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그냥 한 말인데 김윤조가 세상 불쌍한 시선으로 수혁을 빤히 응시했다.
“크흠.”
목을 다듬은 후에 수혁은 묵묵히 차려진 음식을 먹었다. 제가 한 음식보다 짜고 맵긴 해도 얕은 접시로 떠먹는 음식 맛은 각별했다.
김윤조는 등갈비를 계속해서 집어 수혁에게 넘겼다.
“많이 드십시오.”
“알아서 잘 먹고 있어. 너는 안 먹어?”
“먹고 있습니다.”
김윤조는 제가 말끔하게 해치운 등갈비 뼈를 보여 줬다. 대여섯 대 정도 되었다. 밥도 한 공기 비웠다. 수혁 앞에는 등갈비 뼈가 산처럼 쌓였다. 빈 밥그릇도 일곱 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순식간에 냄비 하나가 비고 다른 냄비마저 반쯤 비었다. 남은 건 빠르게 사라지는 중이었다. 그래도 배가 찰 기미가 없었다. 일주일씩 굶어서 그런지 전신의 세포가 걸신들린 듯 에너지를 쭉쭉 흡수했다.
더 시킬까 잠시 고민하는 수혁에게 김윤조가 다른 제안을 했다.
“볶음밥 몇 개 드실 겁니까.”
아! 볶음밥! 그렇지 않아도 다른 테이블에서 솔솔 풍기는 참기름 냄새가 궁금하던 참이었다.
“많이.”
“사장님, 여기 볶음밥 다섯 개요!”
우렁찬 외침에 식당이 다시 술렁거렸다.
“에스퍼가 많이 먹긴 많이 먹는구나.”
“먹방 해도 되겠다.”
“저렇게 먹는데 배가 하나도 안 나왔어. 부럽다.”
“밥을 먹는 건 사람인데 양이 사람이 아닌데.”
그러든가 말든가 이제는 다른 사람 얘기는 들리지도 않는다.
묵은지에 고소한 참기름을 듬뿍 넣은 볶음밥 한 냄비를 바닥까지 싹싹 긁어서 해치웠다. 그런데 뭔가 아쉬웠다. 입을 닦는 사이에 이번에도 김윤조가 먼저 얘기를 꺼냈다.
“아이스크림 먹으러 갈까요?”
“아이스크림?”
“예. 원래 짜고 매운 거 먹은 후에는 아이스크림입니다. 민법에 쓰여 있어요.”
명백한 농담인데 이상하게 설득력이 강했다.
김윤조는 대장처럼 앞장섰다. 계산대에서 개인 통신기로 계산을 하는 사이에 큰 장사를 한 사장이 웃으며 사담을 건넸다.
“술도 한 잔 안 하시고 어쩜 이렇게 잘 드셔? 에스퍼라서 그런가? 볶음밥은 서비스로 했어요.”
“감사합니다.”
김윤조가 인사하자 사장은 대뜸 매직 펜과 큰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둘 다 사인 한 장만 해 주고 가요.”
서비스는 역시 공짜가 아니었다.
“저희가요?”
“강수혁 소령님이라면 엄청나게 유명하시잖아.”
둘 다라고 했으나 사장이 노리는 건 수혁의 사인이었다. 사장이 스케치북을 펴고 김윤조가 매직 뚜껑을 열어 수혁에게 건넸다.
“이런 거 해 본 적이 없는데.”
“어머, 그럼 우리 집이 처음이야? 완전 영광이에요.”
사장이 두 손 엄지를 척 치켜들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뭘 어떻게 할지 몰라 망설이는 수혁을 김윤조가 코치했다.
“이름 크게 쓰시고 오늘 날짜, 그리고 ‘김치찜 대박! 잘 먹고 갑니다.’ 이렇게 쓰시면 됩니다.”
시키는 대로 해서 넘기자 사장이 뛸 듯이 좋아했다. 김윤조는 수혁의 사인 밑에 ‘저도 같이 다녀갑니다.’라는 말과 함께 제 이름을 작게 적었다.
다음에도 서비스 팍팍 줄 테니 꼭 오고 또 에스퍼 동료들 데리고 오면 더 좋다는 선심과 장사 욕심이 반반 섞인 주인장의 인사를 뒤로하고 지프로 돌아왔다.
능수능란하게 차를 뺀 김윤조가 수혁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앞치마 이제 벗으셔도 됩니다.”
깜빡했다. 수혁은 얼른 부직포를 당겨 벗었다. 머쓱함을 감추려 괜히 말을 돌렸다.
“아이스크림 가게는 어디야?”
“좀 더 가야 있습니다.”
“혹시 거기야? 숫자.”
“네.”
저도 모르게 웃을 뻔했다. 수혁은 일부러 고개를 바깥쪽으로 돌리면서 턱을 괴는 척 입매를 가렸다. 한 번쯤 가 보고 싶었던 가게였다. 다만 그럴 용기가 없었을 뿐.
“처음이시죠?”
“아이스크림 가게 같은 걸 내가 왜 가냐? 애도 아니고.”
설레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그럼 가지 말까요?”
순간 수혁은 고개를 운전석 쪽으로 홱 돌렸다.
“아니. 이미 가는 중인데 뭘 또 안 가.”
다소 성급한 어조로 따지는 수혁을 향해 김윤조가 눈을 살짝 접으며 웃었다. 놀린 거였다.
“망할 새끼.”
반사적으로 툴툴대긴 했다. 하지만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바람에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눈웃음치는 김윤조의 모습은 심장에 무척 해로웠다. 그렇지 않아도 신나서 펄떡이던 심장이 숫제 갈비뼈를 부술 기세였다. 더불어 하체에도 힘이 쏠렸다.
페어링을 해제했는데 이렇게 의식하고 두근거리는 건 반칙이다. 금단 증상이 있다면 그에 대한 치료와 보상을 요구해야 한다. 한편으로 궁금하기도 했다. 김윤조에게도 페어링 해체 후 특별한 증상이 있는지.
“괜찮냐?”
“뭐가 말씀입니까?”
“페어링 해제하고 말이야. 특별한 문제 같은 건 없냐고.”
별일 아닌 것처럼 물었다. 하지만 심장은 이미 폭주 직전이었다. 시선의 떨림을 감출 길이 없어 기를 쓰고 바깥쪽을 쳐다봤다.
“신체적 후유증 말씀이시면 없습니다.”
“다행이네.”
뭔가 이상이 있길 바란 건 아니었다. 페어링 해제도 수혁 자신이 먼저 요구한 거고, 문제가 없다면 좋은 거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가슴 한구석에 묘한 아쉬움이 남았다.
“소령님은요?”
“응?”
“소령님은 문제없으십니까?”
“나야 뭐…… 오히려 후련하지. 애초에 원해서 페어링한 것도 아니고.”
그게 맞다. 후련해야 한다. 하지만 정말로 후련한가? 아니면 자기 세뇌인가. 아무래도 후자에 무게추가 기울어졌다. 그래도 수혁은 제 거짓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러십니까. 다행입니다.”
어쩐지 못다 한 인사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다. 그런 걸 말로 하는 성격이 못 되는데 안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동안 내게 맞추느라 고생했어.”
“별말씀을요. 임무인데요.”
특별한 감정이 담기지 않은 대답이 가볍게 되돌아왔다. 한창 두근거리던 심장에 별안간 날카로운 가시가 푹 박혔다.
임무였구나. 그러니까 페어링 해제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은 거다. 시작은 족쇄에 강압적 명령이었더라도 결국엔 사적인 뭔가가 된 건 수혁뿐인 듯했다.
‘역시 인형이야. 인형한테 휘둘렸어.’
콧등이 시큰거렸다.
아이스크림이고 나발이고 먹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막 차를 부대로 돌리라고 하려던 참이었다. 속도를 줄이던 지프가 길가에 섰다.
“여깁니다.”
어느새 분홍색으로 치장된 가게 앞이었다. 아이스크림과 자존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수혁에게 김윤조가 무단 정차이니 조수석에 앉아 있으라며 물었다.
“원하시는 맛 있습니까?”
욕망이 자존심을 후려치며 하는 대답.
“민트 초코.”
알겠다며 김윤조가 내렸다.
통유리창을 통해 김윤조의 뒷모습이 보였다. 흰색 전투복을 입고 아이스크림을 고르는 남자는 아기자기한 장식으로 가득 찬 가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심지어 컸다.
평소 단둘이 아주 있어서 몰랐는데 김윤조는 일반인에 비하면 훤칠하다 싶을 만큼 키도 크고 외모도 단정했다. 몸매를 드러내는 전투복을 입고 있으니 더욱 그래 보이기도 했다.
척 보기에도 김윤조의 얼굴을 무척이나 의식하는 젊은 직원이 작은 주걱을 들고 아이스크림을 세 스쿱 떴다. 계산하고 곧장 차로 돌아온 김윤조는 분홍색 종이봉투를 수혁에게 건넸다.
좁은 2차선 국도에서 능숙하게 차를 돌린 김윤조는 잠시 달려 인근에 있는 한적한 도로변에 차를 세웠다. 시동을 끄는 사이 수혁이 먼저 아이스크림 통을 꺼내 열었다.
동그란 종이통 안에 초콜릿 볼이 박힌 연한 노란색, 짙은 빨간색 잼이 든 분홍색, 그리고 초콜릿과 뒤얽힌 연한 초록색 아이스크림이 들어 있었다.
손가락보다 작은 분홍색 스푼을 들고 초록색 아이스크림부터 듬뿍 떠서 입에 넣었다.
“웁.”
혓바닥 위로 치약 맛이 퍼졌다.
청각, 후각이 발달한 만큼 미각도 섬세했다. 낯선 맛이 가져오는 충격은 일반인의 서너 배 이상이었다. 미간에 힘이 들어가고 눈가가 파들파들 떨렸다.
막 다른 아이스크림을 떠서 먹던 김윤조가 수혁의 안면 변화를 눈치채곤 머리를 살짝 기울였다.
“왜 그러십니까. 혹시 민트 초코 처음 드셔 보세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시키신 줄 알았습니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궁금해서 시키셨군요.”
수혁의 고개가 다시 위아래로 움직였다.
“굳이 먹지 말고 뱉으세요.”
김윤조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수혁은 조수석 쪽 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입에 든 오물을 뱉었다. 잔뜩 고인 침을 연거푸 뱉고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너무 충격적인 맛이라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아니 무슨 아이스크림 맛이 이 지랄이야? 이걸 시발 맛있게 먹는 미친놈이 있다고? TV에 나오는 놈들 싹 다 사기죄로 고소해야 해!”
버럭 화를 내는 수혁을 보며 김윤조가 피식 웃었다.
“보기와 달리 은근히 귀여운 면모가 있으십니다.”
“뭐? 지금 놀리는 거야?”
“아닙니다. 진심이에요. 귀엽습니다.”
김윤조는 정말로 즐거운 듯이 재차 강조했다. 아무렇지 않은 태도에 도리어 수혁이 당황했다.
“상관한테 귀엽다는 소리나 하고. 건방지게.”
“동료이자 전 숙소 동기에게 한 말입니다.”
시원스레 돌아오는 대답에 폐마저 펄렁댔다.
인격을 재조정한 김윤조는 기계처럼 예의 바른 태도를 유지하면서도 할 말은 꼬박꼬박 다 한다.
왜 굶고 다니냐고 잔소리하면서 밥부터 먹자고 마구 끌고 오지 않나, 비행은 생각하지도 말라며 단칼에 긋지를 않나. 상관을 상대로 너무 편안하게 귀엽다며 웃는다. 정중한데 묘하게 성질머리가 있다. 은연히 풍기는 묘한 깡다구가 꼭 예전의 연두부 같았다.
인격을 수정해도 본성은 변하지 않는 걸까.
어느새 차가 둘이 함께 사용하던 주택 앞에 섰다. 늘 그렇듯 대충 열어 둔 대문 사이로 망가진 침대 파편이 보였다.
“침대와 이층 창문은 왜 저 지경입니까?”
“인테리어 새로 하려고.”
누가 봐도 성질나서 박살 낸 건데도 김윤조는 그렇냐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부분은 또 전과 너무 다르다. 갈피를 잡기 힘들었다.
수혁이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김윤조는 운전석에 앉은 채였다. 여기서 헤어지는 모양이었다. 그게 당연한 데도 등신처럼 아쉬웠다. 시원하게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잠시 미적거리다가 인사를 건넸다.
“밥 잘 먹었다. 아이스크림도.”
“저야말로 도와주시고 양말도 챙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뭐 대단한 일이라고.”
뭔가 말을 하고 싶은데 뭘 더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괜히 서성이는 것도 이상해서 수혁은 잘 가라는 턱짓을 하고 마지못해 돌아섰다. 그때였다.
“저, 소령님.”
“응?”
그렇지 않아도 떨어지지 않던 발걸음이었다. 수혁은 기다렸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이쪽보다 반 박자 늦게 고개를 돌린 김윤조는 수혁을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괜찮으시면 다음번에 삼겹살에 소주 어떻습니까?”
운전대를 쥔 상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전투복 장갑 위로 손마디가 툭툭 불거졌다.
“어? 어어.”
“감사합니다! 그럼 평안한 저녁 되십시오!”
우렁찬 인사와 함께 김윤조는 미친 드래프트 솜씨를 발휘하며 부리나케 사라졌다. 따라잡으려면 얼마든지 따라잡을 수 있는데 수혁도 스턴이 걸린 바람에 그러질 못했다.
지프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고 나중에는 다른 특작부 소음과 뒤섞여 구분이 안 될 때까지 수혁은 대문에 멍하니 서 있었다.
“이…… 이거 혹시?”
데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