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졌다. 상영관 스피커에서는 노이즈와 별반 차이가 없는 지직거림만 흘러나왔다.
김윤조.
다시 한번 빛이 자신을 불렀다. 이번에는 실감마저 들었다.
화면 속에서 거대한 빛무리는 검은 다리를 기어이 하나 잘라 냈다. 뒤이어 다가오는 나머지 다리에게 달려드는 찰나, 제 어깨에 뭐가 턱 올라왔다.
반사적으로 어깨에 오른 물체를 반대편 손으로 잡아당기면서 몸을 뒤로 돌려 밀었다. 뭐든 앞으로 굴러떨어져야 하는데, 거대한 바윗덩이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조를 감싸듯 앞으로 기울어진 바위가 변태처럼 들러붙어 비비적댔다.
“열렬하네.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어?”
공격으로 인지하고 엎어치기를 시도했건만 트리플 S급 에스퍼는 그것을 가볍게 무위로 돌렸을 뿐 아니라 애정 행각으로 받아들였다. 뒤늦게 긴장을 풀면서 물었다.
“어떻게…… 언제 왔습니까.”
“방금. 불러도 모르더라.”
거구가 빈틈없이 들러붙었다. 망나니의 중심이 엉덩이에 붙어서는 요란하게 자기주장을 했다.
“좀 떨어지십시오. 밖입니다.”
“여긴 아무도 없잖아.”
전시관 내 작은 상영관을 멋대로 해석한 에스퍼는 팔을 허리에 감고 뒤로 당겼다. 딱딱한 걸 부끄러움도 없이 더 들이밀면서 입술로 귀 끝을 쪼았다.
“저게 뭔데 그렇게 재미있게 봐. 부르는 데도 모르고.”
“그야 소령님이니까요.”
내내 윤조의 귀와 목덜미에만 쏠려 있던 강수혁의 신경이 전방 화면을 향했다. 슬라임처럼 능글능글하게 들러붙었던 몸이 별안간 얼음처럼 딱딱해졌다.
“……나가자.”
낮은 선언과 함께 윤조는 상영관 밖으로 끌려 나왔다. 강수혁의 발걸음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윤조의 팔목을 단단히 잡은 채 전방을 주시하며 어두운 전시관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심지어 출구가 아니라 입구 쪽이었다. 행사장을 관리하는 직원은 수혁과 윤조를 보며 난감한 듯 웃었다.
“죄송합니다.”
반사적으로 사과하고 고개를 들자 방금 들어올 때보다 족히 다섯 배는 더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일제히 이쪽을 봤다.
“내 말 맞지? 강수혁 봤다고 했잖아.”
“여기 웬일이래?”
“행사 관련 이벤트 아닐까?”
단말기 카메라를 높이 들고 입구로 우르르 다가왔다. 수혁은 잡았던 손목을 놓고 윤조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와!”
탄성이 터졌다. 사람들의 고개와 카메라가 비행 궤적을 따라 각도를 바꾸었다.
가볍게 날아오른 수혁은 그대로 에스컬레이터 초입에 착지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오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어떤 사람은 손가락질하며 탄성을 터트렸고, 어떤 사람은 민첩하게 카메라를 들이댔다. 백화점 로비를 지나기까지 족히 수백 장은 찍혔을 거다.
입구에도 인파가 가득했다. 이미 말릴 기세가 아닌 수혁은 백화점을 나오자마자 제가 끼고 있던 헤드셋을 벗어 윤조에게 씌웠다. 그리곤 윤조를 안고 하늘 높이 떠올랐다. 당연히 호텔로 갈 줄 알았는데. 방향이 엉뚱했다.
“어디로 가십니까?”
헤드셋 한쪽을 들어 올리고 물었다.
“우리 집.”
“네?”
“볼일 다 봤잖아.”
“이틀 놀 거라면서요?”
“이제 됐어.”
별안간 흥미를 식은 이유가 궁금했다. G형 게이트 관련인 건 분명한데 왜 기분이 상한 건지 정확한 매커니즘을 파악하기 어려웠다.
차가운 칼바람이 피부를 때렸다.
전투복 없이 음속 비행은 힘겨웠다. 하물며 군복도 아니고 일반 사복이었다. 속도는 더더욱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맨몸으로 감당하기에는 너무 빨라서 일반인이라면 빠르게 흐르는 공기를 제대로 흡입하지 못해 벌써 숨 막혀 기절했을 속도였다. 하지만 윤조는 예외였다.
전에 수혁에게 안겨서 폐업한 콘도에 갔을 때와 비슷한 속도였다. 그때는 전투복에 헬멧까지 갖추고도 힘겨웠다. 그런데 지금은 바람이 차가울 뿐, 속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남해 섬으로 갈 때도 그렇게 부담스럽지 않았다. 당시엔 전투복과 헬멧을 갖춘 상태여서 정확한 차이를 알기 힘들었으나, 지금 보니 신체 내구성이 확실히 달라졌다. 심지어 말도 할 수 있었다.
“아, 산 거 백화점에 두고 왔습니다.”
“배달 시켜.”
여지가 없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개기거나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니었다. 윤조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십여 분 후에 특작부 인근 상공에 진입했다. 산등성이에 있는 대공포 열두 기가 자율 방어 프로그램에 따라 이쪽을 인지하고 포신을 들어 올렸다. 내심 긴장했다. 대공포에 맞을까 봐서 두렵다기보다는, 심기가 불편한 강수혁이 방어 자산을 다 박살을 낼 것이 우려스러웠다.
위이잉.
이쪽의 궤적을 따라 포신이 일제히 움직였다. 다행인 점은 조준만 했을 뿐 실제 발포는 없었다.
‘일반 사복인데 아군 식별 신호가 어디서…… 아.’
척추 장치.
대공포 지역을 지나자 속도가 급격하게 줄어들면서 하강했다. 착지한 곳은 강수혁의 집 마당이었다. 헤드셋을 벗으며 비행 동안 풀린 하체 관절을 점검했다.
우거진 잡초밭 위에 형편없이 망가진 침대 파편이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신경 쓰지 마.”
딱히 무슨 말을 한 것도 아닌데 강수혁이 먼저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그러니까 도리어 신경이 더 쓰였다. 무슨 청개구리도 아니고.
침대와 달리 집 안은 멀쩡했다. 막 구두를 벗고 들어갈 때였다. 한 걸음 먼저 들어선 상대가 갑자기 윗옷을 훌렁 벗었다. 대낮부터 하자는 건가. 뭐 안 될 건 없다. 무의식중에 좁은 아래층 소파냐, 위층에 있는 다른 방 침대냐 고민하는 중에 강수혁이 몸을 돌렸다.
태평양처럼 넓은 등짝 한가운데 세로로 움푹 파인 척추 자리를 따라 붉은 물집이 무수히 돋았다. 조그맣게 형성된 것은 이내 손톱 이상으로 커져서 다른 물집과 합쳐졌고 뒤이어 저절로 터져서 붉은 핏물과 노란 진물을 뱉어 냈다. 그 과정이 무시무시한 속도로 반복되었다. 숫제 피부가 들끓었다.
“세상에.”
너무 놀라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반사적으로 손을 대자 그렇지 않아도 떨리던 등이 튀었다.
“시발.”
낮은 욕설이 이어졌다.
“왜 이러는 겁니까?”
“장치 부작용. 전에 말한 적 있잖아.”
대꾸하는 어조에 짜증이 깃들었다. 웬만한 상처에는 꿈쩍도 하지 않는 사람이 그럴 정도면 고통이 상당하다는 얘기였다.
“이렇게 심할 줄은 몰랐습니다. 박사님을 불러야겠습니다.”
“아줌마가 와도 소용없어. 유전자 단위 변형이 어쩌고 뭐라면서 알아서 하래.”
“그런 무책임한 소리가 어디 있습니까. 하다못해 분비물 닦고 연고라도 발라야죠.”
“네가 해 줘, 그럼.”
아픈지 얼굴을 찡그린 에스퍼가 응석을 부렸다.
“구급상자 찾아올 테니 소파에 앉으십시오.”
“구급상자 없는데.”
재생력이 왕성한 에스퍼에게 구급상자가 있을 리 만무했다.
“일단 닦을 걸 가져오겠습니다.”
윤조는 위층으로 가서 깨끗한 수건 여러 장과 함께 수혁이 늘 버리고 다니는 개인 단말기를 챙겨서 내려왔다.
마른 수건을 길게 돌돌 말아 척추 자리를 따라 조심스럽게 댔다.
“아야.”
“표피가 완전히 다 허물어졌습니다. 진피도 반은 녹은 것 같아요.”
산채로 태우는 피부가 이렇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심했다. 수건이 금방 핏물과 진물로 더러워져서 다른 수건으로 바꿨다. 계속해서 상처를 닦는 중에 뭔가 수건 실밥이 어딘가에 걸렸다.
처음에는 진물에 들러붙은 줄 알았다. 하지만 실밥을 붙잡은 건 단순한 진물 덩어리가 아니라 금속성 물질이었다.
“윽! 뭐야? 엄청 아픈데.”
일반인으로 따지면 드러난 뼈에 걸릴 격이었다. 안 아플 리가 만무했다.
“잠시만요. 수건이 걸렸습니다.”
“시발.”
조심스럽게 떼어 내는 중에 넓은 등이 수시로 움찔거렸다.
계속 상처를 닦아 내고 또 닦아 냈다. 물집이 올라오는 속도가 점차 느려졌다. 가져온 수건을 다 쓰고 위에서 새로 몇 장을 더 가져와 닦을 때쯤 진피는 거의 복구가 되었다. 표피에만 자잘한 수포가 이어졌다. 그제야 윤조는 한시름 놓을 수 있었다.
“수건은 버려야겠어요.”
엉망이 된 수건 뭉치를 끌어모아 정리했다. 그러는 사이 수혁은 아까 벗어서 팽개친 니트를 집었다. 아이보리색 니트는 수건만큼이나 엉망이었다.
“그것도 버리죠.”
“네가 처음으로 사 준 건데.”
“정확하게는 중장님이 산 겁니다. 마음에 들면 같은 제품을 제 돈으로 사드리죠.”
“그래.”
새로 사 준다는 말에 수혁이 히죽 웃으면서 니트를 뭉쳐 내밀었다. 아니 등짝이 걸레짝이 되었는데 웃음이 나오나.
망친 것들을 현관 앞에 둔 후 윤조는 수혁의 상처를 다시 확인했다. 수포가 거의 다 가라앉아서 이젠 붉은 자국만 남았다.
“거부 반응, 혹시 아까 본 영상 때문입니까?”
“……뭘 또 묻고 그래.”
부정하진 않았다. 반쯤 돌아선 사람을 향해 윤조는 평생 한 번도 꺼내지 않았던 얘기를 시작했다.
“그 사건 이후 저는 답답했습니다. 우리 가족이 어떻게 죽었는지, 내막을 전혀 알지 못했으니까요. 도대체 게이트란 놈이 뭔지, 외계 괴물이 뭐길래 우리 가족이 그렇게 가야 했는지. 내내 허망했고 그만큼 억울했습니다.”
비켜선 에스퍼가 주먹을 쥐었다. 분노보다는 불안으로 보였다.
“망할 에스퍼 새끼들. 어떻게 해서 무수한 민간인을 죽게 두었나? 군인이라면서 뭐 했나? 게이트를 상대로 뭘 어떻게 하기에 그런 희생을 낳았나. 내가 에스퍼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무슨 짓을 해서라도 게이트와 외계 새끼를 해치웠을 텐데.”
이번엔 에스퍼를 향해 선 가이드의 손이 단단히 말렸다.
“그것이 제가 가이드가 된 이유입니다.”
냉랭한 눈빛이 윤조를 향했다.
“너.”
“네. 기억났습니다. 전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