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장 봐서 하루 세끼 다 차려 먹고 이래저래 망가진 집을 수리하고 부서진 침대도 새로 들였다. 딱히 인사도 안 하고 복귀했는데 장선욱으로부터 별다른 연락이 없었기에 남는 시간에는 쇼핑도 하고 가까운 명소를 찾기도 하면서 여유롭게 놀았다. 그러는 내내 두 사람의 팔에는 백금 다이아 팔찌가 화사하게 빛났다.
특히 수혁은 쇼핑을 아주 좋아했다. 툭하면 백화점에 가자고 했다. 이런저런 소동이 있어서 윤조는 가기가 꺼져지는데 저 트리플 S급 낯짝을 가진 에스퍼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두 사람이 백화점 인근에 도착했을 때는 백화점 전면부 전체를 덮는 거대한 광고가 막 설치되는 시점이었다. 밤에 바꾸는 것도 아니고 대낮에 바꾸는 걸 보니 어지간히 급한 일인가 보다 싶어서 시선을 던지는 순간, 윤조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초대형 광고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강수혁이었다. 그것도 윤조가 골라 준 니트와 바지 차림이었다.
“착용 샷이 저겁니까?”
“그런 것 같은데.”
현수막 속에서 수혁은 45도 각도로 서서 남색 슬랙스 주머니에 손을 살짝 찔러 넣은 모습이었다. 약간 걷어 올린 니트 소매 사이로 전완근에 이어 뼈가 두드러진 남성적인 팔목에 다이아 팔찌가 무심한 듯 툭 걸려 있었다. 머리는 그날 대충 말리고 만진 그대로였는데, 마스크가 워낙 독보적이라 오히려 화보를 위해 세심하게 가닥가닥 연출한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는 외상 뜯으러 간 현장에서 즉석에서 찍은 사진일 텐데 배경을 흐리게 처리하여 흑백 버전으로 바꾸자 퀄리티 높은 화보 샷으로 변모했다.
새로 걸린 건물 외벽 전면 광고를 보는 사람은 단지 두 사람만은 아니었다. 어느새 주변에 모인 행인들이 저마다 단말기를 높이 들고 광고를 찍어 댔다. 더불어 가까이 있는 사람은 수혁과 윤조를 알아보고 달려들었다.
“강수혁이다!”
“와, 잘생겼다.”
“어디? 강수혁이라고?”
금방 소동으로 번졌다. 윤조가 나서려는 찰나, 다가오던 사람들이 갑자기 1미터 정도 쭉 밀려났다. 다행이게도 다친 사람은 없었다.
“이게 뭐야? 안 보이는 벽이 있어. 신기하다.”
“강수혁 능력인가 봐.”
사람들은 겁도 없이 신기해서 투명한 벽에 손을 댔다.
“일반인, 그것도 민간인 상대로 능력 쓰지 마십시오. 위법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네 에스퍼한테 손대는 거 싫다며.”
“그건 그렇지만.”
“다치게 한 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가. 나도 내 가이드에게 남이 손대는 거 싫거든. 거기다가 너무 시끄러워서 네 심장 소리가 제대로 안 들려. 헤드셋은 깜빡했고.”
꽤 로맨틱한 불평이어서 더는 따지지 않기로 했다. 들어가자 바깥 소동을 눈치챈 백화점 직원이 달려왔다. 보안 요원도 겸하는 직원은 어떤 매장을 찾는 건지 묻고 무전으로 연락하며 동선을 확보했다. VIP 대접이라 기분이 묘했다.
개인적으로 쇼핑하러 온 거라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다는 사양에 안전 확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에스퍼를 대동한 책임이 있기에 안내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목적한 매장은 사진과 팔찌를 교환한 그 매장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웨이팅 번호를 무시하고 바로 입장했다.
“반갑습니다, 강수혁 고객님.”
반갑게 인사하는 얼굴이 있었다. 맞춤 근무복을 입은 다른 직원과 달리 화사한 투피스를 아주 멋지게 차려입은 여성이었다. 아마도 매장 매니저나 혹은 그 윗급 같았다.
밖에 걸린 광고 봤냐면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에스퍼를 브랜드 모델로 모실 수 있어서 대단히 기쁘게 생각한다는 미사여구가 따라왔다. 그러면서 유럽 본사에서 글로벌 앰배서더로 모시고 싶다는 연락을 받았다며 그렇지 않아도 개인적으로 연락을 드리려던 참이었다고 했다.
“저희 소속사가…… 아니라 특작부 측으로 연락하시기 바랍니다.”
윤조가 옆에서 딱 자르자 매니저는 특유의 상냥한 듯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글로벌 앰배서더 하면 뭐 줍니까?”
즉석 사진 한 방에 이억 오천인데 글로벌 어쩌고 하면 뭔가 대단한 게 있지 않을까. 괜히 궁금해서 슬쩍 물어봤다. 그러자 매니저가 다시 활짝 웃으면서 자세한 조건에 관해서는 본사 측에게 문의해 봐야 하지만, 지금까지의 선례를 볼 때 클래식 제품 일체 제공과 함께 시즌마다 다양한 신제품 제공은 무조건 있을 거라고 장담했다.
윤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전시된 제품을 쭉 봤다. 역시나 단위가 굉장했다. 약간 흥미가 생기려 들었다.
“이런 걸 시즌마다 받으면 평생 놀고먹어도 되겠는데.”
“그럼요.”
눈치가 빠른 매니저가 씩 웃었다. 다른 앰배서더에게 제공된 제품이 이거라면서 다이아몬드 세트를 내놓았다. 척 보기에도 지방 아파트 한 채 값으로 보였다.
“본사에서는 가이드이신 고객님에 대해서도 대단히 관심이 많습니다.”
매니저가 떡밥을 던졌다.
“저요? 저를 왜요?”
“강수혁 님의 파트너로서 대단히 유명하시니까요. 단정하면서도 강한 이미지를 가지고 계셔서, 저희 브랜드 남성용 제품과 잘 어울린다고 봅니다.”
“그렇습니까.”
대놓고 칭찬을 들으니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제 연락처 드릴까요?”
“뭐…… 예.”
매니저가 명함과 함께 기념품으로 은제 목걸이 제품도 챙겨 줬다. 직접 해도 좋고 주변에 선물해도 좋단다. 일단 은이라도 고가이니 거절치 않고 받았다.
정작 강수혁 본인은 글로벌 앰배서더고 뭐고 전혀 관심이 없었다. 부 매니저인 다른 직원과 함께 매장을 돌아다니며 쇼케이스만 들여다보다가 하나를 찍었다. 거대한 알이 번쩍이는 반지였다.
“이거.”
“안 됩니다.”
등 뒤에서 보던 윤조가 잘랐다.
“왜? 좋잖아.”
“어쨌든 무조건 안 됩니다. 차라리 심 박사님 선물이나 하나 하시죠?”
“아줌마 걸 왜?”
수혁이 징그럽다는 듯이 인상을 썼다.
“페어링 영원히 안 할 겁니까.”
“아. 맞다.”
흥미가 뚝 떨어진 수혁을 대신하여 윤조가 매니저와 상의해 고가의 다이아몬드 세트 일체를 구비했다. 물론 결제는 수혁의 돈으로 했다.
매니저와 직원 전체의 깍듯한 배웅 인사를 받으며 나와 이번에는 인근의 다른 명품 매장으로 향했다. VIP 등장을 익히 인지하고 있던 직원이 즉시 나와 응대했다.
“여긴 왜?”
“박사님 드리는 김에 최 대령님께도 선물도 하죠. 사모님 드린다고 해도 액세서리보다는 가방이 좋을 것 같습니다.”
“뭘 최저씨까지 챙겨.”
“평소 저지른 짓을 생각하십시오.”
양심도 없이 툴툴거리는 수혁을 한쪽으로 밀쳐 놓은 윤조는 직원과 상의하여 가방을 고르고 남성용 벨트와 지갑 세트도 구매했다.
명품 로고가 찍힌 종이가방은 당연히 수혁에게 떠넘겼는데 수혁은 그걸 제 손으로 들 생각이 없었다. 마법에 걸린 듯 둥둥 떠다니는 신기한 종이가방의 행렬은 백화점 쇼핑객들을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위이잉.
단말이 울리기에 봤더니 비서 장교였다.
“준위 김윤조.”
-김 준위, 지금 백화점이에요?
“네, 그렇습니다.”
-아하. 거참 하하하.
“왜 그러십니까?”
-뭐 별일은 아닌데. 앞으로 외부로 움직일 때는 SNS 확인도 하고 그래요. 보는 눈이 많으니 사소한 사고도 조심하고.
“예?”
-그리고 광고 건 말인데 의외로 중장님은 괜찮다고 하십니다. 어차피 전투 장면 누출 다 되었는데 이참에 이미지나 잘 챙겨 보라고 하시네. 그럼 만사 조심하고. 끊습니다.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를 보고 윤조는 잠시 멈칫했다. 다른 매장으로 가던 발길을 멈추고 그 자리에 서서 국내 최대 포털 사이트에 접속했다.
로고 페이지를 스크롤 해서 올리자 최신 인기 게시물이 주르륵 이어졌다.
[동영상] 강수혁 쇼핑 현장
[포토] 강수혁, 가이드와 단둘이 쇼핑 중
[포토] 사상 최강의 에스퍼가 유명명품매장에?
[실시간] 백화점에 다시 등장한 강수혁
제목부터 난리였다. 제일 위에 뜬 동영상 뉴스를 클릭하자 그저께 영상이 떴다. 짧은 뉴스라 댓글 상단이 자연스럽게 노출되었다.
-강수혁 인생에 있어 단 하나의 오점이 되고 싶다.
그 아래로 내 남친 사진은 허락받고 올리라느니, 내 남자라느니, 우리 결혼 날짜가 언제라느니, 여보 왜 혼자 갔어? 등등 평범한 주접이 이어졌다. 팬심을 담은 농담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기분이 나빴다.
“왜 그래? 뭔데?”
“아닙니다.”
단말기를 집어넣은 후 잠시 생각한 윤조는 수혁의 팔을 확인했다. 소매에 팔찌가 가려졌다.
“소매가 늘어지는데요. 걷으시죠.”
“소매? 갑자기?”
“일단 걷어 보세요. 이렇게.”
윤조는 제 팔뚝이 보이도록 소매를 당겨 보였다. 손목에 걸린 팔찌가 화려한 빛을 뿜었다. 수혁은 시키는 대로 팔뚝을 걷었다.
“왜들 이렇게 팔뚝을 좋아하는지 모르겠어. 사진 찍을 때도 팔뚝 보이게 하라고 하던데.”
“근육 잘 붙은 팔뚝을 사람들이 좋아하니까요.”
“그런가? 그럼 넌 가려.”
수혁이 윤조의 소매를 쓱쓱 내렸다.
“왜요?”
“내 거를 남들이 보는 게 싫어.”
귀여운 불평이라 무시하기 어려웠다. 커플 팔찌 노출 작전을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방향을 틀었다. 드러난 에스퍼의 손목을 손으로 슬쩍 잡았다.
“밖에선 손 안 잡는다며.”
“여긴 밖이 아닙니다. 백화점 실내입니다.”
다른 방향을 보면서 시치미를 뚝 뗐다. 수혁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귀여운 짓만 골라서 하지, 이 깜찍한 새끼.”
가벼운 타박과 함께 수혁은 윤조의 손을 맞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