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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39화 (216/256)

139화

수혁은 착륙 직전 속도를 급격히 줄여 충격 없이 부드럽게 헬기장 바닥을 터치했다. 그리곤 무른 공처럼 부드럽게 튀어, 지면과 30cm 간격을 두고 활공을 시작했다.

AI가 전송하는 정보는 마치 수혁 본인이 하는 발상이나 자유의지와 구별하기 힘들다는 점에서 마치 신의 계시와도 비슷했다. 그저 가고 싶은 대로 마구 움직일 뿐인데 자연스럽게 목적지에 닿았다.

심 박사가 윤조를 안고 다가오는 수혁을 향해 손을 저었다. 곁에는 망할 영감도 함께였다.

“야, 무슨 일이야? 뭔데 갑자기 긴급 신호야?”

이쪽으로 뛰어오면서 심 박사는 윤조부터 확인했다.

“별일 아닙니다. 그저…….”

“이 자식, 환청 들어.”

수혁이 윤조의 말을 끊었다.

“환청?”

심 박사는 수혁을 흘끔 보더니 두 손으로 윤조의 두개골을 만졌다.

열 손가락 끝이 두피를 헤집는 감각이 낯설어서 윤조는 고개를 뒤로 쓱 뺐다. 하지만 초고층 빌딩용 H빔으로 후려쳐도 흠집 하나 나지 않는 트리플 S급 흉근이 뒤통수를 단단히 막고 있어 물러나기에 한계가 있었다.

“만져서는 무슨 부상 같은 게 없는데? 어디 부딪쳤어? 아니면 네가 때렸니?”

심 박사가 수혁을 흘깃 보았다.

“귀한 내 두부를 내가 왜 때려? 어디 부딪힌 데도 없어.”

“아닙니다. 진짜 별일 아니에요. 그냥 제가 착각을 좀 했을 뿐인데 소령님이 괜히…….”

“이 자식 조금이라도 이상하면 즉시 연락하라고 했잖아.”

윤조가 항변했으나 이번에도 수혁이 끝말을 먹어 버렸다.

“그랬지. 업데이트로 인해서 무슨 오류라도 생겼나? 그래서 무슨 환청을 들었는데?”

괜히 귓바퀴를 더듬던 심 박사의 물음에 수혁이 심각한 톤으로 대답했다.

“나는 뽀뽀하자고는 안 했는데 묻지 말고 그냥 하라잖아.”

연수 인근을 더듬던 손이 우뚝 멈췄다. 순간 윤조는 조용히 눈을 내리깔았다. 차마 상대의 눈을 직접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래?”

“나는 진짜 말 안 했는데 이 자식이 자꾸 그랬다고 우겨서 가이드 로그까지 확인했어.”

머리를 더듬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이심전심이라고…… 저는 그렇게…….”

윤조가 열심히 변명을 주워 삼켰다. 양쪽으로 떨어졌던 중년 여성의 손이 슬그머니 올라오더니 가슴 앞에서 팔짱을 형성했다. 동시에 성질 사나운 천재 박사가 애용하는 검은색 통굽 실내화가 바닥을 툭툭 치기 시작했다.

“내려 주십시오.”

윤조는 머저리 같은 남자친구의 가슴을 퍽 치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죄송합니다. 제 AI에 응급 명령이 있는 걸 알았다면 소동을 피우기 전에 막았을 겁니다.”

사과하더라도 따질 것은 따져야 했다. 응급 프로토콜의 존재를 윤조가 알았다면 이런 한심한 짓을 하게 두지 않았을 거다.

철컹철컹철컹.

저쪽에서 롭슨이 이끄는 의무병들이 의료용 이송 베드를 가져오고 있었다. 그때 윤조는 다시 한번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그들을 향해 별일 아니니 베드를 가져올 필요가 없다고 신호를 하려는 때였다.

심 박사가 몸을 휙 돌렸다.

“김윤조. 이번이 두 번째야.”

“예?”

“너, 환청 들은 게 벌써 두 번째라고.”

심 박사는 별달리 화를 내지도, 혹은 짜증을 부리지도 않았다. 도리어 전에 없이 진지했다. 오히려 이쪽이 당황스러웠다.

이동형 베드를 향해 심 박사가 턱짓했다.

“올라가. 풀 검사 돌릴 거야.”

연구실까지 걸어가도 되는데. 하지만 윤조는 입을 달싹이는 대신에 묵묵히 베드 위로 올라갔다.

“빨리 가자.”

수혁이 재촉했다. 의무병이 베드를 붙잡고 밀려는 순간 그들은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려 모조리 뒤로 밀려났다. 베드는 지상에서 무릎만큼 뜬 상태로 활공했다. 심 박사와 함께 수혁도 빙판 위를 누비는 스케이터처럼 미끄러졌다.

“이쪽이야.”

심 박사가 수혁에게 이동 방향을 지시하였다.

트리플 S급의 긴급 귀환을 인지한 연구동 관리 책임자는 경계가 삼엄한 출입구에서부터 최고 보안 시설인 합동 가이드 연구개발실까지 한 방에 그들을 통과시켰다. 무시무시한 두께를 자랑하는 육중한 철문이 닫기기 전에 롭슨과 의무병들이 따라붙었다.

가이드 연구실은 아직 구성 중이었다. 곳곳에 새로 사거나 혹은 사용감 있는 집기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수선했다. 그 가운데 제대로 돌아가고 있는 건 막 설치를 마친 인큐베이터와 그에 연결된 시스템 컴퓨터뿐이었다.

심 박사는 곧장 시스템에 접속했다. 손목에 차고 있던 소형 단말기가 알아서 심 박사의 생체 코드를 체크하고 로그인을 승인했다. 그러는 사이 수혁은 알아서 윤조를 인큐베이터에 집어넣었다.

“옷은 벗겨?”

수혁이 묻자 심 박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잇달아 롭슨에게 지시를 내렸다.

“응, 뚜껑 덮고. 롭슨, 뇌파 감지 장치 봐줘요.”

-좋아요.

눈 깜짝할 사이에 윤조는 나체로 인공 양수에 잠기고 있었다. 보글보글 올라오는 공기 방울 사이로 익히 알지만 반갑지는 않은 얼굴이 불쑥 들어왔다. 노리스였다.

-이 사람이 왜 여기 있습니까?

깜짝 놀란 윤조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쿵.

덕분에 덮개에 이마를 부딪쳤다. 제법 강한 충격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노리스 반대편에서 누군가 대답했다.

-노리스 제독도 우리 팀이에요.

에이브리였다. 이쪽도 반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누구 마음대로? 그리고 우리 팀이라뇨?

“둘 다 내 두부에게서 떨어져.”

수혁이 못된 쥐 떼를 쫓는 사람처럼 손을 털었다. 그와 동시에 두 사람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힘에 떠밀리면서 주변에 흩어진 집기를 건드렸다.

“연구실 안에 민감한 자재들 많으니까 힘은 쓰지 마.”

“아니 저 영감탱이랑 저 여자가 여기 왜 있냐고. 대머리만 있는 거 아니야?

“그렇게 됐어. 유용한 머슴들이라 도움이 될 테니까 좀 참아.”

심 박사가 빠르게 패드를 조작하면서 대답했다.

-노-삐리리-라니. 그런 표현은 안 됩니다. 그리고 노-삐리리-가 아니라 공동 연구진입니다. 수정된 다자 합의서를 검토하세요.

머슴은 번역기를 거치자 노예라는 험악한 표현으로 바뀌었고, 그에 ‘표현’에 민감한 롭슨이 한소리를 했지만 아무도 듣지 않았다. 심지어 노리스도 마찬가지였다.

-흐음. 환청이라니. 가장 강대한 에스퍼를 담당하는 가이드에게 정신적 문제가 있는 건 심각한 일이야. 이걸 잘 해결해야 할 걸세, 심.

“별일 아니니까 그렇게 침 흘리지 말아요, 영감님.”

노리스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하여간 방심할 수 없는 영감 같으니.”

“뭐야? 지금 김윤조 건드리려고 했어?”

뒤늦게 눈치챈 강수혁이 노리스 앞을 막아섰다.

김윤조 없이 노리스를 상대하다가 당한 전적을 바탕으로 AI와 김윤조, 그리고 강수혁의 뇌파 패턴 방화벽을 새로 구축했다. 전부 업그레이드 항목이었다. 하지만 상대도 이미 그걸 예측하고 분석에 들어갔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군 자산끼리는 실질적 충돌은 어쨌거나 이쪽에 대한 힌트를 흘리기 마련이다. 괜한 물리적 충돌로 관련 정보를 굳이 상납할 필요는 없다.

“아서라, 너는 저 영감한테 당한 전적이 있잖아.”

대신에 심 박사는 대놓고 불쾌감을 표시했다.

“영감님, 헛소리 그만하시고 비켜요. 성가시니까. 내 신경 거슬리면 김윤조랑 기타 등등 다 뜯어 짊어지고 귀국하면 그만이야.”

강수혁이 지척에 있는 이상, 심 박사의 협박은 실현 가능성 1,000퍼센트를 능가한다. 특히 김윤조에 관해서는 히스테리컬한 자폭 장치에 가까운 트리플 S급을 자극할 시에 하와이가 지도에서 사라질 수도 있다. 그 가공할 능력을 노구(老軀)로 생생하게 체험한 노련한 제독은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동맹 사이에 이렇게 신뢰가 없어서야.

“신뢰 같은 소리하네. 영감탱이가 오는 줄 알았으면 하와이에 안 왔어.”

강수혁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홍채에 특유의 오로라 링이 생성되자 본 노리스는 겁도 없이 그 패턴을 빤히 응시했다.

-언제 봐도 특이하고 아름답단 말이지.

“아구창 다물라고 했지.”

성질이 받힌 수혁이 주먹을 꽉 쥐었다. 동시에 한 공간에 있는 모든 집기가 진동했다. 그러면서 인큐베이터를 운영하는 시스템의 스크린에 노이즈가 생겼다.

-저 계속 이러고 있어야 합니까? 검사할 거면 빨리하고 끝내고 싶습니다.

말을 마친 윤조가 일부러 들으라고 크게 한숨을 쉬었다. 폐에 남았던 공기가 입과 코를 통해 빠져나가면서 기포가 인공 양수를 헤치고 보글보글 떠올랐다.

-프로그램 시동 준비 끝났습니다만.

롭슨이 윤조와 뜻을 같이했다.

수혁은 인큐베이터 곁에 다가섰고, 심 박사는 끝끝내 자리를 비키지 않는 노리스를 외면하고 시스템 패널에 시선을 던졌다.

인큐베이터 유리 덮개 위로 최신형 바디 스캐너가 움직였다. 스크린에 스캔 자료가 실시간으로 표시되었다. 뒤이어 각종 코드와 수치가 더해지고 그 옆에 줄줄이 ‘정상[NORMAL]’ 이라는 표시가 잇달아 떴다.

“목 아래로는 정상이겠지.”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심 박사는 패널을 두드렸다. 그에 따라서 롭슨이 인큐베이터 버튼을 조작하고 코드를 연결했다.

두부(頭部) 집중 스캔이 시작되었다. 특작부에서 사용하던 프로토타입 인큐베이터로는 풀스캔까지 보통 10분 정도 걸리는데 이것은 그보다 짧은 5분 45초가 걸렸다. 더불어 정밀도는 10배를 능가했다.

미군이 제공한 시설이 아니었다. 아무런 정보를 받지 못했지만, 그냥 윤조가 받는 느낌이 그랬다. 새 단장 했어도 익숙한 진동과 전파에서 ‘우리 집’임을 확신했다.

-언제 새 설비를 개발하셨습니까?

“네놈들이 등신 같은 연애질 하는 사이에. 이전 네 인큐는 원래 가이드 제작용으로 원래 용도로 돌리고 검진용으로 새로 만들었어. 망나니 모델료로 개발비 일부 메꿨다.”

그러면서 심 박사는 손목에 걸린 화려한 다이아 팔찌를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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