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대(對) 게이트 시대에 접어들면서 각국의 군사적 협력은 매우 긴밀해졌으나, 그만큼 반목과 갈등도 많았다. 여차하면 우리만 살겠다는 속내를 공공연하게 드러내기도 하면서 자잘한 군사 충돌도 많았다. 지구적 재앙 앞에서 어리석게 자국의 자존만 우선하는 몇몇 국가 때문이었다.
가장 가까운 예시가 바로 일본이었다.
40년 전 미국 동부에 게이트 일곱 개가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세븐 홀(Seven Hole)’ 사건 때 일본은 미국이 망하리라 속단하고 빠르게 중·러와 동맹을 강화했다. 이후에 미국이 미친놈처럼 부활하면서 미일 동맹은 자연스럽게 격하되었다.
하와이 중심으로 미국 영해에 한참 멀찍이 떨어진 공해상에 러시아, 중국, 일본 함대가 맴돌았다. 그보다 가까운 해안에는 EU 정부 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든 정찰 자원을 동원하여 하와이를 감시 중이었다. 목적은 단연 강수혁이었다.
반대로 제국주의가 생산한 형제국답게 똘똘 뭉친 ‘다섯 눈’ 국 함대는 하와이 기준 미국 영해를 자유롭게 오갔다. 미 12함대에 임의 승선하여 강수혁과의 접촉을 시도하는 것도 다섯 개국만 가능했다. 하지만 트리플 S의 더러운 성질머리를 뚫고 협력을 이끌어 내는 국가적 쾌거를 이룬 자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하와이 주둔 부대에서 해안 도로를 따라 차량으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거대한 연구단지가 있었다. 거기에 있는 헬기 착륙장에 수송 헬기가 호버링(Hovering, 항공기 등이 일정한 고도를 유지한 채 움직이지 않는 상태) 중이었다.
헬기 바닥에 채 닿기도 전에 뻥 뚫린 헬기 옆구리를 통해 한 에스퍼가 뛰어내렸다. 늘씬한 실루엣을 자랑하는 텔레파시 에스퍼는 금방 착륙 구역을 벗어나 자신을 기다리는 인물들에게로 다가갔다.
군인답지 않게 두루뭉술한 실루엣에 살짝 벗겨지는 정수리가 안타까운 중년 코케이젼 남자는 캐나다 해군 소속 최고 두뇌 롭슨이었다. 그 옆에는 한국 육군 특작부 마크가 찍힌 오버사이즈 군용 바람막이와 군용 체육복에 슬리퍼 차림인 동북 아시아계 중년 여성은 사상 초유의 A급 두뇌 강화 인간인 심나연이 서 있었다. 그녀는 한쪽 귀에 소형 통신 번역기를 끼고 있었다.
-실패했습니다.
“내가 뭐랬어. 소용없다고 했지?”
에이브리의 보고에 심나연은 피식 웃었다. 살짝 기대했는지 롭슨은 쓴 입맛을 다셨다.
-흠. 정말로 신혼여행으로 착각하는 걸까요.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신혼여행인 걸세.
뒤에서 노년 신사가 다가오며 롭슨에게 답했다.
짙은 초콜릿색 피부와 대조적으로 흰색 곱슬머리를 가진 아프리카계 노년 남자는 다름 아닌 로건 노리스 제독이었다.
-우리 친애하는 트리플 S급 에스퍼는 정말로 신혼을 즐기고 있는 거야.
“첫 해외여행이니까 얼마나 신나겠어.”
심나연 또한 노리스의 의견에 동의했다.
-이참에 허니문 베이비라도 생기면 좋겠군. 그 둘의 유전자가 섞이면 아주 걸작이 나올 텐데 말이야.
“그걸 왜 이제 말해요? 미리 말했으면 신체 강화 중에 자궁을 심었을 텐데.”
심나연이 노리스를 향해 정색했다.
-그땐 자네와 나는 서로 모르는 사이였지 않나. 그러게 왜 몰래 개발했나. 처음부터 미군에 도움을 청하지.
“공동 개발로 기술 교류하자고 했을 때 알아서 하라고 팽한 놈들이 누군데. 그쪽 윗대가리 아닙니까. 거기다가 강수혁 탈취 미수 당사자가 그런 말 하면 잘도 믿음이 가겠네.”
-이제라도 교류하게 되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참에 자네와 친분도 쌓고 말이야.
노리스가 허허 웃었다.
솔직히 말이 협상이지 거의 드잡이질에 가까웠던 군사 다자 협상 및 미국과의 단독 협상은 강수혁이 하와이에 가겠다는 한마디에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그 과정에서 협상 대상자였던 노리스의 적극적인 도움도 큰 역할을 했다.
에스퍼 강수혁의 초월적인 능력과, 가이드 김윤조의 놀라운 퍼포먼스, 그리고 그 페어를 훌륭하게 완성한 심나연의 미친 두뇌에 깊은 감명을 받은 노리스는 특작부와의 긴밀한 교류를 위해 미 정부와 미군 상부를 끊임없이 설득했다.
김윤조에 의해 크게 다치고 강수혁에 의해 납치된 최초의 가이드 당사자가 ‘이들을 놓치면 안 된다. 무한히 양보하더라도 무조건 협력해야 한다’며 강력히 주장하니 미국 측에서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다.
미군 내 강경파는 12함대를 우선 내보내는 조건으로 결국 합의에 동참했지만, 조금 전 강수혁이 단독으로 박살을 내면서 아예 힘을 잃게 되었다.
노리스는 처음부터 그러리라 예상을 했기에 별로 충격을 받거나 안타까워하지 않았다. 도리어 사상 최강의 에스퍼에게 시비를 걸고도 그 정도 피해에 그친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심지어는 강수혁 같은 막강한 전력이 열 명만 있어도 게이트 시대를 종식하는 건 일도 아닐 거란 점에서 오히려 아쉬움까지 느꼈다.
-그래서 자궁 이식이 가능하다고?
“인공 자궁 써도 되고. 하지만 김윤조가 싫어할 거라서 현실적으로 가능성은 없지 않을까 하는데. 강수혁을 실험체 취급하면 가만히 안 있을 거거든. 그런 말 꺼냈다가 영감님 머리에 바람구멍이 한국군 규격 사이즈로 날 테니 사려요.”
-흐음. 그 가이드는 참 특이하단 말이야. 나도 가이드지만 말이지. 이것이 애정 기반으로 한 전속 가이드의 특성인가?
“모르죠. 김윤조만의 개체적 성향인지 혹은 제가 개발한 가이드 시스템 자체의 특성인지는 후속 가이드가 완성되면 판가름 나겠죠.”
-지금 후속체는 얼마나 완성되었나?
노리스는 마치 오늘 저녁 메뉴를 묻듯이, 특작부 최고 기밀을 꺼냈다. 원칙적으로 이번 교류 동안 후속체의 존재도 확인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하지만 노리스가 그 화제를 입 밖으로 꺼낸 건, 이미 북미 양군의 핵심 인력이 그 존재를 이미 파악하고 있음을 암시하고 또한 그에 관해 적극적인 파악에 나설 거라는 것을 암시했다.
그에 심나연 또한 저녁 메뉴를 고민하듯 먼 공해상을 보았다.
혼자서 가이드를 만들어 내긴 했지만, 양산화 물량을 과연 한국이 단독으로 감당할 자신이 있나? 하면 그건 아니었다. 더불어 인류 존속의 대승적 관점에서는 다자 협력이 절실했다. 특히 미국이 한국과의 군사 동맹을 파이브 아이즈 급으로 올리겠다는 파격적인 조건을 내건 만큼 굳이 감출 이유도 없다.
더불어 심나연 개인적으로 노리스 제독이 제공할 수 있는 가이드로서 경험과 각종 자료가 대단히 욕심나기도 했다. 또 관련 데이터를 참고하면 심나연의 가이드 시스템은 한층 공고해질 것이다.
“신체 강화는 진즉에 끝났고 AI 시스템과 연결 및 페어링 시스템 마운트 단계에 곧 진입합니다. 그보다는 후보 에스퍼 선정이 골치죠, 뭐. 이번 가이드도 남자인데 후보 에스퍼도 대부분 남자라서. 여자는 안정적이라 가이드 붙일 이유가 없고. 하여간 불알 달린 놈들이 문제야.”
-가이드로서 땅콩 달린 놈들이 문제라는 데에 완전히 동의하네. 이게 유전자 차원의 문제인지 모르겠지만 난데없이 대형 사고를 치는 건 테스토스테론이 넘치는 놈들이긴 하지.
두 사람이 의외로 척척 합을 맞추는 걸 롭슨이 묘한 표정으로 지켜봤다.
-왜 그러나?
-두 분, 서로 적이 아니었나요? 크흠. 그러니까 서로 납치 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
노리스와 심나연을 번갈아 가리키던 롭슨은 머쓱한 듯 검지로 제 뺨을 긁었다.
“무슨 촌스러운 소리를 하고 있어? 인류가 멸망을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하는 판국에 그깟 납치가 문제야.”
-이 세상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아군도 없다네.
둘의 역공이 들어오자 롭슨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옆에 있던 에이브리가 제 상관을 향해 고개를 저었다.
-저들은 진심입니다, 롭슨 대령. 상식선에서 이해하려고 들지 마세요. 에스퍼인 저도 이해를 못 하니까요.
에스퍼 작전 통솔 본부는 미국 하와이 주둔 부대가 담당한다. 하지만 가이드 시스템 연구의 핵심은 ‘김윤조’라는 초유의 특수 가이드를 단독으로 개발한 A급 두뇌 강화 인간이 맡아야 했다. 자연스럽게 연구의 헤드라이너는 심나연, 그의 공동 연구자로 롭슨, 그리고 감독 및 조언은 노리스를 통한 미국 B급 강화 두뇌 집단 베타클럽이 맡게 되었다.
연구지로 미국 본토 동부 지역을 강력하게 주장했으나, 그건 심나연이 절대 불가를 통보했다. 강수혁과 일정 거리 이상 떨어질 수 없고, 만약 그걸 요구한다면 차라리 한국에서 단독 연구를 이어 가겠으니, 닥치고 하와이에 연구실을 내놓거나 아니면 여기서 끝이라는 입장을 고수하자 결국 연구 본부 또한 하와이에 마련되었다.
드론 세 기를 잃은 호주 해군 측 파병단 또한 하와이에 들어왔다.
교회 목회자를 방불케 하는 미국식 가이드와 달리 호주 가이드는 프로 스포츠팀 코치에 가까웠다. 그중에서도 가장 이름을 날리는 로아무아 중령은 50대에 접어든 남태평양 혈통 여성으로, 골초에 우람한 덩치를 가져 웬만한 애송이는 한 손으로 날려 버리는 괴력의 소유자기도 했다.
헬기에서 뛰어내린 로아무아는 반쯤 태운 시가를 툭툭 털면서 다가왔다. 군용 러닝셔츠에 군복 바지를 입고 이름표를 건 로아무아는 우람한 근육에 못지않은 훌륭한 굴곡을 자랑하는 몸을 가졌다. 사전에 기초 신상 정보를 제공받지 않았다면 가이드가 아니라 특수부대 야전 사령관 정도로 알았을 것이다.
-오랜만일세, 로아무아.
-파파 노리스. 총알을 세 방이나 맞았다더니 멀쩡하네요. 여기 있는 걸 보니 은퇴는 또 미뤄졌나 봅니다.
-그렇게 되었네.
서로 잘 아는 사이라 심드렁하게 인사한 로아무아는 롭슨과 에이브리에도 눈인사를 하더니 초면인 심나연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당신네 에스퍼에게 드론 세 기를 잃었어.
“고작 그거밖에? 우리 망나니가 많이 봐줬네.”
초면부터 예의 상실이라 심나연은 콧방귀를 뀌었다.
로아무아는 어깨만 으쓱했다. 시가를 쭉 빤 그는 훅 뱉었다.
-시시한 애송이와는 체급이 다르던데. 길들일 보람이 있어 보여. 재미있을 거야.
“어쩌나? 우리 망나니는 이미 따르는 주인이 있는데 말이야.”
심나연이 지지 않고 맞받아칠 때였다.
삐삐삐.
심나연에 손목에 걸린 시계형 단말기가 울었다. 점멸하는 붉은 신호를 확인하자마자 사이렌 경보가 터졌다.
웨에에에에엥.
[미확인 비행 물체 접근 중, 안전지대로 즉시 피신하시오.]
다들 건물 안으로 뛰어가려는 것과 반대로 심나연은 도리어 앞으로 나갔다. 놀란 롭슨이 심나연의 팔을 잡았다.
-심 박사!
“아니야, 저거 우리 망나니야! 롭슨! 당장 인큐베이터 준비해!”
롭슨의 팔을 떨치며 소리친 심나연은 빠르게 접근하는 비행체를 향해 냅다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