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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16화 (193/256)

116화

식사를 마치고 돌아온 장선욱 외에 다른 비서 장교까지 질답 검토에 합류했다. 모두 치밀한 정치 다툼을 비롯한 언론 플레이를 위한 작전 수립에 들어갔다.

“이청규 조카 봤지?”

장선욱이 윤조에게 물었다.

“고진수 훈련병 말입니까.”

“응. 그 새끼가 쁘락치야. 저거 외삼촌 한마디면 다른 편한 부대 갈 수 있는데 하필 특작부 지원한 것부터가 의심스러웠어. 이세명이도 그렇게 들어왔고. 인권위에 제소하려고 자료 모으려고 일부러 들어온 게 아닌가 싶어서 일부러 최정이한테 주시하라고 했는데. 자네를 붙였더군. 그래서 어떻게 됐어?”

어쩐지 갑자기 신병 훈련을 시키더라니.

“아마 자료는 없을 겁니다. 강 소령님이 해결했습니다.”

그때 있었던 일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자 장선욱이 한가롭게 떠다니는 강수혁을 향해 씩 웃었다.

“그놈이 그랬단 말이지? 어이, 당장 그 새끼 자료 탈탈 털어와. 이청규가 무마한 학폭 건수가 분명히 있을 거야. 꼭 찾아내.”

장선욱은 땡잡았다는 포즈와 함께 비서 장교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에 강수혁이 인상을 썼다.

“꼰대 좋으라고 한 일 아니야. 그리고 시킬 거면 미리 말이라도 좀 하든가. 갑자기 신병 훈련은 무슨. 내가 없었으면 귀찮게 될 뻔했다고.”

“최정이 따로 설명 안 했나?”

“이유 없이 지시만 하달받았습니다.”

윤조가 대답했다.

“최정이가 정신이 없었네.”

분명히 장선욱이 괜히 최정 탓을 했다.

이유를 설명하지 않은 것에는 특별한 이유 따윈 없다. 그냥 군대 통(通)답게 지시와 결과를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군대는 학교가 아니니까. 까라면 까는 거다.

“나는 일반인 조교 붙이라고 했지. 일반인이면 분명히 고진수 놈이 나댈 거라서. 김 준위를 붙인 건 최정이 판단이야. 이유는 뭐 보니까 최정이는 너희 바로 시시덕댈 줄 알았던 것 같고. 아니 아무리 당장 할 일이 없어도 귀한 가이드에게 신병 훈련이 웬 말이야? 나는 당장 다른 에스퍼 붙일 준비 하라고 했는데. 이번에는 최정이 판단이 옳아. 다른 에스퍼 붙이면 강수혁이 저놈이 가만히 있을 놈이 아니니까. 나중에 최정이한테 감사해.”

전혀 몰랐다.

윤조는 머쓱한 시선을 강수혁에게 던졌다. 강수혁도 전혀 몰랐던 눈치였다.

“하여간 최저씨 오지랖은 알아줘야 한다니까.”

툴툴 대지만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 * *

호텔과 국회와의 거리는 가까웠다. 걸어도 30분이 채 안 걸릴 거리였다. 하지만 차량으로 이동하자니 더 오래 걸렸다. 신호도 많고 통행량도 많은 탓이었다.

“그냥 날아가면 안 돼?”

거대한 세단 뒷좌석에 앉은 강수혁이 투덜댔다. 음속 비행을 즐기는 에스퍼에겐 달팽이 속도의 차는 감옥이었다.

“국회는 국가 보안 시설입니다. 통상적인 출입 절차 외에는 다 금지입니다.”

앞 좌석에 앉은 비서 장교가 대답했다.

“근처까지만 날아가면 되지.”

“그럼 다른 사람은 어쩌고요.”

이번엔 강수혁 옆에 앉은 김윤조가 답했다.

“다 같이 날아가자.”

“사람들이 봅니다. 트렁크에 자료와 장비도 있고 무엇보다 앞차에 계신 중장님을 두고 갈 순 없습니다.”

“우리 일행 차를 전부 이동시키면 되잖아. 그 정도 능력은 있어, 나.”

꼭 재벌 후계자가 돈 자랑 하듯 능력을 과시했다.

“참읍시다, 강 소령. 민폐 갑질이라고 뉴스에 뜰 수 있습니다. 요즘 사람들은 순서에 민감해요.”

대외 업무를 전담하는 비서 장교라서 그런지 매스컴 동향과 국민 감정에 예민했다.

“능력 사용이 민폐 갑질이면 에스퍼는 왜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복무시키는 건데? 그건 우리에 대한 민폐 갑질 아닌가?”

불퉁한 투로 의외로 핵심을 꼬집는 에스퍼에 대해 비서 장교는 말이 없었다.

원론적으로 강수혁의 말이 맞다.

그렇게 에스퍼는 태어나자마자 에스퍼라는 이유만으로 특별 취급을 받는다. 그걸 아니꼽게 보는 사람도 있지만, 원론적으로 말해 인권 침해 소지가 다분했다.

“일반인들은 너무 강한 사람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예 혼자서 살아갈 생각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감수해야 합니다.”

“굳이 그래야 해?”

“김치찜 집 좋아하지 않으셨습니까. 아이스크림 집도요. 그게 다 일반인들이 지탱하는 사업입니다. 소령님이 먹는 거, 입는 거, 쓰는 거 전부 다.”

윤조의 반론은 높낮이 없이 일정한 톤으로 이어졌다.

“일반인들은 이해 범위를 벗어난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특히 게이트가 열리고 외계 괴물들이 생기면서 얼마나 많은 정신병자와 극단적 선택자, 혹은 광신도를 생성했습니까. 그런 상태에서 유일한 희망인 에스퍼 집단이 인간과의 이질적인 면모를 보인다면 사회 붕괴로 이어지기 쉽습니다. 일반인들이 구성하는 사회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원시인처럼 살아야 합니다. 그걸 원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에스퍼도 결국 인간 사회가 있어야 사람답게 사니까요. 그래서 세계 각국이 에스퍼에 대해 강하게 제재하는 겁니다. 미시적으로는 억울한 점이 많고 또 점차 해결해야겠으나 거시적 관점에서는 서로 동등하게 주고받는 겁니다.”

“되게 어렵게 얘기하네.”

“개인적으로 불편이 있어도 사회 전체적으로는 서로 양해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겁니다. 거기다가 초기 에스퍼가 저지른 각종 흉악 범죄를 생각해 보세요. 역사적으로 봤을 때는 에스퍼의 자업자득인 면모도 있습니다. 물론 소령님은 흉악범이 아니라서 약간 억울하겠지만요”

“……알았어.”

수혁은 더는 말을 삼갔다.

“중장님 말씀대로 김 준위는 정치 감각이 있네요.”

가만히 듣던 비서 장교가 말을 붙였다.

“과찬이십니다.”

“가이드라서 에스퍼 쪽인가 했더니. 일반인과 에스퍼 사이를 아주 객관적으로 잘 판단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그렇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습니까?”

“원래 일반인이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거기다가…… 아닙니다.”

“그러고 보니 김 준위 가족 분들이?”

“아, 예.”

별로 좋은 화제는 아니라서 금방 입을 다물 줄 알았는데. 비서 장교는 무슨 생각인지 그 얘기를 이어갔다.

“김 준위 나이대에 그런 사람이 많죠. 저도 그렇고요.”

허심탄회하게 이어진 말이 의외였다.

“저희 부모님은 방사능 후유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신에 다발성 암이 퍼져서 아주 고통스러워 하셔서 ……돌아가실 때는 차라리 안심했습니다.”

“제 가족은 증발이었습니다.”

김윤조의 가족이 서울 사건으로 희생되었다는 사실은 수혁도 이미 알고 있다. 높은 확률로, 아니 백 퍼센트 확률로 수혁에 의해 증발한 수십만 명에 포함되었을 거다.

“장선욱, 나, 최정 외에는 아무도 몰라.”

수혁은 심나연의 말을 떠올렸다. 당연히 김윤조나 비서 장교는 사건의 진실을 모른다.

김윤조는 아니라고 했지만, 사실은 자신은 최악의 흉악범이다. 인류의 적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심나연과 최정은 사정을 참작해야 한다고 하지만 과연 김윤조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모르겠다.

죽을 방법을 다 차단하고 가이드까지 붙여 버린 덕분에 어쩔 수 없이 꾸역꾸역 살면서 게이트 청소부 역할을 해야 했다. 선택의 여지가 차단되어서 억울하다 싶다가도 김윤조를 보면 그것도 괜찮지 않나 싶다.

더불어 자신에 대한 평가가 한 단계 더 하락했다. 가족을 잃은 김윤조에게 진실을 얘기할 마음이 조금도 없는 걸 보니 양심 따위는 없는 개망나니가 맞다.

“그게 차라리 다행입니다. 후유증 환자들은 말도 못 합니다. 웬만큼 벌어서는 병원비 댈 능력도 없어서 저희 남매는 막내 여동생까지 입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군인이기도 했고 당시엔 그게 병원 치료비 버는 가장 빠른 길이니까요. 군이 이쪽으로는 복지가 좋거든요.”

“그렇습니까.”

“김 준위는 병원비 걱정도 없을 텐데 왜 입대했습니까.”

“답답해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답답해서?”

“예. 사람이 그렇게 허무하게 갈 수가 있나? 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그냥 아무런 흔적도 없이 가 버리니까요. 그게 너무 억울해서 도대체 외계인 놈이 뭔지나 보자 하고 입대했던…… 지금은 기억이 흐립니다만 아마도 그랬을 겁니다.”

“당시 그런 이유로도 많이들 입대했었죠. 실체라도 보자고. 지금은 게이트나 외계 괴물 영상 자료가 많이 풀렸지만. 당시에는 아주 소수만 볼 수 있어서 더 이해가 안 가고 억울했을 겁니다.”

“네. 당시 희생자 가족 합동 조사단에 있었는데 사고 현장 접근도 안 되었습니다. 방사능 제거 때문에 정부 계약 업체와 특수부대 일부만 출입 가능해서 그래서…… 맞습니다. 말씀을 나누다 보니 생각납니다. 사고 현장을 보고 싶어서 입대했습니다. 신병으로 실컷 구르고 나서 첫 휴가 때는 제염(除染) 작업을 끝낸 외곽 지역 일부 공개가 된 상황이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렸으면 군에서 이렇게 안 굴러도 볼 수 있었을 텐데요. 멍청했습니다.”

“원래 입대 후에 후회하죠. 입대는 쉬운데 막상 제대는 쉽지 않아서 망했죠, 저도. ”

윤조의 농담에 비서 장교도 헛웃음을 지었다.

“모두 강 소령 덕분입니다. 항상 고맙게 생각합니다.”

이런 화제에서는 되도록 빠지고 싶은데 망할 놈의 비서 새끼가 갑자기 얘기를 이쪽으로 돌렸다. 김윤조도 거들었다.

“맞습니다. 소령님이 있었으니 그나마 저라도 산 겁니다. 아니면 저희 김씨 가문의 대는 완전히 끊겼을 겁니다.”

아니 가이드가 된 시점에서 이미 대가 끊기고도 남았을 것 같지만. 농담이라도 이쪽 화제에는 전혀 끼기 싫어서 수혁은 별다른 대답 없이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우리끼리만 얘기한다고 또 섭섭하고 그러신 겁니까?”

김윤조가 헛다리를 거하게 짚었다.

“아니야.”

“그런데 왜 조용히 계십니까.”

“나는 뭐 맨날 말해야 해? 그냥 조용히 있고 싶을 때도 있지.”

“답답해도 조금만 참으십시오. 이번 일정만 잘 끝내면 이틀 정도 세종에서 놀다가 복귀해도 좋다고 중장님이 그러셨습니다.”

어느새 김윤조의 손이 수혁의 손등으로 올라왔다. 달래듯이 가볍게 두드리는 손을 슬그머니 잡았다. 아직 아침이고 다른 사람도 있기에 당연히 거절당할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김윤조는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다정한 제스처에 흔적도 없는 줄 알았던 양심이 소심하게 기지개를 켰다.

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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