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서슬 퍼런 상관의 노성에 김윤조는 쇳덩이 같은 에스퍼를 얼른 추슬렀다. 야전에서 단독으로 부상병을 이송할 때처럼 강수혁의 한쪽 팔과 한쪽 다리를 손잡이 삼아 가로로 어깨에 훌쩍 들쳐 멨다.
가이드가 아니었다면 거구의 에스퍼를 이렇게 들고는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을 거다. 하지만 자신은 세계 최고의 두뇌 성능을 자랑하는 특수 에스퍼의 역작인 인조인간인데다가 얼마 전 무림 기연 같은 직(直) 수혈을 받고 나서 근력이 엄청나게 세졌다. 덕분에 강수혁 같은 거구를 어깨에 얹고도 가볍게 계단을 오를 수 있었다.
“아줌마가 저렇게 화를 낼 줄 몰랐는데.”
계단을 오르는 중에 짐짝이 말을 걸었다. 그에 윤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천천히 말씀드리자고요.”
아무리 화해를 했다지만, 페어링 해제하겠다고 그 난리를 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연결해 달라고 하면 누가 좋다고 하겠는가. 거기다가 심 박사와 벌인 싸움은 화해도 안 했다.
“어차피 나한테 붙이려고 너 만들었는데. 원래대로 복구하면 서로 좋은 거 아냐?”
이기적인 에스퍼는 상대가 분통을 터트리는 이유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다음 계단에 막 발을 올린 김윤조는 낮은 한숨을 쉬면서 제 왼쪽 위쪽 팔뚝 근처에서 덜렁대는 대가리에 시선을 던졌다.
“솔직히 저도 화가…… 당황스럽습니다. 이렇게 쉽게 결정을 번복하실 거였으면 애초에 해제는 천천히 해도 되는 거 아니었습니까?”
“그때는 안 하고선 못 배길 것 같았어.”
조금 쭈그러들었으나 여전히 심통이 가득한 대답이었다.
“심 박사님과 싸우고 사과도 안 했잖아요.”
“우리 사이에 사과하고 뭐고가 어딨어. 그냥 그러면 그러려니 하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요. 이번에는 소령님이 너무하셨습니다. ”
“아까는 내 편 들더니. 그사이에 변하냐.”
볼멘소리에 김윤조는 속으로 탄식했다.
“아까는 아까고요. 나중에 제대로 사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페어링은 빠른 시일 내에 하기 힘들 겁니다.”
툭탁대면서 지루하도록 긴 계단을 오르고 또 올랐다. 지상에 도착했을 때는 아무리 제 강화 인간이라도 이마에 땀이 맺힐 만큼 힘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죠?”
막상 건물을 나서자 다른 문제가 닥쳤다. 장교 아파트에서 특작부 본부까지 비행해서 왔다. 그 편리한 날틀이 지금 운행 불능 상태다. 걸어가기는 너무 힘들다. 아무래도 차를 빌려야 할 것 같았다.
일단 김윤조는 무거운 짐짝을 본관 앞 기둥에 내렸다.
“차를 빌리겠습니다.”
강수혁에게 일방적으로 통보한 뒤에 손목에 달린 개인 통신기에 손을 댈 때였다.
“심 대령이랑 얘기 끝난 거야?”
저쪽에서 최정이 나타났다. 새벽에 편의점에 맥주 사러 나온 아저씨처럼 츄리닝에 맨발 슬리퍼 차림이었다.
“충성. 네. 막 연구실에서 나왔습니다.”
“웬일로 빨리…… 강 소령 왜 저러고 있어?”
고장 난 인형처럼 바닥에 퍽 퍼지르고 앉은 강수혁을 본 최정이 윤조를 향해 물었다.
“심 박사님에게 당했습니다. 전용 마취제라고 합니다.”
“저런.”
혀를 차는 최정을 향해 강수혁이 불만 어린 시선을 던졌다.
“아줌마 좀 어떻게 해 봐. 페어링 다시 하자고 했더니 난리야, 시발.”
“페어링 다시 하자고 했다고? 팔다리 안 썰리고 마취로 끝난 게 어디야. 심 대령이 많이 참았네.”
혀 차는 소리가 한층 커졌다. 강수혁이 뭐라고 툴툴대든 말든 최정은 들은 척도 안 했다.
“장교 아파트에 간 거, 중장님 귀에 벌써 들어갔다. 둘 다 호출이야.”
“귀찮게. 그런 건 그쪽에서 차단 좀 하지.”
강수혁의 대답에 최정이 조용히 얼굴을 구기면서 주먹을 치켜들었다. 하지만 본능처럼 그를 향해 시선을 던진 망나니 덕분에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냉큼 내렸다.
“흠흠. 어쨌거나 지시 하달되었고. 둘 다 얼른 준비해서 가. 헬기는 못 내줘. 차 타고 가. 운전은 직접하고. 08시까지 중장님 면전 도착.”
“예? 지금이 05시 45분인데요?”
“그러니까 지금 즉시 출발해.”
이번엔 윤조도 어안이 벙벙했다.
“전투복 차림인데요?”
“전투복이면 뭐? 그거 입고 김치찜 집도 잘도 가 놓고선. 얼른 가.”
그때 운전병이 특작부 마크가 찍힌 SUV 한 대를 몰고 왔다. 운전병은 윤조와 강수혁을 보더니 흠칫 놀랐다. 냉큼 경례를 붙이곤 스마트키를 최정에게 내밀었다. 최정은 호주머니에 찔러넣은 손을 빼지도 않고 턱짓했다.
운전병이 SUV 조수석 문을 여는 사이, 김윤조는 고장 난 강수혁을 일으켜 좌석에 앉혔다. 엉덩이를 의자 가운데 얹었는데도 더럽게 긴 다리가 차 밖으로 삐져나오다 못해 바닥까지 닿았다. 다리를 걷어 올리고 안전띠까지 꼼꼼하게 매는 정성을 본 최정이 기가 찬 듯 헛바람을 뱉었다.
운전석에 오른 윤조는 최정에게 눈인사하자마자 즉시 차를 출발시켰다. 현재 장선욱 중장은 특작부를 둘러싼 국제 분쟁과 정치 현안 때문에 국회 인근 호텔에서 머무는 중이었다. G형 게이트 발발 이전까지만 해도 국회는 서울 한복판에 있었으나, 지금은 세종에 있다.
특작부에서 세종까지 2시간은 빠듯했다. 새벽이라 통행 차량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었다. 윤조는 시원하게 가속기를 밟았다.
“씻지도 못했는데 귀찮게.”
강수혁이 빠르게 지나가는 밖을 보며 툴툴거렸다. 사실 전투복을 입고 온 이유가 저거였다. 티가 나는 일반 군복 대신 엄폐되는 전투복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윤조가 전투복을 입는 사이 강수혁은 신나게 제 숙소로 날아가 전투복을 입고 나타났다.
“샤워보다 페어링이 먼저라고 우긴 사람도 소령님입니다.”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옆을 흘끔 보자 불만이 그득한 주둥이가 쭈욱 나와 있었다.
본인이 잘생긴 줄 너무 잘 알면 재수 없기 마련이다. 하지만 반대로 잘생김을 저렇게 의식하지 않고 사는 것도 좀 별로였다. 기왕 미남으로 태어난 김에, 인류의 안구 복지를 위하여 얼굴은 좀 지켜 주면 안 될까 싶다. 웃지 않고 인상만 쓰고 다녀도 좋으니 제발 저렇게 마구잡이로 구기지만 않았으면 했다.
“저, 소령님 얼굴 좋아합니다.”
“뭐?”
“잘생겨서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얼굴을 함부로 쓰지 말고 예쁘게 유지 부탁드립니다.”
속도가 속도인지라 윤조는 시선을 계속해서 전방에 두었다. 그런데도 이쪽을 빤히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얼마나 강렬한지 얼굴이 다 따가웠다.
“제가 못 할 말 했습니까?”
“아니 뭐. 못 할 말은 아니지.”
“그런데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인형 같은 말투로 그런 말을 하니까 너무 신기하고 귀여워서.”
“아, 예. 앞으로 종종 들으실 겁니다.”
윤조는 별스럽지 않게 대꾸했다.
“또라이 새끼.”
강수혁이 방긋 웃었다. 사이드미러에 비치는 유려한 얼굴이 꼭 영화 속 한 장면 같았다.
“마취 상태만 아니었더라도 차 세우는 건데.”
아쉬움 가득한 혼잣말이 들렸다.
“그런 걸 사돈이 남 말한다고 하죠. 아쉽게 되었습니다.”
“야, 잠깐. 야, 차 세워 봐. 나 마취 풀릴 것 같아.”
재밌자고 한 농담이었는데 미친 에스퍼 놈이 별안간 온몸을 뒤틀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마취를 풀려고 발광했으나 심 박사의 마취제는 쉬이 풀릴 기미가 없었다. 그러는 동안 윤조는 유유히 가속기를 밟았다.
세종시에 들어서서야, 중장 경호팀으로부터 정확한 호텔명이 전달되었다. 어차피 미디어를 통해 국정 조사 중임이 알려졌기에 중장의 위치가 엄청난 기밀은 아니지만 기본 보안 절차였다. 호텔을 서너 군데 예약하고 그때그때 바꾼다. 호텔 내에서도 여러 층에 다양한 객실을 사전에 확보하기도 한다.
지하 주차장에 들어서자 경호팀이 대기 중이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감각은 돌아왔는데 혼자 걷긴 아직 힘들 것 같아.”
“부축해 드리죠.”
운전석에서 내린 윤조는 곧바로 조수석으로 돌아가 문을 열었다.
경호팀은 윤조의 전투복을 보고 살짝 당황했고, 뒤이어 윤조의 어깨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강수혁을 보곤 심각한 톤으로 무전을 쳤다.
“심나연 대령님이 개발한 전용 마취제인데, 지금 풀리고 있습니다.”
윤조는 눈치껏 상황을 알렸다.
“확인했습니다. 따라오십시오. 중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경호팀이 따로 확보해 둔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갔다. 도중에 다른 투숙객이나 호텔 직원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 비상계단을 이용하여 안으로 이동 후 장선욱이 머무는 호실에 도착했다. 경호팀은 문만 열었을 뿐, 안으로 들어가진 않았다.
문이 닫히고 아무도 없는 거실에 멀뚱하게 서 있을 때였다. 한쪽 문이 벌컥 열리더니 아저씨용 러닝셔츠에 무릎까지 오는 할아버지 사각팬티를 입은 장선욱이 나타났다. 그의 손에는 둘둘 만 종이 신문이 들려 있었다. 성큼성큼 다가온 장선욱이 그걸 번쩍 들어 올렸다.
뻑!
신문 방망이가 강수혁의 정수리를 타격했다.
“아 씨. 왜 머리를 때려? 기분 더럽게.”
중장 따위에 굴하지 않은 개망나니 소령이 벌컥 짜증을 냈다.
“왜 때려어? 이 망할 자식아! 안 그래도 게이트 뒷수습하느라 골이 빠개지는 중에 내가 꼭두새벽부터 미친놈들 떡방아에 아파트 무너질 것 같다는 소리를 들어야겠냐?”
열받은 장군은 망할 망나니를 다시 때리려 들었다.
턱!
전투복 일체형 장갑을 낀 손이 중장의 손목을 낚아챘다.
“뭐야?”
장선욱이 김윤조를 향해 눈을 부라렸다.
“차라리 절 때리십시오.”
똑같이 눈에 힘을 준 김윤조가 손아귀에 힘을 주면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