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이번엔 수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보면 몰라? 내가 그렇게 티를 안 냈나?”
“아뇨. 아는데요. 그냥 실질 감정은 어떨까 하고…… 괜한 짓이었죠.”
“그래서 할 때 내 감정을 느낀 소감은?”
“가이드의 강화 뇌가 버티지 못할 만큼 강력했어요. 감정 동조 한계치를 순식간에 넘어서 AI가 응급 프로토콜을 시행했습니다.”
“그래?”
수혁은 약간 어떻게 반응할지 모르는 기색이었다. 부끄러운 것 같기도 하고, 한편으로 가장 은밀한 속마음을 윤조가 멋대로 들여다봐서 조금 화가 나 보이기도 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진 없어. 그런데 앞으로는 하지 마.”
“네.”
윤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은근슬쩍 벌어지는 입매를 감추진 못했다.
“소령님이 절 그렇게 좋아하는 줄은 처음 알았습니다.
“…….”
수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그의 잘생긴 광대와 귓불을 중심으로 붉은 기운이 확 솟았다. 뻔뻔하고 능글맞으면서 어떨 때는 정말이지 순진하게 나온다. 그 덕분에 괜히 윤조마저도 명치가 일렁거렸다.
“미안합니다.”
“뭐…… 됐어.”
멋쩍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게 아니라 이렇게 좋아하는 걸 예전엔 알지 못해서요.”
“알아 달라고 하기에는 내 태도도 썩 좋지는 않았잖아. 솔직히 개차반이었지.”
“오, 알고 계셨습니까?”
짐짓 놀리듯 반문하자, 수혁이 벌건 얼굴로 윤조를 곁눈질했다.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른 건지 정도는 알고 있어. 그리고 솔직히 너 같은 또라이가 아닌 이상 용서하고 받아 줄 수준이 아닌 것도.”
감정 동조가 정상적으로 작동 중이라면 아마도 AI는 치솟는 분노와 가학에 관한 경고를 했을 거다. 감정 벡터를 제대로 해석하게 된 이후로 분노와 가학이 뜰 때마다 안타까웠다. 그건 짙은 후회와 절절한 자기반성의 강수혁식 표현이니까.
“기특하네요.”
망나니가 철이 든 듯하여 괜히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무의식중에 손이 먼저 나갔다. 군인치고 제법 긴 머리카락이 윤조의 손가락 사이사이로 들어왔다. 겉보기에 뻣뻣한 흑발은 제법 부드러워서 윤조가 정수리를 쓰다듬고 토닥일 때마다 살랑살랑 흔들렸다.
“하…….”
낮은 헛바람과 함께 에스퍼의 훤칠한 이마가 살짝 구겨졌다. 감정 동조를 일시 차단했으나, 그의 속마음이 복잡미묘함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연하 부하 주제에. 감히 하늘 같은 상관의 머리를 쓰다듬어서 죄송합니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주제에.”
“감정 동조가 쌍방 시스템이 되었다는 얘기는 못 들었는데. 그런데 두상이 아주 동그랗네요. 어디 깨졌던 흔적도 없어 보이고요.”
만지는 김에 두피 곳곳을 뒤적였다. 그 바람에 고개를 앞으로 푹 숙이게 된 수혁이 “야야, 무슨 짓이야!”라고 소리를 쳤다. 하지만 양팔로 안고 있는 윤조를 떨어뜨리진 않았다. 신체의 균형이 무너지기 무섭게 자연스럽게 발동되는 능력 때문이었다.
“게다가 저보다 커요.”
“키와 덩치가 있는데 머리통이 너보다 작으면 그게 거북이지, 사람이냐?”
“연예인 같을 줄 알았죠. 하긴 소령님 헬멧 치수가 XXL니까.”
“너도 웬만한 남자 아이돌 비율이거든? 네 머리통이 작은 걸 생각해. 시커먼 남자가 헬멧 L이 뭐냐, L이.”
“군인 평균입니다.”
“강화 인간치고는 작아.”
“저는 인조 강화 인간이거든요.”
“하여간 한마디도 안 지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 어색함이 한결 가셨다. 사상 최강 에스퍼의 광대에 드물게 떠올랐던 홍조도 자취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기저에 도사리는 옅은 열기와 간지러움은 여전했다.
하다가 기절해서 하산하는 길이다. 제 하의와 더불어 상대의 상의도 인근 공중을 배회하고 있다. 분명히 우스꽝스럽고 민망해야 했다. 그런데도 저를 바라보는 상대의 눈길에 명치 인근이 찌릿찌릿하고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심박 상승 중.
아니나 다를까 AI가 신체 변화를 통지했다. 제가 느끼기엔 당장 심장 마비를 대비하라고 할 법한데 의외로 상승 고지만 하는 걸 보면 생각보다 신체 본연에 가해지는 압박은 덜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 숨쉬기가 힘들지? 심장이 아픈데.’
그러면서도 심장 통증 유발 원인으로 강하게 의심되는 미형의 낯짝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윤조보다 두 치수가 큰 머리에 달린 이목구비는 그렇지 않아도 선명한데 점점 다가오기까지 했다.
-김윤조…… 키스.
감미로운 저음이 우주 배경 복사처럼 사방에서 들렸다. 아니 어쩌다가 목소리까지 이렇게 멋지면 어쩌란 건지.
“그런 건…… 물어보지 말고…… 하십시오.”
떨리는 숨을 들이마시며 간신히 대답했다. 그러자 막 다가오던 얼굴이 우뚝 멈췄다.
“뭐?”
“예?”
대화가 엇갈렸다.
“뭘 묻지 말라는 거야?”
수혁이 어리둥절한 듯 고개를 옆으로 살짝 기울였다.
“방금 키스하자고 하셨잖습니까.”
“내가?”
“예.”
분명히 들었다. 새로운 말장난인가? 이쪽이 피식 웃는 것과 반대로 상대는 점점 웃음기를 거두었다.
“너, 정밀 검사 해야겠다.”
“예?”
미끈한 낯에 음심이 사라지고 대신에 근심이 대신 떠올랐다. 무슨 농담을 정색까지 하면서 하는지.
“나는 한마디도 안 했어.”
“구라도 작작 치십쇼. 이런 허술한 수작질엔 안 넘어갑니다.”
“그러니까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고.”
“참나, 분명히 ‘김윤조 키스’라고 하신 거 들었습니다. 이래 봬도 제 머리가 인공지능과 연동되어 있어요. 군사용 슈퍼컴퓨터요.”
“안 했다니까. 일단 옷부터 입어.”
정색한 수혁은 윤조를 놓아주었다. 그렇다고 해서 바닥에 떨어지는 일은 없었다. 염력이 윤조가 땅에 닿지 않게 보조했다. 더불어 둥둥 떠오던 바지가 앞으로 휙 날아왔다. 윤조는 공중에 뜬 채로 바지를 잡아 다리를 끼웠다. 뒤이어 새로 산 슬리퍼도 제 위치로 날아왔다.
윤조와 달리 상의를 입을 생각이 없는 수혁은 팔짱을 끼고 윤조를 심각하게 쳐다봤다. 두툼한 흉근이 섹시한 방식으로 강조되어 이쪽 정신 건강에 좋지 않았다. 시선을 억지로 돌리면서 가볍게 대답했다.
“정밀 검사는 소령님이 받아야 하는 거 아닙니까? 젊은 나이에 벌써 기억 상실이라니. 외상성 치매라는 게 있거든요.”
“기억 상실 경험자는 너고. 일단 입 다물고 AI 로그 검토해 봐. 보면 알겠지.”
“그러죠.”
윤조는 제 기억에 확신이 있었다.
이번 업그레이드를 통해 전반적인 시스템을 양산 체제에 버금가게 최적화 및 안정화했다. 특히나 AI 위성과의 연결과 통신 블록 강화에 힘써서 혹시 모를 초거대 비행체, 일명 황금 뚱땡이의 재출현에 대비했다. AI 자체도 일부 모듈과 시스템을 오버 홀을 통해 업그레이드를 마친 상태였다. 그 덕분에 동조 한계치가 오자마자 AI가 자체적으로 동조를 차단하여 위험 상황을 막았다. 이미 큰 뇌 부상 경험이 있는 만큼 심 박사가 보완에 특히 심혈을 기울인 부분이었다.
윤조의 정신은 어느 때보다 완전했다. 실제로 AI를 통한 자율 차단 시스템이 잘 작동한 것에 대한 약간의 성취감도 있었다. 심 박사에게 있었던 일을 보고하면 꽤 기뻐할 거라 여기기도 했다. 그래서 조금 전 일에 관한 AI의 로그를 열면서 이걸 빌미 삼아 수혁을 양껏 놀리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라?”
로그 검토의 결과는 의외였다. 뇌 속에 촤르르 펼쳐지는 장면 어느 곳에도 강수혁이 ‘김윤조 키스’라고 말하는 부분을 찾지 못했다. 혹시나 더 전에 들었나 싶어 한창 성기를 비비던 10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AI가 자동으로 모든 발화(發話)를 문자를 제공했다. 검색으로도 같은 표현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이거 이상한데?”
애매한 허공을 보면서 머리를 기울이는 윤조를 보고 수혁의 미간이 한층 더 구겨졌다.
“기록이 있어?”
“잠시만요. 매뉴얼 검토하겠습니다.”
손을 올려 수혁을 가로막고 다시 기록을 찬찬히 검토했다. 검토를 실시간 2배속까지 줄여서 검토하고도 모자라 다시 실시간 속도로 재검토했다. 하산 중에 수혁은 ‘김윤조 키스’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 어라?”
윤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에 수혁의 안색이 심각해졌다.
“찾았어?”
“아, 아니요. 뭔가 착오가 있나 봅니다. 제가 너무 몰입한 나머지 안 들은 말을 들었다고 착각…….”
“아줌마 불러. 야, AI. 긴급 구조 프로토콜 요청. 대한민국 육군 특수작전사령부 소속 소령 강수혁 에스퍼 등록 코드 3750-SSS.”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수혁이 관등성명을 외쳤다. 그러자 놀랍게도 AI가 반응했다.
“긴급 프로토콜 요청 확인, 생체 스캔 중, 능력 활성을 요청합니다.”
AI가 윤조의 입을 통해서 대답했다. 그러는 윤조는 계속해서 당황한 채였다. 시야에 조준점이 뜨면서 강수혁의 활성화 홍채 패턴과 이목구비 굴곡점을 신속하게 훑었다.
“긴급 구조 요청 발송 완료. 수신자 대령 심나연. 계속해서 비행 좌표 전송합니다. 아니, 이게 뭡니까?”
AI 답변이 끝나자마자 윤조가 어이없는 투로 물었다.
“너만 시스템 업그레이드한 게 아니야.”
“아니 이런 프로토콜이 있으면 말을 해야…… 제 인권은요?”
“우리 사이에 그런 게 어디 있냐?”
“이런 건 용납할 수가…… 으헉!”
말을 끝내기도 전에 몸이 까마득한 공중으로 솟구쳤다. 금방 아음속(亞音速)에 이른 수혁은 윤조를 단단히 끌어안은 채로 특정 포인트를 향해 비행했다.
AI는 따지고 보면 윤조의 쌍둥이였다. 그것도 몸을 공유하며 뇌만 분리된 샴쌍둥이. 그런 AI에 제 동의도 말도 없이 이런 명령을 심어 놓다니. 의도는 다분히 이해가 간다.
하지만 미리 설명하면 당연히 동의할 텐데 물론 여러 가지 조건을 붙이겠지만. 동의 절차를 무시당해서 기분이 상했다. 일방적으로 페어링 해제를 명 받았을 때와 엇비슷했다.
자신 몰래 긴급 명령을 심어 놓을 사람은 딱 한 명뿐이다.
강수혁과 가장 친밀한 사람이자 가이드 김윤조를 만든 창조주 심나연 박사.
방금 일어난 청각 오류 사건과 별개로 윤조는 이 사안을 놓고 단단히 따질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