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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34화 (211/256)

134화

에스퍼 중 문제아만 모아 놓은 줄 알았는데 숫제 핵폐기물 덩어리였다. 바지춤을 적시는 미치광이가 함장이라는 것도 놀라운데, 더욱 가관인 건 저 새끼를 앞으로 사령관으로 모셔야 한다는 점이었다.

“…….”

윤조는 할 말을 잊었다. 그러면서 옆에 묵묵히 선 에스퍼를 살폈다.

-감정 수치 급상승. 유의하십시오. 코드 : 혐오 004

AI가 경고하지 않아도 눈치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수혁은 원래부터 주거 환경에 매우 예민한 편이었다. 24시간 들리는 함선 소음에 답답한 선실 생활부터가 이미 최악이었다.

거기다가 다른 나라 함선이 아닌가. 한국 출신 병사에게 최적화된 환경을 자랑하며 밥심 민족임을 다분 존중하여 급식 설비에 심혈을 기울인 제주도함조차도 수혁을 반쯤 핀치로 몰아가기에 충분했다.

“괜찮으십니까?”

계속해서 정신을 못 차리는 미치광이 함장을 노려보는 시선이 심상찮아 물어봤다.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네.”

“그러게요.”

“우리 꼭 여기 있어야 해?”

“그런 것 같습니다만…… 운행 불능이 되면 하선하지 않을까요?”

그러자 수혁의 시선이 사이보그를 향해 움직였다. 아까부터 묵묵부답이었던 로봇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그 앞을 에이버리가 막았다.

“비켜. 저 새끼 머리 따고 배에서 내리게.”

그냥 공격하면 되는데 수혁은 의외로 에이버리에게 경고부터 했다. 찜찜함이 계속 이어졌으나, 일단 윤조는 함교 구조물을 이용한 최적의 타격 루트를 짜서 수혁에게 전달했다. 인근에 있는 함선용 붙박이 의자 하나 뜯어서 놈의 목에 구멍을 내는 방법이었다. 살짝 흔들리던 의자가 바닥 철판을 우그러뜨리며 공중으로 치솟자 에이버리가 침을 꿀꺽 삼켰다.

“안 비켜서 다쳐도 난 모른다.”

“트럼프 함상에서 일어난 일에 관해서는 불문에 부친다. 이 조건을 저쪽에서 먼저 걸었습니다. 그러니까 죽어도 우리 책임 아니에요.”

윤조가 덧붙였는데, 수혁은 공중에 둥둥 뜬 의자를 우그러뜨리면서 에이버리에게 비키라고 손까지 휘휘 내저었다.

‘아, 빡치네.’

분명히 자신도 저 캐나다 군인과 안면이 있었을 거다. 하지만 그때는 불완전한 재생 중에 수혁을 엄호하느라 누군가와 인사할 겨를이 없었다. 제가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자신이 수혁의 가이드가 된 이후에 만난, 생판 남과 이렇게 알은척하는 자체가 불편했다.

“갑자기 왜 기분이 나빠진 거야?”

수혁이 윤조에게 물었다.

“글쎄요.”

윤조는 대꾸하면서 자세를 삐딱하게 틀었다.

“역시 여기 별로지? 얼른 뜨자.”

비비 꼬인 의자가 움직이려는 순간 에이버리가 손을 내저었다.

-잠깐! 대안을 제시해도 됩니까?

“뭔데?”

들을 것도 없는데 또 굳이 묻는다. 기분이 더 나빠졌다. 그러자 수혁이 살짝 움찔했다. 업그레이드된 페어링 덕분에 윤조의 심리 상태가 어느 정도 전해지는 탓이었다.

“됐어. 그냥 우리 방식대로 할게.”

뒤늦게 자신이 좆됐음을 인지한 수혁이 한발 물러섰다.

“파트너 의견 들을 생각도 없이 이미 다 물어봐 놓고 왜 그러십니까. 들어나 보죠.”

-신규 뇌파 발생. 패턴 샘플링 및 분류를 시작합니다.

오랜만에 수혁의 새로운 감정 패턴을 읽어 낸 AI가 불안과 초조라는 라벨을 붙였다.

안절부절못하는 에스퍼의 시선을 무시한 윤조는 에이버리에게 턱짓했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김윤조 준위.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봐서 반갑습니다. 당신의 초기 재생을 담당했던 캐나다 해군 소속입니다. 저는 아군입니다. 공격 의사는 없습니다.

텔레패서라 그런지 뇌를 이어 놓고도 더럽게 눈치 없는 망할 망나니보다는 상황 파악이 빨랐다. 아군이라고 어필하는 눈치가 있었다.

“바쁘니까 용건부터 빨리.”

냉랭한 대답에 에이버리가 당황한 듯 어색하게 웃었다.

아까부터 전두엽 인근에 자잘한 노이즈가 꼈다. 신호를 잡지 못해 지직거리는 구식 TV 화면 같은 감각을 분석한 AI는 그것이 곧 어느 특수 방해 파장으로 인한 교란 현상임을 알았다. 그리고 파장의 근원지로 눈앞에 있는 짜증 나는 외국인을 지목했다. 텔레파시였다.

‘공격 의사가 없기는 개뿔. 해킹 시도하고 있으면서.’

속으로 비웃었다. 아까부터 수혁에게 말을 걸면서 시간을 끌면서 내심 윤조를, 정확하게는 한국형 가이드 시스템의 허점을 노리고 있었다. 트리플 S급 에스퍼의 유일한 약점으로 여겨서 그런 것일 테지만.

이 사실은 수혁에게 알리지 않았다. 괜히 알려서 본인의 실수를 갈음할 기회를 주고 싶지 않았다. 대단히 치사하고 유지한 대응이지만 뭐 어쩌겠는가. 구청에 신고도 한 합법 배우자 주제에 자신을 어색하게 세워 놓고 타인과 대화를 우선한 상대가 나쁜 거다.

“김윤조, 일단 여기서 나가자. 여기 더 있다가는 병균 옮아.”

불안과 초조가 극에 달한 에스퍼가 일단 가이드를 들고 튀려고 들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들어왔던 스크린 구멍을 이용하여 다시 나가려는 두 사람에게 에이버리가 외쳤다. 고개를 돌리자 우렁찬 랩이 이어졌다.

-캐나다 함대가 모시겠습니다. 함장용 선실 및 인근 선실 다 비우고 방음 충전재 시공까지! 모조리 다 가능합니다! 더불어 저희는 이미 김윤조 준위를 응급 재생시킨 탁월한 인큐베이터 설비를 바탕으로, 섬세한 의무 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성공적인 외인부대 생활, 저희 캐나다와 함께하시죠!

무슨 학부모 간담회에 나온 대학 교무 직원 같았다. 간절하기 짝이 없는 시선은 꼭 VIP급 고객 유치를 위해 내던져진 말단 영업 사원 같기도 했다.

“팸플릿은 없습니까?”

-텍스트 자료가 필요하다면 당장 전송 가능합니다!

어이가 없어서 던진 농담에 에이버리가 손목에 달린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러더니 정말로 캐나다 외인부대 홍보물이 인근에 있는 작은 데스크 스크린에 떴다.

-웰컴 투 캐나다!

온갖 멋을 부린 표지에서 시작하는 시각 자료가 한 장씩 넘어갔다.

‘이게 뭐람?’

멍하게 보는 사이 구멍 바깥쪽에 뭐가 나타났다. 의자로 만든 임시 단창이 곧장 미확인 비행 물체를 향해 날아갔다. 파열음과 훅 떨어지자 냉큼 다른 놈이 다시 날아들었다. 다름 아닌 드론이었다. 공격용은 아니었다.

-공격을 멈추십시오. 저희는 호주 해군입니다. 교전 의사가 없습니다. 공격을 멈추십시오.

“호주?”

“쟤네들은 또 왜 왔대?”

“글쎄요.”

수혁이 물었으나 윤조도 딱히 답을 찾지 못했다.

-미확인 항공기 접근 중.

AI의 경고와 함께 윤조의 헬맷 스크린에 붉은 마크가 떴다. 속도와 크기로 보건대 분명히 중국의 정찰기였다. 하긴, 여기가 하와이 인근이긴 하나 엄밀히 말해 미 해역이 아닌 공해상이었다.

-신호 수신 중. 중국 해군입니다. 채널을 여시겠습니까.

“일단 보류. 중국 애들까지 나타났는데요. 조만간 러시아 애들도 오겠습니다.”

윤조가 수혁에게 알렸다.

-캐나다를 선택해 주십시오.

에이버리가 쉬지도 않고 외쳤다.

“미친놈들이 왜 이러는 건데?”

“글쎄요.”

이유를 설명할 사람은 아무래도 열정적인 영업 사원뿐이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받은 에이버리는 비즈니스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체결한 다(多)자국 군사 합의에 따르면 합의 참여국은 각국 엘리트 에스퍼를 갹출, 부대를 창설하여 공해상 출현 게이트에 한해 공동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또 협의의 핵심인 강수혁 소령님께서 트럼프 함대에 대한 거부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렇기에 다른 나라가 호스트가 되어야 하는데요. 트리플 S급 통제를 전혀 보장할 수 없다는 한국 측 주장에 따라 강수혁 소령이 가는 곳이 호스트국입니다. 일단 초대 호스트 부대는 미 해군 트럼프 함대가 맡았으나, 방금 운행 불능에 빠졌습니다.

에이버리의 설명에 수혁이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어디로 갈지는 내 마음이다?”

-원칙적으로 그렇습니다.

-호주, 호주로 오십시오. 아름다운 오페라 하우스와 항구 전경이 내려다보이는 최고급 스위트룸과 사랑스러운 캥거루가 자연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일전에 수혁이 시드니 호텔에서 놀고 싶어 했던 건 어떻게 알았는지, 호주가 스위트룸을 어필하고 나섰다.

-산호섬과 코알라, 그리고 붉은 사막이 기다리는 대자연! 그것이 바로 호주입니다!

-무슨! 오로라도 없는 주제에! 귀여운 하프물범과 하얀 새끼 북극곰이 저희 캐나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캐내디언 로키와 로키가 품은 에메랄드 호수를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이게 군대인지, 혹은 여행 상품 파는 쇼호스트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기어이 채널을 뚫은 중국 놈들마저 뭐라고 떠들어 댔다. 솔직히 다 귀찮아서 귀국하고 싶었다. 하지만 합의에 따른 해외 파병 기간은 만 2년이었다. 무시하고 돌아가도 되지만, 그렇게 되면 망할 놈의 국감이니 뭐니 또 시달릴 게 뻔했다.

“어디로 갈까?”

더불어 수혁은 해외여행에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모처럼 신난 개망나니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진 않았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지 않습니까.”

“역시…… 하와이?”

“아무래도 거기가 신혼여행의 성지니까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수혁은 오열하기 직전인 에이브리를 무시하고 윤조와 함께 날아올랐다. 초파리처럼 귀찮게 윙윙대는 호주 드론을 잡아 저 멀리 상공을 선회하며 질척이는 중국 정찰기를 격추시켰다.

펑!

정찰기의 대형 배터리가 터지면서 화려한 불꽃이 태평양 하늘을 수놓았다.

“하와이가 어느 쪽이지?”

“저쪽입니다.”

윤조가 좌표를 전달했다.

“풍경 구경하면서 느긋하게 갈까?”

수혁의 제안에 윤조가 동의했다.

고도가 낮아지면서 맑은 태평양 바다가 발에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그러자 바닷속을 헤엄치는 대형 어류 떼가 보였다. 인근에는 아까부터 각종 소동에 놀란 돌고래 무리가 흥분한 채로 물살을 갈랐다.

-저희 캐……애나……다아아…… 지직.

텔레파시 범위를 벗어났다. 아주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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