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4화
검은 홍채 가장자리를 따라 오팔색 빛이 일렁였다. 벼락을 맞은 것처럼 딱딱하게 굳은 에스퍼의 안면을 보건대 심정적 충격으로 인해 능력이 불시에 개방된 것으로 보였다. 찰나 사라질 불씨처럼 보였던 오팔색 오로라는 금방 태양 코로나처럼 타오르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얇은 반지 크기를 유지했다. 예전에 비하면 감정 조절이 잘 된다는 의미였다.
“기억이 다 났어?”
이윽고 들린 음성은 어쩐지 모르게 들떴다. 굳었던 안면도 봄 햇볕을 맞은 얼음처럼 스르륵 녹았다.
“네.”
“그래? 그럼 욕해봐.”
대뜸 날아든 요구에 이번엔 윤조의 안면이 저절로 일그러졌다.
“미쳤습니까, 욕을 갑자기 왜 해요.”
“표정이 살아있어.”
“언제는 죽은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한심하다 못해 절로 콧방귀가 나왔다. 그러자 에스퍼가 감격한 듯 와락 달려들었다.
두꺼운 흉근이 얼굴에 닿았다. 재생력이 좋은 건강한 육신에선 깨끗한 살 내음이 났다. 광대 언저리에 급격하게 몰리는 열기는 에스퍼의 높은 체온 탓만은 아니었다.
“우리 연두부, 간호도 해주고 덤으로 기억도 살리고. 아주 기특하네.”
“기억 살린 게 기특한 일입니까.”
“응. 아주 기특해. 예뻐.”
가마솥 뚜껑같이 큰 손으로 윤조의 정수리를 마구마구 문지른 수혁은 그것도 모자라 냉큼 입술까지 겹쳤다.
맞붙은 입술은 촉촉하고 부드러웠고 입안을 파고드는 혀는 매끄럽고 다급했다. 뜨거운 숨을 섞으면서 입술을 비틀고 혀를 비볐다. 입천장을 간지럽히다가 이내 이를 세워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다시 흥분한 채로 혀를 비볐다. 이번에는 딱딱한 중심도 윤조의 아랫배를 자극했다.
이미 웃통을 벗은 에스퍼는 아직 흐트러지지 않은 상대의 셔츠 자락을 허리춤에서 빼냈다. 장교용으로 일괄 제작된 벨트는 저절로 풀렸다. 허리를 조이던 가죽띠가 사라지자 약간 느슨해진 등 쪽 바지 틈 사이로 손이 미끄러져 들어왔다. 아직 바지를 벗지도 않았는데 발정 난 뱀 같은 손길이 탄탄한 속옷부터 끌어 내리려 들었다. 키스에 팔렸던 정신이 황급히 돌아왔다.
윤조는 고개를 비틀어 키스부터 끊었다.
“자……잠깐만요.”
“왜?”
키스가 끊기자 수혁은 젖은 입술을 다시면서 윤조의 턱살과 귓불을 잘근거렸다. 부끄러움 따위는 전혀 모르는 손길은 둘로 늘어났고 곧 윤조의 엉덩이를 하나씩 쥐고 쥐었다. 딱딱한 앞섶을 보란 듯이 문지르는 몸짓에선 부끄러움을 한 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제가 중요한 얘기를 하고 있지 않습니까.”
“계속해.”
“아니 이런 자세에서 어떻게 얘기해요.”
“못할 건 뭐가 있어.”
“하.”
낮은 한숨이 약간의 짜증과 함께 튀어나왔다. 그러자 엉덩이를 쥔 손아귀가 살짝 움찔댔다. 귓불을 씹는 척하던 에스퍼는 이내 고개를 윤조의 어깨에 묻었다. 막무가내로 들이대고 있지만 내심 쪼그라든 것 같았다.
방금 그는 G형 게이트를 처리하는 짧은 영상 클립을 보고 척추 장치에 대한 격렬한 거부 반응을 일으켰다. 심정적으로 힘든 건 잘 알겠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 힘든 것인지 알고 싶었다.
윤조는 두 팔을 펼쳐 두툼한 상체를 끌어안았다. 양손 끝이 자연스럽게 상대의 척추 언저리에 닿았다.
“화났어요?”
“……아니.”
“그럼 후회합니까?”
“……뭘?”
“뭐든지요.”
“왜 그런 걸 묻는데?”
“물으면 안 됩니까.”
반은 말장난이었는데 상대에게는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던 남자가 고개를 들고 살짝 떨어졌다. 더불어 엉덩이를 더듬던 손도 바지 밖으로 스르륵 나가버렸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정확하게 물어. 괜히 돌리지 말고.”
한껏 달아올랐던 키스가 무색하게도 돌아오는 목소리가 상당히 냉랭했다. 페어링이 유지되었다면 아마도 지금쯤 AI가 분노, 혐오, 가학 같은 단어를 읊었을 것이라고, 가이드로서의 경험이 얘기했다.
“G형 게이트 영상. 예전에 본 적 있습니다.”
유명한 영상이었다. 당시 수도가 반파된 사건에 대한 책임 소재를 가르고 피해 복구를 하느라 나라가 몸살을 앓았으며 그 과정에서 다양한 폭로와 함께 군사 비밀이 등급을 가리지 않고 나돌았다. 전시관은 그 자료들을 모아서 내건 것에 불과했다. 사실 미니 상영관에서 본 영상도 조금만 찾으려고 하면 지금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당시엔 일개 에스퍼가 저럴 수 있냐? 혹은 G형 게이트가 너무 과장된 것이 아니냐? 영상 자체가 조작이라는 음모론이 득세했다. 달착륙 거짓 음모론만큼이나 핫한 주제였고, 사실상 사실을 바탕으로 크게 과장한 조작이라는 설이 강했다. 지금은 F형 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한 치 거짓 없는 자료라는 설이 대세가 되었다.
“당시엔 일부러 잊으려고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습니다. 입대 후에 딴생각할 틈이 없었어요. 하지만 잊은 건 아닙니다. 항상 품었던 의문이었죠. 대체 왜 그렇게…….”
“그것밖엔 다른 방법이 없었어.”
이쪽의 말을 자른 음성은 다소 신경질적이었다.
“당시엔 정말로 그것밖에는 없었어. 통신 장애로 아무와도 연락이 되지 않고. 까마득한 외계 괴물 새끼는 날뛰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거밖에 없었다고.”
“그게 구체적으로 뭡니까.”
“잡히는 건 아무거나 다 끌어모아서 던지는 거.”
“그럼…….”
“그래. 맞아.”
또다시 수혁이 말을 잘랐다.
“거긴 도시 한복판이라 군함이 있는 것도 아니니 말이야. 잡히는 게 뭐겠어?”
한순간에 수분을 잃어 거칠해진 성대에서 나는 목소리는 음정을 벗어나 떨렸다.
“내가 인식한 물체는 콘크리트 사이에 있는 철제빔이었어. 그게 하필 아파트였고.”
“…….”
“끌어올린 물건들 사이에 많은 게 있었어. 생각지도 못한 많은 게.”
그 말을 끝으로 에스퍼의 홍채에서 일렁이던 빛이 훅 꺼졌다. 등을 돌릴 줄 알았는데 의외로 수혁은 도리어 윤조를 향해서 섰다.
“원망하지? 죽이고 싶지? 나도 이해해. 그런데 트리플 S급씩이나 되니까 빌어먹게 뒈지는 것도 쉽지 않네.”
벌벌 떨리는 손이 비행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때였다. 보이지 않는 망치가 윤조의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쳤다.
“설마 가학이…….”
확인할 방법이 있다. 툭하면 돌아서던 평소와 달리 대면을 고수하는 에스퍼의 한쪽 팔을 잡아당겼다. 다소 저항이 있었으나 거부하진 않았다.
방금 끌어안았을 때만 해도 매끈했던 등이 엉망이었다. 수포가 다시 들끓고 있었다.
핏물과 진물로 엉망인 피부를 보며 이번엔 윤조가 얼어붙었다.
“뭘 그렇게 봐.”
“…….”
손을 뿌리친 수혁은 윤조를 비켜 걸었다. 대충 뭉쳐 던진 수건을 다시 집어 든 그는 더러운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수건을 등에 댔다.
“젠장.”
“제가……제가 대신 하겠습니다.”
윤조는 멍한 채였으나 손을 내밀었다.
“됐어.”
거절하는 태도가 냉정했다. 엉망이 된 수건 서너 장이 저절로 날아들어 짓무른 등에 들러붙었다.
“미안한데 남은 말은 좀 이따가 해도 되지?”
이층 계단을 흘끔 본 수혁이 물었다. 윤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따가 정말로 다 들을 거니까 지레 화나서 집 나가지 말고.”
“안 나갑니다.”
“그래.”
슬쩍 입꼬리를 올린 수혁은 이층으로 향했다. 비행 대신 걷기를 택한 그의 뒷모습은 이상하게도 위태로워 보였다.
홀로 남은 윤조는 멍하게 서 있다가 감각이 둔한 발걸음을 옮겨 소파에 앉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도심 백화점에서 쇼핑의 즐거움은 어디로 간 건지. 꼭 신기루 같았다.
삶의 타이밍은 언제나 불가해였다.
하필 자신만 집을 떠나 있던 시점에 G형 게이트가 나타났다.
하필 F형 게이트가 나타나서 결과적으로 뇌를 리셋 하게 되었다.
하필 전시를 봐서 잊었던 기억을 되찾았다. 전시 행사와의 조우는 느닷없다는 점에서 게이트와 같았다.
모든 시작은 게이트였다. 게이트는 나타나고 인간은 휘말리고 발버둥 친다.
8년 전 그때 휘말린 사람은 윤조의 가족을 포함한 수십만 명이었고 발버둥을 친 건 강수혁이었다. 그리고 그는 아직도 발버둥 치고 있다. 휘말린 사람은 어디에도 없는데.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발걸음은 이층으로 향했다.
일전에 썼던 방은 창문이 망가진 채였다. 마당에 엉망으로 망가진 침대가 어디로 나갔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예전에 뚫은 이후로 복구한 적이 없는 벽 구멍을 통해 잘 안 쓰던 구석방이 보였다. 얇은 시트 외엔 이불도 없는 침대 위에 거대한 인영이 누워있었다. 엎드렸다가 양쪽으로 돌아눕기를 반복하는 그는 때때로 신음했다. 울음으로 착각할 만큼 고통스러운 소리였다.
침대 근처에 갔는데도 상대는 이쪽을 돌아보지 않았다. 떠는 팔에 손을 대자 놀란 시선이 윤조를 향했다.
“언제 왔어?”
갈라지는 목소리가 물었다.
백화점에서 말도 없이 전시관으로 향한 자신을 아무런 어려움 없이 바로 찾아왔다. 평소라면 호흡과 맥박으로 벌써 위치를 알았을 거다. 얼마나 괴롭기에 그 예민한 청각마저 마비된 걸까.
예민하고 비협조적인 에스퍼가 발산하던 날카로운 가학의 방향은 내내 잘못 해석했다. 그건 오만의 상징도, 비인간성의 표현도 아니었다. 도리어 그 반대였다.
“소령님.”
“그만 내려가. 네가 할 수 있는 건 없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먼지 냄새가 풀풀 나는 베개를 힘겹게 끌어안은 수혁은 고개를 다시 돌렸다.
“같이 있을 겁니다.”
“왜?”
“아픈 배우자를 보살피지 않고 내버려 두는 짓은 이혼 사유입니다. 재결합한 지 얼마 되었다고 또 이혼합니까.”
농담이나 할 때냐고 반문한다면 농담이 아닌 진담 100퍼센트라고 반박할 셈이었다. 하지만 수혁이 꺼낸 의문은 좀 더 근본적인 쪽에 가까웠다.
“기억났다면서.”
“네.”
“그럼 내가 너한테 한 짓도 다 기억났을 거 아냐.”
“네. 갑자기 생생하네요. 엄청났죠, 그때.”
꽤 담담한 음성으로 답했다. 차분할 수 있는 자신에 은은한 뿌듯함을 느끼는 사이 침대에 늘어진 에스퍼의 신체는 눈에 띄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