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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17화 (194/256)

117화

느릿느릿 움직이던 차가 드디어 국회 앞마당으로 들어섰다. 내릴 사람이 내린 후 차는 곧장 주차장으로 이동했다.

벌써 십 년도 전에 포화 상태에 이른 수도권 분산화를 위해 수십 년의 공방 끝에 이미 국회와 대통령 관저 이동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지고 관련 특별법이 제정되긴 했으나, 언제까지 이동을 완료하라는 명시 조항이 없어서 반쪽짜리 법이었고 당시에도 수도권 부동산 폭락 타령으로 이동 반대 시위가 연일 이어졌었다.

각종 이권 다툼도 G형 게이트라는 거대한 재앙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수도가 반파된 직후 모든 정부 부처와 각종 공기업, 그리고 살아남은 사기업 본사들은 사건이 수습되기도 전에 서울에서 나갔다.

G형 게이트의 여파로 크고 작은 게이트가 앞으로 수십 년간 이어질 거라는 관련 전문가 경고가 있었다. 그와 관련하여 제정된 정부 주요 기관의 위치에 관련한 특별법에 따라 대통령 관저를 비롯한 정부 기관은 서로 간에 각 20km 이상 거리를 벌리고 지어졌다.

물리적 거리는 기관 관계자끼리 사석을 통한 비공식 소통을 어렵게 했고 자연스럽게 각 기관끼리 독립 성향이 강해졌다. 특히 정부와 국회 간의 사이가 특히 나빠졌는데, 심지어 여당과 대통령과의 사이도 좋지 않은 게 당연시될 정도였다. 야당을 상대할 때만 같은 편일 뿐, 한 지붕 아래 원수지간이나 마찬가지였다.

그중에서도 현 대통령에 밀려 지난 여당 경선에서 밀린 이청규는 어떻게든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아직 임기가 2년 이상 남은 대통령에 대해 갖은 정치적 부담을 떠넘기려 들었다. 특히 정부 책임으로 돌릴 수 있는 일은 모조리 크게 부풀렸는데, 이번엔 F형 게이트 사건이 대상이었다.

어디까지나 여당 당수이기 때문에 앞에서 대놓고 그러는 건 아니었다. 국가적 이익을 위해서라도 조용히 진행할 미국과의 군사 동맹 문제를 괜히 정치 쟁점화하려는 야당의 박자에 놀아나는 것처럼 하면서 정부를 국감 도마 위에 올렸다.

지금 장선욱을 비롯한 특작부 장교 일행은 공개 국정 감사 전에 비공식적인 자리를 빌어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빌러 가는 거였다.

욕심이 덕지덕지 떨어지는 능구렁이 새끼라 평생 대통령은 못될 놈.

이것이 이창규에 대한 장성욱의 평가였다.

윤조는 특작부 능구렁이로 유명한 장선욱이 평가하는 국회 능구렁이가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자못 궁금했다. 뉴스에 나오는 모습은 어차피 만들어 낸 모습이기에 실상과는 다를 터.

이창규의 의원 비서관이 1층 로비에서부터 특작부 일행을 맞이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중장님. 다른 분은 따라오시면 됩니다.”

비서관은 특작부 전체보다는 장선욱을 의식했고 다른 일행에게는 아무런 관심을 주지 않았다. 심지어 눈도 안 마주쳤다. 헌정사상 최강 군대인 특수작전사령부의 책임 사령관이니 극진한 의전이 당연한 일긴 한데 뭔가 묘했다.

“쟤들, 나 무시하는 거야?”

무시당한 에스퍼가 곁에 선 가이드에게 물었다. 외견의 출중함이나 명성의 위대함이나 장선욱을 압도하는 사람이 바로 강수혁이었다. 평소 어딜 가든 주변 이목이 자연스럽게 자신을 향하는 데 익숙했다. 누구든 강수혁을 보자마자 이름을 부르면서 알은척하거나, 적어도 대단히 의식하면서 곁눈질 정도는 해야 했다.

“글쎄요.”

쓰리 스타에 비하면 무궁화 하나쯤은 아무것도 아니긴 할 것이다. 하지만 강수혁이 누군가. 전국구를 넘어서서 글로벌 스타 아닌가. 그런 강수혁에게 눈길 하나 안 준다고? 배우자 두둔이 아니라 객관적으로 봐도 이상했다.

“정치하는 사람이라 평소에는 황송할 만큼 인사 잘해요. 저건 우리 측에 일부러 힌트 주는 겁니다. 이창규 대표 태도에 대해서 말이죠. 아무래도 오늘 만남은 좋게 흘러가기 글렀습니다.”

옆에 선 비서 장교가 헛웃음 지으며 설명했다.

이창규는 에스퍼에 대해 아주 비관적이고 냉소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장선욱이 애를 먹는 중이기도 하고.

국회법에 따라 배정되는 의원실 가운데서도 명당이 있다. 빛이 잘 들고 화장실과는 제법 거리가 있으며 대신 엘리베이터가 가까운 호실. 그중에서도 최고 명당에 바로 4선 의원이자 여당 대표인 이창규의 의원실이 있었다.

약속 시간에 딱 맞게 도착했는데도 이청규는 자리에 없었다. 내실에서 전화 통화 중이었다. 미리 만남을 약속한 만큼 알아서 끊어야 할 텐데도 이청규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에 장선욱이 코웃음을 쳤다. 이것 또한 기 싸움의 일환이었다.

오 분 후에 이청규가 아는 의원의 전화가 왔었다면서 괜한 너스레를 떨면서 나타났다.

“장 중장. 신수 훤해 보입니다.”

“네, 대표님 덕분입니다.”

이청규는 장선욱을 단순히 중장이라고 불렀고 반대로 장선욱은 대표님이라고 깍듯이 대했다. 시답잖은 인사를 주고받은 후에 이쳥규는 자리에 앉으면서 장선욱을 향해 물었다.

“딸린 사람이 뭐가 이렇게 많아? 못 보던 얼굴이 있는데?”

슬그머니 자리에 앉으려던 장선욱이 벌떡 일어서서 각자를 소개했다.

“이쪽은 에스퍼 강수혁 소령, 그리고 이쪽은…….”

“흠, 이자가 가이든가?”

못 보던 얼굴이라고 했으면서 이청규가 먼저 알은척을 했다.

“준위 김윤조라고 합니다.”

가볍게 경계를 붙였다. 머리 꼭대기에서부터 발끝까지 천천히 오르내리는 늙은 시선이 이상하게 징그러웠다.

“사당패답게 생겼네.”

“예?”

품평할 줄은 알았지만, 뜬금없이 사당패? 윤조가 반사적으로 입을 열자, 앞에선 비서 장교가 빠르게 반응하지 말라고 눈짓했다.

“김 준위가 강 소령과 더불어 저희 특작부에서 손꼽히는 미남입니다.”

대신 장선욱이 받아쳤다. 이청규가 코웃음 쳤다.

“그런 일 하려면 얼굴이라도 괜찮아야지 않겠나.”

“특수부대 하사 출신으로 기존 전투 성과가 대단했습니다. 가이드 프로젝트가 리스크가 대단히 큰데 그걸 이겨 낼 만한 강인…….”

부하를 두둔하는 장선욱의 입을 이창규가 가로막았다.

“그러면 뭐 하나? 지금은 다른 남자 잠자리 머슴인데. 다른 나라 가이드는 안 그렇다는데 우리는 뭐 이따위야. 어디 창피해서 내놓기나 하겠나?”

그제야 사당패가 무슨 뜻인지 눈치챘다.

윤조와 강수혁의 관계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 모양이었다. 뭐 특작부 내에서도 공공연한 사실이라, 이청규처럼 정부 요직에 앉은 사람이면 어디서든 들었을 법했다.

“대표님.”

“왜 내가 못 할 말 했나? 에스퍼를 잘 관리하려면 뭐 프로그램이 필요하다고 해서 돈 줬더니 그 돈으로 남창을 만들어 놨는데 이걸 국민에게 뭐라고 해명하나?”

세계적인 유명세를 타고 있는 에스퍼와 그의 가이드의 실생활에 관해 알음알음 알려진다고 한들, 공식기관에서 공공연하게 이러쿵 저러쿵 공개할 수 없는 정보였다.

때문에 이청규가 한 말은 국민을 핑계로 한 협박이었다. 자극적인 사실 일부만 침소봉대하여 프레임을 짜고 그걸 핑계로 특작부 예산을 어떻게 하겠다는 협박. 물론 윤조와 강수혁의 관계가 이렇게 흐를 수밖에 없었던 기술적, 신체적, 육체적 연유 따윈 일체 무시될 것이다.

“초면부터 좆같네.”

크지 않은 음성이었으나, 의원실에 있는 사람 모두가 똑똑히 알아들을 만큼은 되었다. 의원 비서관들의 시선이 일제히 욕을 뱉은 사람에게 향했다.

“지금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비서관 중 짬이 좀 되어 보이는 사람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따졌다.

“눈깔아. 뒈지기 전에.”

망나니 입에서 욕설에 이어 협박까지 튀어나왔다.

장선욱은 눈을 감으며 탄식했고 비서 장교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김윤조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천장만 봤다.

“뭐야? 너 이 새끼. 여기가 어디 안전이라고 개망나니 짓이야?”

“시발. 늙다리 영감탱이라서 목숨이 아깝지 않은 모양이지?”

김윤조를 비롯한 특작부 일행은 점입가경에 할 말을 잃었다. 이청규가 벌떡 일어서서 강수혁을 향해 삿대질했다.

“이 미친 새끼가! 지금 누굴 상대로 협박하는 거야, 죽고 싶어?! 당장 경찰 불러!”

경찰이라니. 지금 핵폭탄급 망나니를 상대로 하찮은 공권력을 행사하자는 건가? 지금 이청규는 성난 호랑이의 아가리를 향해 달리는 중이었다. 그것도 전신에 양념을 바른 채로.

“제가 대신 사과드리겠습니다.”

유혈 사태는 막고 싶은 장선욱이 끼어들었다.

“죄송합니다. 대표님. 제가 잘못 가르쳤습니다. 화 푸십시오.”

금방이라도 무슨 짓을 저지를 것 같은 수혁의 앞을 가로막은 채로 이청규를 향해 허리를 푹 숙였다. 그에 강수혁을 비롯한 모두가 충격에 빠졌다. 장선욱이 저렇게 굽실거리다니.

“딴에는 편드나 본데. 부하 간수 잘해, 이 새끼야!”

연이은 막말에 강수혁 주변 온도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그에 여전히 허리를 숙인 장선욱이 윤조를 향해 눈짓했다.

“참으십시오. 소령님.”

움직이려는 강수혁을 윤조가 등으로 밀어냈다.

“좆 까라 해. 하여간 괴물 새끼들.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들이 어디서 건방지게 참으라 말라야? 너희 같은 괴물을 낳은 부모도 부모라고 미역국 처먹었냐?”

“대표님,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부모를 거론하자 장선욱이 고개를 들면서 언성을 높였다. 딴에는 강수혁을 키운 부모라서 그런 건지도 몰랐다.

“지나칠 게 뭐야? 장선욱이. 당신이 그 모양이니까 당신네 새끼들이 다들 저 모양 저 꼬라지 아냐! 저 에스퍼 새끼 하나한테 쓰는 돈이 얼만 줄 알아? 그 돈줄, 내 한마디면 싹 말라……!”

싸늘하면서도 조롱 조로 줄줄 이어지던 이청규의 목소리가 별안간 사라졌다. 입을 벌린 이청규는 눈을 홉뜬 채로 벌벌 떨었다.

“어……으…….”

“대표님!”

놀란 비서관이 이청규에게 달려들었다. 감전된 사람처럼 바르르 떨던 이청규는 급기야 의자에서 굴러떨어졌다. 그의 입에서 붉은 핏기가 비치더니 이내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119! 119 불러!”

의원실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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