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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28화 (205/256)

128화

13. 비가 갠 후

저 망할 에스퍼를 타고 당장 백화점으로 날아가서 바닥에 머리를 박고 사과하려고 마음먹은 찰나 단말기에 수신 신호가 떴다. 비서 장교였다. 타이밍이 불길했다.

“네. 준위 김윤조.”

-김 준위, 거기 강 소령도 함께 있습니까.

“네.”

-백화점에서 이상한 연락이 왔는데. 강 소령한테 확인 좀 부탁합니다.

역시나. 망했다. 새는 바가지가 기어이 범죄를 저지르다니. 조용히 수습할 수 있을까. 윤조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말해. 뭐?”

스피커를 켜지도 않았는데 들렸는지 수혁이 대뜸 대답했다.

-백화점 마케팅 팀장이라는 사람이 연락해서 강 소령과 광고 홍보 계약을 했다는데 맞습니까? 공식 계약서 보내겠다는데.

“어. 맞아. 사진 찍었어.”

-아, 그렇군요. 아. 이런 건 또 새롭네. 혹시 계약 무효는 가능합니까?

“팔찌 이미 꼈어. 안 돼.”

-팔찌는 뭔지 모르겠고 일단 안 된다니. 하아. 어차피 국회 방송에도 나갔는데 뭐 어떻게든 되겠지……. 어쨌거나 알았어요. 중장님께 보고드리죠. 사진은 저희 쪽에서 알아서 할 테니 직접 찍어 보내는 일은 없도록 하세요. 보안 사항입니다. 그리고 김 준위. 백화점에서 호텔로 뭐 보낸다는데? 물건 두고 간 게 있다나? 그런 사실 있어요?

완전히 까먹고 있었다.

“넵. 어제 쇼핑한 물건 두고 온 게 있습니다.”

-하하하하. 참나 특작부에 있으니까 별일이 다 있어요. 중령이 준위 쇼핑 심부름도 하고. 하하하하. 알았어요. 본부로 보낼 테니까 찾아가요.

비서 장교는 혼이 살짝 빠진 듯 웃었다. 윤조는 단말기를 향해서 냅다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없도록 시정하겠습니다.”

고개를 들기 전에 통화가 끊겼다.

꼬르르륵.

환장할 상황에 환장할 에스퍼 새끼의 배가 요란하게 울었다.

“장 보러 안 가?”

화를 내어 무엇하리.

윤조는 한숨을 푹 쉬며 일어났다.

“지금 갑니다. 차량이 고장 났으니 걸어가거나 날아가야 하는데. 어느 쪽이 편하십니까.”

“비행.”

대답과 함께 윤조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알아서 열리는 현관문을 빠져나가자마자 윤조의 허리에 굵은 팔이 감겼다.

“가자.”

강수혁은 커다란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올랐다. 이제 완전히 적응한 윤조는 편안하게 비행을 즐겼다. 정점에 올랐던 고도가 금방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마트 주차장이 순식간에 훅 다가왔다.

마트에 들어서자 직원들이 분주해졌다. 편안한 모습은 사라지고 모두 정위치를 정확하게 찾아갔다. 날강도 대응 시스템이었다.

수혁이 마트를 쭉 돌아보자마자 어디선가 물건이 줄줄 날아왔다. 그러자 각 코너를 담당하는 직원들이 빠르게 품목과 숫자를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 다른 쇼핑객은 민방위 훈련 중처럼 그저 서서 이 상황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

“쇼핑 카트를 끌면서 평범하게 물건 고르는 걸 기대 했는데요.”

“그래? 그럼 도로 갖다 둘까?”

“됐습니다. 배가 고프니 빨리 계산하고 가죠.”

대신에 윤조는 가까운 곳에 있는 계산원에게 다가갔다. 멀뚱히 선 수혁에게 눈짓했다.

“물건 이쪽으로요.”

물건이 차곡차곡 계산대에 쌓였다. 날강도에 익숙한지 왜 이러냐는 식으로 눈을 깜빡이는 중년 여성에게 윤조는 멋쩍은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저희, 계산 부탁드립니다.”

“어머.”

깜짝 놀란 계산원이 눈을 거듭 깜빡이다가 갑자기 높은 탄성을 터트렸다.

“세상에! 살다 보니 이런 일도 다 있네! 이 대리님! 김 부장님! 여기 와 봐요. 강 소령님이 물건 계산한대!”

순식간에 난리가 났다. 마트 직원이 다 우르르 달려와 계산대를 둘러싸고 구경했다. 부끄러워서 당장 어디에든 숨고 싶었다. 심지어 카트를 끌고 온 손님들도 훌쩍 큰 수혁과 윤조를 보면서 수군댔다. 둘이 같이 산다는 둥, 그저께 1단지가 난리였다는 둥. 루머도 아니고 엄연히 있었던 사실을 속삭일 뿐인데도 듣는 입장에서는 너무 창피했다.

계산을 마치자마자 그대로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왔다. 비닐 봉투에 넣지도 않은 물건이 둥둥 따라왔다.

마트에 올 때와 같은 방법으로 돌아오자마자 윤조가 김치찌개를 끓이려고 주방에 들어설 때였다. 수혁이 윤조를 쓱 밀어냈다.

“지금은 내가 할게. 이따가 너는 저녁해. 그게 빨라.”

“그럼 밥은 제가 하겠습니다.”

쌀을 찾아 씻어서 밥을 안치는 사이, 수혁의 손길에 맞춰 주방 기구가 우르르 떠올랐다.

주방의 지휘자가 부리는 마법은 언제 봐도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저절로 썰린 고기가 참기름과 함께 곰솥에 다이빙하더니 금세 맛있게 익어 가기 시작했다. 프라이팬과 뒤집개가 알아서 계란말이를 만들고 대파와 두부, 팽이버섯이 줄을 맞춰 곰솥 된장찌개 속으로 낙하했다.

“그런데 먹기로 한 건 김치찌개 아닙니까?”

“요즘엔 된장찌개가 끌리더라고.”

일부러 된장찌개를 끓였으면서 수혁은 괜히 딴소리했다.

‘뭐지? 좀 귀여운데.’

싱글벙글 웃는 모습에 윤조는 가만히 그의 곁에 비켜섰다. 눈과 코는 먹음직스러운 된장찌개를 향하는 반면에 손은 엉뚱한 방향으로 뻗었다. 손바닥 가득 엉덩이가 들어왔다. 트리플 S급다운 굴곡과 탄탄함에 저절로 입맛이 돌았다.

“맛있겠네요.”

“김윤조, 밥 먹기 전부터 땀 뺄 거야?”

“어쩔까요? 밥 먹고 할까요? 저는 한 30분 정도 더 참을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 또라이.”

에스퍼의 팔이 허리를 확 휘어잡았다. 끌어올리는 힘에 발꿈치가 뜨는 동시에 입술이 맞붙었다. 입이 벌어지고 혀가 얽히는 사이 중력이 사라졌다. 상대의 체중이 제 위로 올라왔을 때는 이미 소파에 포개진 상태였다.

허겁지겁 바지와 속옷을 벗어 던지고 상대의 티셔츠를 끌어 올렸다. 어디선가 날아온 튜브 뚜껑이 휘리릭 날아서 바닥에 떨어졌다. 동시에 벌어진 다리 사이로 축축한 손길이 들어왔다. 굵은 손가락이 내부를 휘젓는가 싶더니 금방 빠져나가고 이내 거대한 기둥이 툭 닿았다.

“하……으.”

윤조의 손이 수혁의 날개뼈를 긁었다. 두꺼운 선단은 입구의 생리적 저항을 가볍게 눌러 버렸다. 깊은 곳까지 한순간에 들어온 수혁은 뜨거운 숨을 윤조의 귓가에 불어넣었다.

다급한 결합이라 요란한 움직임으로 이어질 줄 알았다. 하지만 수혁은 예상을 뒤엎고 간지러울 만큼 부드럽게 움직였다. 벅찬 부피를 찬찬히 소화하는 사이, 젤로 젖은 손이 윤조의 음경에 감겼다.

“허윽.”

앞과 뒤에 동시에 가해지는 자극에 윤조의 내부가 요동쳤다. 직후 수혁의 숨결이 한층 거칠어졌다.

밀려 나갔던 몸이 다시 깊숙이 들어올 때마다 윤조의 목구멍이 열리면서 옅은 신음성이 샜다. 다리로 두꺼운 허리를 단단히 감았고 팔로 새로이 재생한 등을 더듬었다.

“기분 어때?”

“하으…… 조…… 좋습니다. 거기…… 아!”

에스퍼의 탄탄한 엉덩이가 야하게 움직이며 약점을 눌렀다. 흰 엉덩이에 보조개가 움푹 파였다.

“마음에 드나 보네, 여기. 엄청 조여.”

“그렇게 누, 누르, 지 마십…… 앗! 으……으음.”

제멋대로 대마왕답게 누르지 말라는 부위를 일부러 더 눌러 댔다. 그럴 때마다 깊은 곳에서부터 전율이 번졌다.

열기가 후끈 달아올랐고 자연스레 땀이 났다. 젖은 살이 턱턱 부딪히면서 야한 소리가 거실을 가득 채웠다.

식사 전이고 재생으로 인해 체력이 소모된 상태기에 한 번이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순전히 윤조의 착각이었다. 세계 모든 국가에서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귀중한 유전자 덩어리를 임신 능력도 없는 인조인간의 내장에 이미 한 차례 낭비한 후에도 수혁은 곧장 다시 세웠다. 숨을 돌릴 것도 없이 바로 세운 그는 곧장 2차전에 돌입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밥부터 먹을걸.’

뒤늦은 후회가 들었지만 어쩌겠는가. 쌩쌩하신 트리플 S급께서 저를 뼈째로 싹싹 발라먹은 후에 재조립만 잘해 주시길 바랄 뿐이었다.

세 번을 뛰고 샤워 핑계로 욕실에서 선 채로 다시 당한 후에 완전 녹초가 되어서야 풀려났다. 당장 오늘내일 하는 노인처럼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간신히 식탁에 앉았다. 허리가 뻐근하고 엉덩이가 욱신거려 오만상을 쓰는 윤조와 달리 망할 에스퍼 놈의 낯짝은 개기름으로 반질반질했다. 무슨 흡혈 마공이라도 닦은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천천히 먹어.”

수혁이 커다란 국수 대접에 고기와 채소, 두부를 산처럼 쌓은 된장찌개를 윤조 앞에 대령했다. 역시나 맛은 훌륭했다. 뒤이어 갓 지은 밥이 또 다른 대접에 가득 쌓여 식탁으로 날아왔다.

“맛이 어때?”

“괜찮네요.”

“많이 먹어. 모자라면 더 하면 되니까.”

그에 윤조는 곰솥을 흘끔 봤다. 저걸 다 먹고 더 하겠다고? 사람인가 싶지만, 뭐 강수혁이니 다 먹겠지.

역시나 예상대로 강수혁은 곰솥과 10인용 밥솥을 깔끔히 비웠다. 물론 윤조도 먹을 만큼 먹고 부른 배를 두드렸다. 설거지는 역시나 트리플 S급 마법으로 해결했다.

잠을 제대로 못잔 상태에서 땀 빼고 씻고 밥을 먹고 났더니 잠이 솔솔 쏟아졌다. 윤조는 엉금엉금 기듯이 소파에 다가가 벌러덩 누웠다. 수혁이 곁을 기어이 비집고 들어왔다.

“좁아요.”

불평하자 수혁은 윤조를 덜렁 들더니 소파를 독차지했다. 치사하다고 욕하려는 찰나, 윤조는 거대한 몸뚱이 위에 안착했다.

“이러면 되지?”

“좀 낫네요.”

뜨끈한 에스퍼를 침대 삼아 엎드린 윤조는 그의 두툼한 어깨에 고개를 묻고 눈을 감았다. 긴장이 풀리면서 금방 잠들어 버렸다.

“김윤조?”

부름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수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윤조를 확인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걸 보고 헛웃음을 지었다.

“뭔 애도 아니고 벌써 자.”

수혁은 손으로 기절한 제 짝의 뒤통수를 살살 쓰다듬었다. 그러곤 다시 고개를 들어 정수리에 뽀뽀했다. 그러곤 눈뜨고 있을 때는 차마 꺼내지 못한 인사를 전했다.

“죽지 않아도 인간일 수 있게 해 줘서 고마워. 김윤조.”

그러곤 자신도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오랜만에 숙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가 오랜만에 조용한 휴식기를 보내는 주택 위 까마득한 상공을 맴도는 위성에 속 AI가 가이드에게서 발산되는 새로운 뇌파를 수집하여 기록했다. 그것을 미리 입력된 수많은 뇌파 대조군과 비교한 후 대분류 ‘만족’, 보조 키워드로 ‘행복’을 분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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