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죄송합니다.”
순순한 사과가 돌아왔다. 하늘 끝까지 치솟던 울분의 기둥뿌리가 석둑 썰려 버렸다. 너무 어이가 없고 어안이 벙벙했다. 슬쩍 흐르려던 눈물이 눈물샘 속으로 쑥 빨려 들어갔다.
“죄송해? 그게 다야?”
기가 막혀서 반문했다. 적어도 ‘좋아하는 새끼’라는 표현에 무슨 반응이 있어야 하지 않나?
김윤조는 그저 죄인처럼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그것도 수혁의 중심에 앉은 채로.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이쪽만 속이 탔다.
“야, 김윤조.”
“네.”
“아냐, 됐다. 내가 시발…… 인조인간 새끼를 붙잡고 뭘 하겠냐.”
열기도 팍 꺼졌다. 흉흉하게 솟던 기둥이 구멍 난 바람 인형처럼 가라앉았다. 이런 기운 빠진 사과를 듣겠다고 털어놓은 게 아니었다.
“그만 내려가지?”
“죄송합니다.”
망할 놈의 죄송, 죄송. 잘도 지껄이면서 김윤조는 시키는 대로 순순히 내려갔다. 하자고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때는 언제고. 이건 아주 엿을 먹으란 건가 뭔가.
어느새 복부가 훌쩍 벗겨져 있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서 목까지 올라간 티셔츠를 내렸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자고 저런 말도 안 통하는 차가운 깡통 새끼를 다시 본 건지 모르겠다. 최정 말대로 그냥 동료끼리 잘 지내보자고 한 게 분명했다. 직장 생활일 뿐인데 멍청이처럼 설레서 달려오긴.
“저런데 나한테 무슨 미련이 있다고.”
한심해서 진짜 죽고만 싶었다. 거친 한숨을 푹푹 쉬면서 방을 나설 때였다.
“저를 두고 하시는 말씀이시면…… 있습니다, 미련.”
뒤에서 들려오는 한마디가 수혁을 돌려세웠다. 별로 충격을 받은 건 아니었다. 이게 끝까지 사람을 가지고 노나 싶어서 부아가 치밀 뿐.
“적당히 해라.”
“아니 잠시만요. 무슨 오해를 하시는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오해는 무슨. 너는 그냥 임무를 수행한 거고, 나는 멍청하게도 다른 뜻으로 알고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한 거고. 동상이몽이 따로 없지. 그러니까 이제 깔끔하게 끝. 알겠어? 그리고 앞으로는 뭐 먹으러 가지도 말고, 말도 걸지 말고. 아니 마주쳐도 서로 모르는 척하자. 상관이랍시고 경례 안 해도 돼. 그냥 알은체하지 마.”
유치하고 못난 소리를 줄줄 늘어놓았다. 그만큼 ‘이’ 김윤조와 얽히는 건 싫었다.
이렇게 싫은 데도 며칠 지나면 또 칠렐레팔렐레하며 좋다고 주변을 뭉그적댈 거다. 자신은 답도 없는 한심한 새끼니까. 꼰대를 졸라서 어디 산간, 오지나 바다 한가운데 외딴 섬으로 장기 파견이라도 보내 달라는 편이 나았다.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수혁의 앞에 김윤조가 휙 끼어들었다.
“이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그냥 가시면 어떻게 합니까? 전에는 그래도 넘어갔지만, 두 번은 안 됩니다.”
제법 단단한 목소리였다.
“비켜.”
“못 비킵니다. 뭐 소령님만 마음 있는 줄 아십니까. 저도 마음 있습니다. 아무리 인조인간이라고 해도 결국은 ‘인간’입니다.”
상대의 언성이 높아졌다. 신경질적이진 않아도 충분히 화난 티가 났다. 이게? 싶은 때에 김윤조가 목청을 더 높였다.
“네, 사전에 제 인격 수정에 관해 미리 고지하지 않은 점, 그래서 행위 도중에 알게 한 점은 죄송합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페어링을 일방적으로 해제하는 건 너무 하셨습니다.”
“너 같으면 껍데기만 같고 속 알맹이가 완전히 다른 놈과 뒤얽힐 수 있어?”
“저는 단지 상대가 성욕을 느꼈다는 이유만으로 일방적으로 뒤얽혔는데요. 아주 처참한 방식으로 말입니다.”
되받아치는 김윤조의 눈빛은 서슬이 파랬다.
“하. 그러니까 너도 아줌마랑 똑같은 소리를 하네. 결국 내 자업자득이다? 그래서 이렇게 막 해도 될 줄 알았다? 그래 마음대로 해. 막 해. 하지만 난 더는 못하겠으니 이만 빠지겠어. 이렇게 가는 법이 어디 있냐고 따질 거면 꼰대한테 가서 따져. 널 강제로 붙인 것도 따지고 보면 꼰대고, 널 떼어 준 것도 결국 꼰대니까.”
김윤조를 툭 밀치고 베란다로 갔다. 군화에 발을 막 구겨 넣었다가 신경질이 나서 팩 차 버렸다. 베란다 벽에 부딪힌 군화를 염력으로 주워들면서 창문도 열었다. 한 발을 창턱에 걸치는 찰나였다.
“야! 강수혁!”
뒤에서 우렁찬 고함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이건 어디선가 많이 들어 본 톤이었다.
“시발! 강수혁 소령님! 멋대로 또 사람을 휘젓고 나가는 게 누군데요? 저를 인조인간이니 뭐니 하면서 욕하시는 분이, 누구보다도 저를 인조인간 취급하는 건 뭡니까? 제가 가이드가 아닌 일반 사람이었어도 이랬을 거라는 구차한 핑계는 대지 마십시오.”
“뭐라고? 너 지금 욕했냐?”
깜짝 놀라 눈이 휘둥그레졌다.
“누구는 뭐 머릿속에 임무만 있는 줄 압니까? 임무만 하는 로봇이었으면 제가 왜 아파트에 살고 연봉을 받으며 장래를 위해 저축을 하겠습니까? 솔직히 옷은 왜 입고 씻는 건 왜 하겠습니까? 그냥 세척실에서 세척하고 대충 플라스틱 포장지 휘감으면 그만인 것을.”
뭔가 폭발한 김윤조는 입을 잠시도 쉬지 않았다.
“임무만 생각하는 로봇이면 소령님이 신병 훈련에 끼어들었을 때 이미 상부에 보고해서 상황을 정리했을 겁니다. 그렇게 멍청하게 서 있다가 손가락 하나짜리도 안 되는 애송이에게 당하는 일도 없을 거고요.”
뭔가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갔다. 김윤조가 화를 내고 있다. 그것도 수혁을 강하게 규탄하면서. 강한 기시감에 심장이 날뛰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아직 안 끝났으니 이의 신청은 추후 따로 받겠습니다!”
버럭 내지르는 고함에 수혁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창턱에 걸친 발을 내리고 자세도 바로 했다.
“시작은 원치 않는 강압 명령과 그에 동반하는 폭력이었더라도, 그래도 잘해 오지 않았습니까? 불시에 나타난 F형 게이트도 잘 마무리했고요. 그 과정에 제가 크게 다치기는 했지만, 소령님이 치명타를 입는 것보다는 나았습니다.”
“그건 당연히 네가 가…….”
“가이드라서 그렇다는 얘기는 입도 뻥끗하지 마십시오!”
김윤조가 싸늘하게 노려봤다. 수혁은 열던 입을 냉큼 다물었다.
“가이드라서 한 일이 아닙니다. 가이드라면 에스퍼 보호를 최우선으로 하긴 합니다만, 솔직히 소령님이 제 보호가 필요한 인물입니까? 그리고 전시였기에 저는 다른 S급 에스퍼도 임시 서포트 중이었습니다. 안전한 둘을 팽개치고 위험한 하나를 선택하는 건 바른 전략이 아닙니다. 그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한 건, 소령님이야말로 최선의 수단이었으며, 그렇게 하는 것이 모두가 가장 안전한 길이며, 동시에 소령님이…… 후…… 단순한 도움의 부재로 아군의 최대 전력이 게이트에 허무하게 잡아 먹히는 꼴을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군인으로서 내린 판단이었습니다.”
돌리고 돌린 설명이어서 언뜻 뜯기에는 정말로 기술적인 판단이라고만 들렸다. 하지만 목소리에 실린 감정이나 자잘하게 흔들리는 동공은 다른 얘기를 했다. 특히 마지막에, 수혁이 게이트에 잡아먹히는 꼴을 면할 수 있다는 대목에서는 말하는 내용과 말하고자 하는 내용이 아예 동떨어졌다.
아무래도 앞선 이유는 대외용 같았다. 진짜는 마지막 한 줄로 들렸는데, 곧이곧대로 해석할 게 아니라 수혁이 당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고 하면 딱 맞아떨어졌다. 그러니까 전시라는 중요한 시점에 이성적 판단보다는 강수혁에 대한 사감에 따랐다는 거다.
“김윤조.”
부르는 말을 아예 무시하면서 김윤조는 제 할 말만 계속이었다.
“솔직히 제 부상 후, 항모가 연달아 피격당하지 않았다면 저는 멀쩡히 일어났을 겁니다. 이동형 인큐베이터의 손상까지 감수하고 벌일 일은 아니에요. 저도 거기까지 감수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냥 뇌진탕 정도를 생각했어요. 실체로 초반에는 뇌진탕에 가까웠습니다. 약간 심각하긴 했지만.”
벅찬 듯이 속에 든 뜨거운 김을 두 번 몰아쉰 김윤조는 좀 전보단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내뱉었다.
“저도 인간입니다. 동료를 생각하고 서포트하고, 한편으로 저도 누군가 생각해 줬으면 좋겠고 서포트해 줬으면 하고 바랍니다. 이런 당연한 얘기를 구구절절 설명해야 하는 상황조차 절망스럽습니다.”
하고픈 말을 다 한 김윤조는 괴로움으로 점철된 얼굴을 떨구었다. 그러곤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흘러내리는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듯이 붙잡았다.
수혁은 숨 쉬는 것도 잊은 채 멍하게 상대를 봤다.
김윤조가 이렇게 많은 번민을 알고 괴로워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행동이 단순하고 표현이 단조롭기에 속도 그런 줄로만 알았다.
인조인간이라고 욕하면서 정작 인조인간 취급은 한 건 자신이라고 쏘아붙였다.
맞는 얘기다. 변명의 여지가 없다. 자신은 너무나도 이기적이고 한심해서 눈앞에 있는 상대의 입장을 전혀 헤아려 보지 못했다. 아니 헤아릴 생각도 안 했다. 왜 알아듣기 쉽게 알려 주지 않느냐고 투정만 부렸다.
크나큰 오해와 그로 인한 큰 실수를 깨달은 수혁이 고개를 떨군 김윤조에게 가만히 다가가 섰다. 그러곤 김윤조가 쏟아낸 모든 원망을 한 문장으로 축약했다.
“내가 네 생각을 해 줬으면 좋겠어?”
“네.”
풀이 죽은 대답이 돌아왔다.
“어떻게 생각하면 되는데?”
“좀 그러니까…….”
우물거리며 말을 이으려는 김윤조를 말렸다.
“아주 쉽게 간결하게 설명해 봐. 돌리지 말고. 기왕이면 한 단어면 좋겠어. 앞으로 뭐가 되어 달라는 것 같은.”
“뭐가 되어 달라고요?”
“그래. 내가 너의 뭐가 되면 좋겠어?”
김윤조가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 소리칠 때처럼 딱딱한 표정은 아니었다. 약간 난처한 기색으로 그는 수혁의 질문을 조용히 곱씹었다.
애인. 애인이다. 김윤조. 힘내라. 애인이야. 애인 외에는 없어. 연두부, 열심히 생각해서 애인을 외치는 거다.
수혁은 텔레파시 능력이 없는 점이 못내 원통했다.
쿵쿵쿵쿵.
심장 소리가 이쪽, 저쪽에서 난리였다.
잠시 뒤 김윤조가 결심한 듯 눈을 바로 떴다. 수혁은 오로지 김윤조의 입에만 집중했다.
“저는 소령님이 제…….”
애인이야. 애인.
“배우자가 되면 좋겠습니다.”
“망할! 이 멍청아! 그게 아니라 애인이라고 해야지! ……잠깐 뭐?”
말랑말랑하던 연두부는 별안간 어디로 사라지고 대신에 각진 콘크리트 벽돌로 변한 상대가 수혁의 손목을 턱 잡았다.
“이혼 취소하고 저랑 재결합하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