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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25화 (202/256)

125화

잠시 뜸을 들인 강수혁은 천천히 일어나 침대에 앉았다.

웬만한 사람은 기절하고도 남을 끔찍한 상처에서 진물이 흘러 침대를 적셨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손등으로 닦으며 윤조를 똑바로 봤다.

“왜 그렇게 차분해? 전에는 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잖아.”

“그때 저는 아무것도 몰랐습니다.”

“이제는 다 알잖아.”

“네.”

간략한 대답에 수혁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모르는 것 같은데. 철근 콘크리트 사이에 사람이 있었어. 대략 수십만. 그중에 네 가족도 있었을 거야. 아니 증발 실종이라면 분명히 거기 있었어. 그 때문에 네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그 사실을 네게 숨기고 옆에서 알랑댔어. 어떤 미친 개새끼도 나만큼 역겹게 굴진 않을 거야.”

변명할 수도 있을 텐데 수혁은 그러지 않았다. 한 박자 쉰 그는 고통으로 일그러진 시선을 윤조에게 던졌다.

“그런데도 화가 안 나? 아니면 너무 화가 나서 꼭지가 아예 돌아버려서 도리어 차분해지고 이런 건가.”

윤조는 고개를 저었다.

“어느 쪽도 아닙니다. 화가 나요. 화가 나는데 화를 낼 수가 없어요.”

대답이 의외였는지 잘생긴 미간에 의문이 서렸다.

“왜?”

“솔직히 말하자면 소령님 상태가 제가 상상한 것보다 더 안 좋아서요.”

“동정이야?”

“약간은요.”

강수혁은 입매를 비틀었다.

“동정보다는 원망이 나아.”

“본인이 열렬하게 자학 중인데 제 원망 안 보태도 될 것 같습니다.”

“뭐?”

윤조를 향한 시선이 곱지 않았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물리적 공격을 할 거면 벌써 했다. 등 쪽 상처가 아무리 심각해도 비무장한 사람 하나 못 죽일 것까진 아니다. 수혁은 그냥 윤조를 공격하지 않는다. 페어링 없이도 힘을 주어 확신할 수 있었다.

윤조는 침대로 올라가 엉망으로 들끓는 등을 봤다. 아까보다 훨씬 심했다. 척추 장치가 반쯤 드러났다. 피가 덕지덕지 붙은 철제 프레임을 따라 살이 녹고 새로 돋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척추 장치. 심 박사님 설계죠? 애초에 소령님을 이렇게 괴롭게 할 장치를 개발할 능력도, 그리고 실제 소령님에게 달 수 있는 사람도 그분뿐일 겁니다.”

“알면서 왜 물어.”

예상대로 짜증이 치민 중에도 수혁은 윤조가 제 등을 건드리게 내버려 두었다. 예전 같으면 당장에 벽에 처박혔을 텐데.

“심 박사님은 생각보다 훨씬 소령님을 좋아해요. 그런 분이 소령님에게 자폭 장치 같은 걸 달았을 리가 없습니다. 이건 자해 방지 장치입니다. 그렇죠?”

“…….”

침묵은 곧 긍정이었다.

“생각해 보면 간단한 건데요. 최악의 첫인상인한 편견 덕분에 모든 것이 다 엉망이 되었네요.”

“알고 나니 후련하나?”

“네. 적어도 저를 죽이려고 들었던 이유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심각하고 절실한 이유가 따로 있었단 얘기니까요. 자해 충동이 극심한데 제2의 자해 방지 장치가 만들어지면 저라도 미쳐서 날뛰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은 괜찮아졌습니다. 두뇌 리셋으로 정신적 고통이 상당히 경감된 것도 이유가 되겠지만요.”

“그것만으로 화가 풀려? 어쨌거나 나는 널 죽이려 들었어. 그리고 네 가족을 죽인 직접적인 원인이기도 해. 그런데 아무렇지 않아?”

그의 관자놀이에서 흐르는 땀이 꼭 눈물 같았다.

“아무렇지 않다면 말이 안 됩니다. 말씀드렸지요? 저는 화가 납니다. 하지만 소령님보다는 게이트에 대한 의문과 분노가 더 큽니다. 그리고 인류의 무력함에도요. 게이트 따위 나타난 순간에 바로 해치울 힘이 있다면 우리 가족이 그렇게 허무하게 가지 않았을 테니까요.”

“무슨 성자 같은 말이야. 차라리 화를 내. 지금 네가 내 목에 총알 열 발을 먹인대도 나는 저항하지 않을 거야.”

“어차피 다 재생하는데 그래봤자 소용없잖아요.”

“기억 돌아온 거 맞아? 내가 아는 김윤조는 안 이랬어. 이상해.”

“기억이 돌아왔다고 당장 성격이 바뀌진 않습니다. 그리고 저만 이상합니까, 소령님도 만만찮게 이상해졌어요.”

“내가 어디가?”

“제가 아는 강수혁은 화가 날 때마다 저를 벽에 처박고 강간으로 하체를 망가뜨렸거든요.”

지적에 수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말투는 슬슬 돌아오는 것 같은데.”

“그러게요.”

둘을 둘러싼 공기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수혁은 지친 채로 거친 호흡만 반복했다. 뒷모습이 꼭 상처를 입고 돌아누운 맹수 같았다. 윤조는 남은 수건을 모조리 가져와 호랑이 무늬처럼 번지는 척추 상처를 조심스럽게 닦았다. 때때로 아픈 듯 신음을 하긴 했으나, 수혁은 그 손을 거절치 않았다. 도리어 긴장이 풀리고 고통이 제법 가시는 듯 거친 숨소리가 한결 수그러들었다.

땅거미가 훅 지더니 곧 완연한 밤이 찾아왔다. 수혁의 상태는 나아져서 이제는 흐린 붉은 자국만 있었다.

“너도 피곤할 텐데. 그만두고 쉬어.”

움직일 힘이 있는지, 수혁은 누운 채로 윤조의 팔을 끌어당겼다. 질질 끌려 안착한 곳은 탄탄한 품속이었다. 두꺼운 팔이 온몸에 칭칭 감겼다. 여러 가지 의미로 숨이 벅찼다.

뜨끈한 품이 너무 안락하여 저절로 눈이 감겼다. 하지만 윤조는 여기서 잘 생각이 없었다.

“짐을 집에 두고 왔으니 오늘은 전 아파트에서 자고 내일 오겠습니다.”

“그런 건 천천히 해도 되잖아.”

강수혁을 상대로 돌려 말하는 건 금물인 걸 잠시 깜빡했다.

“머리가 복잡해서요. 짐 정리하면서 엉킨 머릿속도 좀 정리하게요.”

의미를 알아먹었는지 수혁은 말이 없었다. 하지만 끌어안은 윤조를 놓아줄 생각도 없어 보였다. 재촉하지 않았다. 윤조만큼이나 속내가 복잡할 그가 차분히 이쪽의 상황을 이해하도록 여유를 가지고 기다렸다.

“데려다줄게.”

대답은 예상보다 일찍 돌아왔다. 윤조는 저를 감은 팔이 느슨해질 때 스르르 빠져나왔다.

“아픈 사람은 쉬어야죠. 대신에 소령님 단말기 좀 빌리겠습니다. 임시 단말은 여기선 불통이네요. 본부에 연락하면 차량 보내줄 겁니다.”

덩달아 미적미적 일어서는 사람을 굳이 밀어 다시 눕혔다.

“주무시고 내일은 생생한 모습으로 뵙겠습니다. 이불도 새로 사고, 새 침대도 마련해야 하니 할 일이 많겠네요. 수건도 몇 장 더 사고 거즈와 붕대도 꼭 사야 합니다.”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는 수혁의 뺨을 살짝 쓸어준 다음 윤조는 일어서 나갔다.

떠나는 사람의 뒷모습을 보면서 수혁은 내심 불안했다. 계단을 내려갈 때 한번 돌아볼 법도 한데 김윤조는 그러지 않았다. 내일 보기로 했는데도 이상하게 서운했다.

“김윤조, 갔어?”

목청을 높였다.

“아직입니다.”

아래층에서 대답이 돌아왔다.

“걱정하지 말고 주무십시오.”

잠시 후 현관문이 열리고 닫혔다. 본부에 연락하여 차량을 기다릴 줄 알았는데 걸어가면서 할 모양이었다.

저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나? 아니면 정리할 생각이 그렇게 많나?

‘당연히 많겠지.’

너무 어리석은 의문이라 헛웃음 나와야 하는데 그러지 못했다. 대신에 불안으로 뒤범벅이 된 한숨이 샜다.

내일 보자고 말했지만 안 올 수도 있다. 수혁 자신이 남해 안가에서 그랬듯이 사실을 알고서도 함께 있지는 못하겠다고 선언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하긴……그러려니 해야지.’

등이 갑자기 또 화끈거렸다. 생생한 모습으로 보자고 했지만,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았다.

수혁은 윤조의 내음이 옅게 묻은 이불을 꼭 끌어안고 길고 긴 밤을 고통과 불안 속에서 지새웠다.

* * *

밤공기가 선선했다. 군용 지프의 요란한 엔진소리가 예민한 에스퍼를 방해하지 않도록 어느 정도 떨어져서 본부에 연락하려고 했다. 하지만 걷다 보니 이대로 걸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 싶었다.

가로등도 없는 외진 군부대의 이면도로는 컴컴하고 으슥했다. 들리는 건 낯선 행인의 기척에 놀라서 달아나는 풀벌레 소리와 멀리서 짝을 찾아 구슬프게 우는 새 울음이 다였다.

연사흘 날이 맑은지라 하늘에는 별이 떴다. 광공해에서 멀리 떨어진 외곽 지대라 작은 별까지 잘 보였다. 하지만 아득한 저편에 있는 별보다는 아무래도 인공위성이 더 빛났다.

게이트는 지구 대기권에 생기기에 인공위성은 거리와 궤도를 잘 조절한다면 이용 가능했다. 저 중에 가이드 AI 위성도 있다.

가이드 프로젝트로 위성과 연결되어 있기도 하고 또 리셋 이후로 전신에 트리플 S급 에스퍼의 능력이 오버로드 되어 내구성이나 전투력 및 각종 감각기 능력도 월등해졌다. 덕분에 그냥 하늘을 보기만 해도 어느 것인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제 위성 인근으로 다른 위성으로 추정 되는 빛이 스르륵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위성 접속하여 접근 위성의 신호를 분석했다.

그 위성은 80년 전에 발사한 어느 통신 회사 소속이었다. 우주로의 진출을 꿈꾸는, 당시나 지금이나 약간 과대망상증 환자가 아닌가 의심스러운 설립자가 단기간에 수백 기 이상 쏘아 올린 적이 있다. 이후 회사가 망하고 오퍼레이터 팀이 해산되었어도 저 기간에 올린 위성들은 태양 전지로 인해 죽지 않고 홀로 돌아다니는 좀비 위성으로 남았다. 저런 것이 예전에는 더 많았으나 하나씩 작동 불능이 되거나 우주 쓰레기 습격을 받아 파괴되었다. 하지만 저건 운 좋게도 80년이 지난 지금도 살아서 신호를 발산 중이었다.

이미 죽은 몽상가의 흔적을 보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장교 아파트 초입이었다.

밤이라도 오래 걸었더니 땀이 났다. 젖은 셔츠와 바지를 벗어 던졌다. 반사적으로 욕실을 향했다. 삼분 컷 군대 샤워를 끝내고 나와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고 구석에 처박아둔 군용 배낭을 꺼냈다. 자의 반, 타의 반 이사가 벌써 세 번째다. 버릴 건 버리고 간결하게 싸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속옷부터 집어넣었다. 세안 도구에 간단한 옷가지를 챙기고 더러워진 이불과 시트를 끌어모아 세탁용 가방에 집어넣었다. 그러고 청소를 하기 위해 돌아섰다가 바닥에 떨어진 양말을 발견했다.

침대 머리맡에 두었는데 바닥에 떨어졌던 모양이었다.

낡았지만 아직 새것인 양말을 집어 들었다. 이걸 사던 날이 떠올랐다.

형이 보냈던 메시지, 엄마의 성화, 아빠의 전화까지. 모든 것이 어제 일인 것처럼 생생했다. 그렇게 끝일 줄 알았다면 이깟 거지 같은 양말로 그렇게 서운하게 하지 않았을 텐데. 짜증을 핑계로 친구와 어울리지 않았을 텐데.

“미안해, 형. 이깟 양말 하나로 서운하게 해서 미안해. 형.”

눈물과 함께 뒤늦은 사과가 흘렀다.

“속상하게 해서 미안해 엄마. 집에 늦게 들어가서 미안해 아빠.”

평생 하지 못했던 말이 줄줄이 터졌다.

“함께 있지 못해서 미안해요. 나 혼자 살아서 미안해요. 정말로 미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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