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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26화 (203/256)

126화

한번 터진 오열은 쉽게 멈추지 않았다.

게이트가 터진 직후에는 현실을 부정하느라 울지 않았다. 사태 수습 중에 피해자 신원 파악과 기적적인 생존자 구조에 합류하여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다. 그때는 울 틈도 없었다. 최종적으로 저를 제외한 모든 가족이 ‘실종자’ 명단에 오르기까지. 그리고 유가족 단체에 물 흐르듯 들어가 각종 정부 교섭 활동과 격한 항의와 시위를 반복하면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아가던 중에, 사고 현장 출입은 군 관계자와 군 협력 업체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충동적으로 자원입대했다. 그 이후로는 울 시간이 없었다.

장장 8년분이었다. 가이드 프로젝트와 기연(奇緣)과도 같은 오버로드 덕에 강화된 안구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많은 눈물이 흘렀다. 온몸의 수분이 모조리 눈물샘으로 몰리고 있었다.

“미안해.”

사과를 반복했다. 이미 한참 늦었다. 냉엄한 사람은 이제 사과해 봐야 자기만족일 뿐이라고 하겠지만 남겨진 슬픔은 결국 저만의 몫이 아닌가.

죽은 사람은 말이 없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채 사라졌다. 창백한 푸른 별을 삼킬 듯이 거대한 촉수를 향해 저항하는 미약한 불꽃을 위한 장작이 되었다. 의미 없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자기만족에 어설픈 위선일 뿐이라도. 그렇게 여기지 않으면 원망과 증오가 피어오를 것 같았다.

원망하지? 죽이고 싶지?

아니라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럴 수만 있다면 당장 죽이고 싶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면 같이 죽지 왜 너만 살아 있냐고 혹은 같이 죽이지 왜 나만 살아 있냐고.

그러지 못한 건 단지 끔찍하게 자학하는 모습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자신을 공격할 의사가 없는 것처럼, 자신도 그를 공격할 의사가 없다. 그냥 그럴 수 없다. 그러기엔 너무 그를 너무 많이 보고 만지고 안았다.

해외가 처음이라면서 싸구려 마트 선글라스를 끼고 즐거워하던 모습, 부직포 앞치마를 매고 아이처럼 좋아하던 모습, 양말을 가져다주며 안절부절못하던 모습, 산처럼 쌓은 된장찌개와 파스타를 내밀면서 뿌듯해하던 모습.

누구보다 빠르게 게이트를 향해 돌진하던 용맹한 모습, 다른 가이드에 의해 마비되었으면서도 저를 보고 내심 반가워하던 모습.

기분 좋다가도 별안간 삐지고 금세 다시 싱글벙글한 모습, 아무도 못말리는 막무가내면서 저 앞에서는 눈치 보며 쩔쩔매는 모습.

기억을 잃은 사실을 알고 누구보다 절망하던 모습, 평생 처음 좋아한 녀석이 이상해서 힘들어하는 모습.

뜨거운 열기 속에서 저만을 바라보며 행복해하는 모습.

그런 중에도 죄책감에 휩싸여 차라리 죽기를 바라는 처참한 모습.

무엇하나 마음이 쓰이지 않는 것이 없었다.

가이드는 에스퍼를 향한 애정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페어링을 전제로 한다. 강수혁과의 페어링 해제는 진즉에 완료되었다. 그런데도 계속 마음이 쓰인다는 건 단순히 가이드로서가 아니란 뜻이었다.

내가 너의 뭐가 되었으면 좋겠어?

쉬운 답은 애인이었다. 하지만 애인은 언젠가 헤어질 수도 있는 사이가 아닌가? 가이드? 그건 일방적인 선언으로도 쉽게 무위로 돌아갔다. 시간을 두면서 수습할 수 있을 거란 상상을 하며 헬기에서 내리자마자 해제 명령서가 도착하는, 아주 허무한 사이다.

쉽게 버림받을 수 있음을 깨달은 후엔 그보다 더 강력한 수단을 원했다. 변덕스러운 에스퍼가 다시 끝을 선언하더라도 질척질척하게나마 매달릴 수 있는, 적어도 그럴 권리를 보장하며 명령서 하나만으로 쉽게 번복할 수 없는 관계. 가이드의 사고 범위 내에서 그런 관계는 하나뿐이었다.

얼렁뚱땅 뱉은 말이지만, 실제로 뱉고 나서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무엇보다 바라던 것이라고.

얄미운 형처럼 사소한 툭탁거리를 만들고, 다정한 엄마처럼 뜨거운 된장찌개를 끓이고, 무뚝뚝한 아빠처럼 불쑥 찾아와 잊은 물건을 내민다. 강수혁은 외로운 줄도 모른 채로 지난 8년 동안 한 번도 누려 보지 못한 것을 제멋대로 선사했다.

가족이란 두 번 다시 없다고 생각한 고아에게 또 다른 고아는 가족이 되었다.

한 번의 상실도 죽고 싶을 만큼 괴롭고 버거웠다. 두 번은 절대로 견딜 수 없다. 그렇게 그리운 가족이 누구 손에 증발했는지 알고서도 도무지 그를 미워하고 원망할 수가 없었다. 저만큼이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불쌍한 남자를 냉정히 외면할 자신이 도저히 들지 않는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해.”

거듭 되뇌는 사과는 홀로 살아남았다는 죄책감 때문만은 아니었다. 증오는 못 할지언정 가까이에 두지도 말아야 할 상대를 가슴 속 깊이 원하는 제 비겁한 이기심에 대한 알량한 추임새였다.

이대로 녹아서 없어질 수 있다면 차라리 후련하겠건만. 차라리 스스로 이 비겁한 속내가 덕지덕지 묻은 더러운 심장과 이기심으로 똘똘 뭉친 뇌를 끄집어내어 세상 모두가 보도록 내다 걸고 손가락질을 받을 수라도 있다면 죄책감이 덜해지련만.

생을 마감할 권리는 박탈당한 채 몸부림치고 있는 에스퍼처럼 그와 피를 나눈 자신 또한 스스로 끝맺을 권리를 스스로 버렸다.

높은 확률로 전투에서 죽든, 혹은 지극히 낮은 확률로 자연사하든. 운명이 날짜를 정해 줄 때까지 살아갈 수밖에 없다. 무지한 채 내린 결정과 모든 것을 알고서도 내린 결단의 죄업을 어깨에 메고서.

그런 윤조의 곁에는 언제나 강수혁이 있을 거다.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하지도 못하는, 누구보다 강하고 누구보다도 믿음직스러운 에스퍼가.

새벽녘이 깊어서야 울음이 잦아들었다. 잠보다는 기력 소진으로 인한 의식 상실이라고 보는 편이 나은 짧은 수면 후에 윤조는 녹초가 된 몸을 일으켰다.

냉수와 온수를 번갈아 가며 오래오래 씻었다. 남은 눈물 자국을 다 씻어 내고 조금은 가벼운 몸이 되어 욕실을 나왔다.

사실은 한 열흘쯤은 집에 틀어박혀서 해묵은 감정을 정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새로 생긴 가족이 외로움과 두려움에 썩어 가고 있을 것이 걱정이었다.

‘생긴 것과 달리 섬세하니까.’

일찍 생생한 모습으로 보자고 했으나 그걸 곧이곧대로 믿고 잘 자고 있으면 강수혁이 아니다. 어제 2층으로 가면서도 집 나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덧붙일 만큼 걱정이 많았다. 제 말을 믿지 못하는 데 대한 서운함보다는 혼자 남을까 봐서 두려워하는 점이 더 안타까웠다.

잠도 덜 자고 서두른다고 서둘렀다. 하지만 본부에서 빌린 지프를 몰고 주택 인근 이면 도로에 들어서자마자 우당탕탕 달려오는 에스퍼를 보며 더 서두르지 못한 걸 후회했다.

주택 앞에 주차하기도 전에 바람같이 날아온 에스퍼가 철제 보닛을 턱 짚었다. 덩달아 급정거한 지프는 앞쪽이 주저앉았다. 민수용 차라면 에어백이 거창하게 터졌겠으나, 애석하게도 군용 지프에 그런 사치스러운 장치는 없었다. 대신에 조종사용과 같은 안전띠가 윤조를 단단하게 붙잡았다. 내구성이 급격하게 올라간 개조 신체가 아니었다면 갈비뼈 서너 대는 나갔을 법한 충격이 전신을 압박했다.

“왜…… 왜 이렇게 늦었어.”

충격을 간신히 떨친 윤조의 귓가에 망가진 지프 엔진보다 더 털털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일찍 온다고…… 했잖아.”

강수혁은 어제 헤어졌던 모습 그대로 셔츠 없는 바지 차림이었다. 심지어 맨발이었다.

무거운 군용 차량의 보닛을 물먹은 휴지처럼 우그러뜨린 그는 덜덜 떨면서 운전석으로 걸어왔다.

“아직 일곱 시도 안 되었습니다.”

안전띠를 풀면서 대답했다.

“많이 기다렸어.”

“주무시고 있으라고 했잖습니까.”

“잤어. 그런데 일찍 깬 거야.”

창백한 낯으로 그런 말을 해 봐야 믿을 수가 없다. 분명히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을 거다.

윤조는 문으로 그를 밀치면서 지프에서 내렸다. 충격 때문에 관절이 화끈거렸으나 내색하지는 않았다.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방금 관뚜껑을 열고 튀어나온 시체처럼 새파랗다 못해 회색빛이 도는 낯이 미라 껍질처럼 부스러질지도 몰랐다.

왕성한 재생력을 가지고도 죽기 적전으로 보이는 에스퍼를 부축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가 반대로 상대에게 덥석 잡혔다.

“손이 뜨거워. 열나나?”

“소령님이 차가운 겁니다.”

생체 핵연료봉이라고 해도 될 에스퍼의 체온이 일반인보다 낮은 경우는 지극히 드물었다. 혈액 소실이 재생보다 빠르다는 소리였다. 그에 시선이 자연스럽게 위에서 아래로 움직였다. 유달리 파란 낯빛 외에는 별다른 상처가 없었다.

바람이 불자 피와 진물 냄새가 훅 났다. 어제 맡았던 것보다 훨씬 진했다. 설마 금속 척추가 완전 다 드러난 건 아니겠지? 얼른 등을 보고 싶었다. 자연스럽게 상대의 몸을 돌리려고 했다.

“잠깐. 너 얼굴 왜 이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이 윤조의 얼굴을 감쌌다. 푸석푸석한 양 엄지 끝이 눈가를 더듬었다.

“울었어?”

“아……. 뭐…… 좀.”

안 울었다고 하기에는 만져지는 피부 느낌이 너무 아니었다. 샤워할 때는 몰랐는데 눈 주변이 심하게 부은 모양이었다. 어쩐지 눈이 잘 안 떠지더라니.

“미안해. 내가…… 내가 잘못했어.”

“아니 소령님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내가 정말…….”

푸르딩딩한 낯에 검은 먹구름까지 끼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툭 떨어뜨릴 것 같은데 의외로 눈가는 흔들리기만 할 뿐이었다. 허옇게 껍질이 벗겨지는 입술로 보건대 아마도 수분을 너무 상실해서 눈물을 만들어 내지 못하는 걸까 의심했다.

“소령님 잘못 아닙니다. 그건 게이트 탓 80퍼센트에 에스퍼 개개인의 희생에 기대지 않고서는 게이트를 막아 낼 수 없는 현생 인류의 무력함 탓이 20퍼센트입니다. 그러니 자책하지 마십시오. 다른 누구도 아닌 증발 실종자 가족으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소령님 잘못이 아닙니다. 그건 천재지변이었어요.”

오열로 퉁퉁 부은 두 눈을 똑바로 뜨려고 노력했다. 그러자 꺼멓게 죽은 눈에 옅은 이채가 돌았다.

“……김윤조.”

갈라지는 목소리에 물기가 조금 스며들었다.

“너는 항상…… 내 기대를 능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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