 기억 상실에 걸려? 연구실 보안 기록 확인시켜 줘?”
“…….”
가만히 누워서 스캔이 끝나기를 기다리던 윤조에게 AI가 굳이 ‘불안과 초조’ 신호를 전달했다. 하지만 그전에 윤조 본인이 분노와 실망 패턴을 발산하는 중이었다.
후속체를 요청했다고? 언제? 왜? 그런 얘기는 전혀 듣지 못했는데.
-금시초문입니다?
“아니야, 김윤조. 오해하지 마.”
AI가 폭증하는 당황과 초조에 관해서 계속 리포트했다. 이상하게도 이미 알고 있기에 굳이 언급할 필요 없는 [대상 에스퍼: 강수혁]이라는 문구를 계속해서 붙였다. 뭔가 고자질처럼 느껴진다면 오버인 걸까.
“내, 내가 잘못했다. 당시엔 이럴 줄 모르고.”
-이럴 줄 모르고? 언제쯤인지 모르겠지만 저희가 이렇게 될 줄은 저도 몰랐으니까요. 저에 대한 믿음이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와, 좀 놀랍습니다? 해제 요청도 임의로 할 수 있고 가이드도 막 갈아치울 수도 있고. 트리플 S급이 좀 대단하긴 해요. 그렇죠?
“김윤조, 내가 다 설명할게. 일단 얼굴 좀 보자, 회색 치워 봐.”
수혁이 숫제 인큐베이터에 들러붙었다.
-그보다는 일단 나가 주시겠습니까? 제 뇌파 패턴에 혼란이 와서 점검에 방해가 됩니다.
“김윤조. 내가 어떻게 너를 떠나.”
수혁이 회색 인큐베이터 유리 옆에 기어이 무릎을 꿇으려 했다. 그때 심 박사가 보란 듯이 그를 툭 밀쳤다. 드라마틱하게 쓰러지는 망나니를 본 심 박사가 코웃음을 쳤다.
“가지가지 한다.”
-스캔 완료.
심 박사가 신경질을 부리는 사이 롭슨이 빠르게 스캔 결과를 훑었다.
-전부 정상입니다.
“그렇겠지.”
이번에도 예상했다는 듯이 심 박사가 시니컬하게 대답했다. 심나연이라는 인간은 우리 편이지만 아니 우리 편이라서 도리어 여러모로 참 재수 없었다.
“하지만 기존 패턴을 비교 분석하면 어떨까?”
삼류 악당 같은 대사를 뱉은 심 박사는 뒤이어 패드를 경쾌한 손길로 두드렸다. 그러자 인큐베이터 시스템에 기존 패턴 데이터가 덧입혀지면서 2차 결과가 주르르륵 뜨기 시작했다. 그마저도 대부분 정상이었다. 일부 안 맞는 패턴이 있긴 했으나, 그건 뇌 리셋으로 인한 오차 범위 내였다.
“어? 이럴 리 없는데?”
-제가 이상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냥 착각이라니까요.
“하지만 전투 중에 들은 환청은 이쪽 기록상에도 남아 있단 말이야.”
-전투 중에요? 제가 말입니까?
믿지 않는 윤조를 비롯한 다른 사람에게 제 말이 옳음을 증명하겠다며 심 박사는 어떤 음성 기록을 제 작은 패드에 띄웠다. 물론 윤조에게는 인큐베이터를 통해 전달했다.
그것은 얼마 전 북태평양 상공에 출현한 F형 게이트와의 전투로, 초거대 플라이, 일명 ‘황금뚱땡이’를 강수혁 소령이 단독으로 상대하고, 그를 제주도 함상에 있었던 김윤조와 임성준이 함께 지원할 때였다.
-야! 강수혁! 시발! 대답 안 해? 강수혁, 이 개새끼야! 대답해!
-이 빌어먹을 개새끼야! 대답하라고! 시바아알! 12시간 다섯 번 한다고 했잖아! 지금 뒈지면 못해! 이 개새끼야!”
-강수혀억! 돌아와! 돌아와! 여기야! 여기라고! 강수혁! 이 개새끼야! 돌아와!
-김 준위, 진정하세요! 케이블 분리하지 않습니다!”
-강수혁 이 개새끼야아! 아프면 버티지 말고 돌아오라고! 시발! 누가 네 목숨까지 버려 가면서 지구 지키래! 너부터 챙겨, 이 좆같은 새끼야!
-뭐? 강수혁 개새끼? 이 또라이 새끼가…… 무인도에서 멀쩡히 걸어 나오기 싫은 모양이지?
-강수혁!
오디오 클립이 끝났다. 음성 파일의 절절함과 비장함에 비해 연구실 분위기가 지나치게 차분했다.
-제가…… 선을 많이 넘었는데…… 어…… 소령님. 전투 중이라 제가 좀…….
“기다려 봐. 하나 더 있어.”
순식간에 사과받는 입장에서 사과해야 할 입장이 된 윤조를 심 박사가 차단했다.
-아프다면서요?
-뭐?
-등입니까? 뒤돌아 보세요?
-뭔 개소리야?
-어디를 당했습니까? 혹은 벌써 재생이 끝난 겁니까? 소령님처럼 통각 신경이 아예 고장 난 탈인간이 아프다고 비명을 지를 정도면 엄청난 부상일 텐데. 벌써 재생이 끝난 겁니까?
-내가 비명을 왜 질러?
-아까 아프다고 악을 썼잖습니까!
-정신 나갔냐? 이게 상관도 못 알아보고 쌍욕 찍찍 발사할 때부터 알아봤어야 하는데. 너 정말로 어디 제대로 고장 난 거 아냐?
-분명히…… 통신으로…….
-통신은 무슨. 좆같은 황금 뚱땡이 놈 때문에 전파가 아예 끊겼는데. 페어링 감각도 없어지고. 그래서 일단 네 상태 파악하려고 후퇴한 거야. 쯧쯧. EMP에는 인조 인간도 별수 없군. 헬멧 좀 튼튼히 만들지.
-두 분! 지금 그럴 때가 아닙니다!
오디오 클립이 끝나고 강수혁이 입을 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나는 아프다고 한 적 없어. 내 전투복 기록을 다 뒤져 봐도 좋아.”
“이미 확인했어.”
심 박사가 쐐기를 박았다.
이번엔 윤조가 할 말이 없었다.
-저는 기억이 없습니다.
“뇌를 재건 후 최근 기록은 전부 AI 로그를 통해 리마운트했으니 네가 굳이 전투 기록을 찾아보지 않았다면 모를 수 있지.”
그 말에 바로 리마운트한 로그를 뒤졌다. 그리고 제가 건성으로 넘긴 로그에서 같은 화상 기록을 찾을 수 있었다.
-있네요. 당시 제 감정 패턴도 있습니다. 주요 항목으로 공포, 분노, 우려가 있습니다. 공포를 보면…… 제가 걱정을 많이 했나 봅니다.
“네게는 환청이 실제였단 소리야. 강수혁이 아프다고 외쳤다는 거지. 동조율이 통상 허용범위를 넘었기 때문에 강 소령의 의식을 넘어선 기저와 통한 줄 알았는데 말이지. 뇌 재건 후에도 이런 일이 다시 발생했다는 건, 수혁의 혈액을 인공 양수 베이스로 사용해서 서로 간의 동조율이 내가 예상한 범위를 넘어선 걸까? 하지만 모든 수치가 정상이니. 이건 어떤 방식으로 접근해야 할지 모르겠어.”
심 박사가 혼잣말 같은 설명을 이었다.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인지, 혹은 환청인지는 텔레패서라면 확인 가능합니다.
롭슨이 제안했다. 그에 에이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텔레파시로 확인하면 돼. 단지 그런 상황이 발생할 때 같이 있어야 하지만. 에이브리, 가능한가요?”
-저는 연구 서포트를 맡고 있습니다. 당연히 가능합니다.
“저 여자랑 항상 같이 다니라고? 누구 마음대로?”
트리플 S급의 언성이 곱지 않았다.
“어쩔 수 없잖아. 당분간만 그러면 돼.”
“전투 이후로 몇 달이 지났는데. 앞으로 다시 발생할 때까지 반년이 더 걸릴지 어떻게 알아?”
“그럼 걱정하면서 비상 프로토콜을 실행하질 말든가.”
“차라리 장세인을 불러.”
“걔가 여기까지 잘도 오겠다.”
심 박사와 강수혁이 팽팽하게 맞섰다. 그러는 사이 윤조는 각종 걱정이 앞섰다.
자신이 정말로 뭔가 환청을 들었다. 벌써 두 번째다. 당장 뭔가 문제는 되지 않을 테지만, 잠재적 위험 요소인 건 확실했다. 당장은 아군에 피해가 없으나, 혹여 ‘환청’으로 인해 전투 중에 교란되면, 최악의 경우 타아를 구별 못 하고 아군을 적대할 수도 있다.
윤조의 혼란은 곧이어 강수혁의 혼란이기 때문에 자칫하다가는 큰 참상으로 이어질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렇기에 심 박사가 이렇게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다.
에이브리와 함께 다니는 방편도 결과적으로 임시며, 무엇보다 현상 관찰 혹은 파악을 위한 수단일 뿐, 환청 문제를 해결할 근본적인 해법은 아니다.
이런 문제가 왜 발생하는 걸까?
-아무래도 제가 프로토타입이라서 그런 걸까요?
윤조의 물음에 말다툼하던 두 사람이 동시에 입을 다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