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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02화 (179/256)

102화

“소령님?”

부르는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제 말씀 들으셨습니까.”

정신을 딴 데 판 걸 귀신같이 알아챈 놈은 굳이 확인까지 했다.

“들었어. 그러니까 저 새끼가 꼰대 대마왕 자식이니까 적당히 하라는 거잖아.”

“……뭐 틀린 말은 아닙니다.”

김윤조는 잔소리 폭탄을 터트리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입을 다물고 뒤로 물러났다. 공손한 태도가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다. 하지만 이미 페어링도 제거한 마당에 일일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고 치부했다.

“어이, 썩은 호박.”

“네, 네네? 저요?”

수혁이 고개를 끄덕이자 고진수가 삐질거렸다.

“훈련 빨리 끝내고 싶어?”

“아, 그게.”

처음부터 못생긴 놈의 대답을 들을 심산은 아니었다. 수혁은 한껏 물러난 다른 신병 무리를 돌아보았다.

“다른 사람은 어때, 다들 빨리 끝내고 싶지?”

다들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꾹 다물고 눈깔만 굴려 댔다.

“끝내고 싶다고? 잘 알겠어. 훈련 같은 거 솔직히 재미없잖아. 그런데 군대라는 게 말이야, 하기 싫어도 해야 할 때가 있거든? 나도 시발 좆나 하기 싫은 프로젝트 테스터가 돼서 의미 없는 개고생을 했지 뭐야.”

주변을 삥 훑던 수혁의 눈길은 마지막으로 무표정하게 서 있는 인형 새끼를 향했다. 수혁이 날 선 비난을 던지는데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마음에 안 든다.

불쾌한 중에도 무시하기 어려운 존재감이 전신을 압박했다. 아예 안 볼 때는 그럭저럭 괜찮았는데 얼굴을 마주하고 나니까 내재한 줄도 몰랐던 갈증과 욕망이 마구 솟았다. 뺨이 실룩이고 주먹이 말렸으며, 가랑이 사이에 은은한 긴장이 감돌았다.

‘시발. 금단 증상이 있다고는 안 했잖아, 망할 아줌마야.’

명치께가 들떴다.

원치 않은 긴장감을 해소하는 덴 역시 몸 운동이 최고다. 그중에서 두꺼운 흰 포장지를 훌러덩 벗겨 말랑말랑 쫀득한 살덩이를 알뜰살뜰 발라먹는 운동이…… 아, 정신 차려.

“너희들 다 덤벼.”

“예?”

“무슨 수단, 어떤 방법을 쓰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내 몸에 어떤 수단으로든 터치 혹은 타격할 수 있다면 전체 바로 훈련 수료, 즉시 임관한다. 소령으로서 보장하지.”

수혁의 선언에 모두 어리둥절한 채로 서로를 돌아봤다. 그때 김윤조가 나섰다.

“소령님, 그건 곤란합니다.”

“뭐가 곤란해? 갓 입대한 상태로 트리플 S급에 어떤 방식으로든 타격을 줄 수 있는 천재가 신병 훈련이 왜 필요해? 바로 밥풀 달고 에스퍼답게 교육 시켜야지.”

막아서는 김윤조를 향해 대꾸하면서 수혁은 ‘에스퍼답게’ 라는 말에 특히 강세를 주었다.

“아, 혹시? 네. 알겠습니다.”

역시 김윤조는 눈치가 있었다. 그는 썩은 도라지 새끼가 들고 있는 카메라를 의식하면서 뒤로 물러났다.

“조건은 직접 터치든, 원격 터치든. 너희들이 내 몸에 닿으면 돼. 능력을 맘껏 써도 좋고 눈에 흙 뿌리는 짓도 무방. 팀 공격은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이상, 질문 있나? 있으면 일기장에 써.”

수혁이 조건을 재확인하는 동안 누군가 손을 들었다. 긴 머리를 질끈 묶은 여자애였다.

“기권해도 돼요? 저는 그냥 신병 훈련받고 싶어요.”

“저도요.”

귀찮게 다 덤비라고 하고 싶은데 김윤조가 재빠르게 나섰다

“가능합니다. 기권하실 분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열 명 남짓이 빠졌다. 대부분 여자인데 남자애도 서넛 있었다. 여자애들은 대부분 텔레패서로 추정되고 남자애들은 염력이 아닌 특수 능력자로 보였다.

덤벼 보겠다고 남은 놈들은 하나 같이 자유분방하게 생겨 처먹은 산돼지 새끼들이었다. 염력 꽤나 쓴다고 자부하는지 벌써 돌멩이를 띄우는 놈이 여럿이었다.

‘멍청한 새끼들.’

수혁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하면서 속으로 마음껏 비웃었다. 여기가 전장이었다면 살아남는 놈은 기권한 쪽이다. 그들은 본인의 힘과 상대의 힘의 격차를 파악하고 회피 혹은 후퇴를 선택했다. 훈련을 통한 재정비를 마치고 제대로 덤빌 수 있을 때까지 괜한 짓거리는 피하는 현명한 판단이었다.

눈앞에 있는 놈들은 정확하게 반대로, 제 알량한 능력과 더불어 숫자에 승산을 걸었다. 숫자가 백이든 천이든 강수혁에게는 전혀 의미 없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이놈들의 패착이었다.

“준비되었습니까?”

김윤조가 심판으로 나섰다. 증거 녹화는 썩은 도라지 새끼가 맡았다. 썩은 호박 새끼는 의외로 후방으로 빠졌다.

첫눈에 쫄았던 만큼 놈은 수혁과의 격차를 본능적으로 알아냈다. 이 중에서는 그나마 실력이 있는 놈이었다. 사실 기권 얘기가 나왔을 때 놈은 누구보다 먼저 손을 들려고 했다. 기권하지 못한 건 수혁이 능력으로 손을 못 들게 막았기 때문이었다.

“공격 개시!”

김윤조가 선언하자마자 사방에서 하찮은 돌덩이들이 날아왔다. 그것들은 아까처럼 공중에서 멈췄다.

“헉!”

누군가 헛바람을 들이킴과 동시에 돌멩이가 정확하게 날아온 방향으로 되돌아갔다.

퍽! 딱!

“앗!”

“으악!”

대부분 처맞고 주저앉았으나 반사신경이 빠른 놈 몇은 얼른 엎드려 피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혁이 날린 돌을 다시 잡아챈 놈은 아무도 없었다. 그 부분이 아마추어였다.

“뭐야, 날아오는 돌도 못 잡아? 요즘 신병은 에스퍼 학교에서 뭐 배워? 나 때는 날아오는 총알 정도는 잡아야 졸업시켜 줬는데 말이야. 유치원부터 다시 다녀야 하는 거 아냐?”

수혁은 애초에 학교에 입학한 적도 없지만, 뭐 입대 동기랍시고 친한 척하는 에스퍼 새끼들이 그런 말을 하곤 했다.

돌에 맞은 놈 몇이 또 손을 들었다.

“기권하고 싶은데요.”

“안 돼.”

수혁이 단박에 거절했다. 이번에는 김윤조도 나서지 않았다.

“왜요?”

“왜요라니? 여기가 무슨 유치원이야? 여긴 군대야, 이 정신 나간 새끼야. 그것도 대(對)게이트를 주목적으로 하는 특수작전사령부대! 너희들 에스퍼고. 게이트 상대로 몸빵 해야 하는 에스퍼! 게이트 터졌는데 손들고 기권하겠다고 하면 괴물 새끼가 아~ 그러세요~ 이럴 것 같아? 정신 차려, 망할 애새끼들아. 죽도록 덤벼. 안 덤비면 내가 쳐들어간다.”

수혁의 호통에 놈들이 사색이 되었다. 반대로 기권한 놈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후 훈련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일부는 악으로 깡으로 덤볐으나 수혁에겐 털끝 하나 닿지 못하고 도리어 날린 돌에 두들겨 맞기만 했다. 어떤 놈들은 울면서 도망가다가 수혁의 염력에 잡혀서 땅바닥에 처박혔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놈은 수혁이 한 발짝 내디디며 위협하자 눈을 감고 마구잡이로 발광하다가 저들끼리 치고 박고 난리였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대부분이 전투 불능 상태에 빠졌다. 실상 5분이나 걸린 점이 강수혁이 얼마나 부드럽고 상냥하게 대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아니 수료시켜 준대도 이거밖에 못해? 더 해봐.”

수혁이 도발했다. 그러나 만신창이가 된 놈들은 멍든 부위를 주무르면서 뒤로 슬슬 빠졌다. 기가 팍 죽어서는 수혁의 눈을 피했다.

“밥풀 붙으면 오늘 바로 전신 골절 체험할 수 있는데 말이지. 에스퍼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아무래도 맷집을 무시할 수 없거든. 많이 부러지고 붙어야 뼈 튼튼 나라 튼튼하지. 어설픈 에스퍼에게 당하면 괜히 장기가 상한단 말이야. 나처럼 뼈만 딱 쪼갤 수 있는 사람이 의욕이 있을 때 체험해야 후유증 없이 잘 나을 수 있는데 말이야.”

그제야 수혁이 한 제안의 진의를 안 신병들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신병 훈련이 지겨운 사람은 지금 말해. 대결 조건 빼고 바로 소위 임관시켜 줄게. 곧 소위님이 되실 에스퍼님들이신데 고작 준위인 가이드가 하는 어린이 맞춤 훈련, 지겹고 재미없잖아. 에스퍼는 화끈하게 에스퍼끼리 어울려야지. 어때? 나는 에스퍼끼리 훈련하기 찬성!”

누구 하나 나서는 놈이 없었다. 다들 얼어붙은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때 상냥한 어린이집 선생님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제게 신병 교육을 받고 싶으신 분은 이쪽으로 오십시오.”

버릇없던 놈들이 갑자기 신병 교육이 너무 하고 싶어졌는지 김윤조 곁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심지어 썩은 호박이 제일 먼저 뛰어갔다.

“신병을 상대로 학대야, 이거! 협박이잖아!”

이세명이 침 튀기며 날뛰었다. 그나마 눈치가 있는 놈의 사촌 동생은 동기들 사이에 얌전히 찌그러져 있었다. 멍청함이 집안 내력은 아닌가?

“이거 바로 인권위에 제소할 거야! 각오해!”

수혁은 어이가 없다 못해 신기할 지경이었다.

“이 새끼는 뭘 처먹고 이렇게 간땡이가 부었을까?”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은 채로 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 놈은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이내 돌부리에 걸려 엉덩방아를 찧었다. 카메라 겸용 통신기기가 바닥에 뒹굴었다.

콰직!

수혁의 군홧발이 통신기기를 완전히 으깨 버렸다.

“어라? 실수.”

“거, 거짓말하지 마! 일부러 밟았잖아!”

이세명이 벌벌 떨면서도 바락바락 대들었다.

“아니 일부러 밟을 거면 네 허벅다리를 밟지 아깝게 기계를 왜 박살 내. 이것도 군 자산인데.”

“지금 위, 위협하는 거야? 이거 협박이야! 너희들 다 봤지? 봤지? 내 다리 박살 낸다고 협박하는 거? 야! 김 준위, 너도 봤지?!”

이세명이 사방을 돌아보면서 짖어 댔다.

“아니 근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상관한테 자꾸 반말한다? 야, 너 대위라며? 뭘 믿고 소령한테 나대는데?”

카메라를 박살 낸 군홧발이 덜덜 떠는 놈의 다리를 툭툭 쳤다.

“히익! 너, 내, 내가 누군지 알아……요? 우리 아버지 여당 대표거든……요! 유력 대선 주자라고! 나를 건드리고 네가 무사할 줄 알아……요?”

“무사하지 못할 건 뭔데? 나 상대로 한국군 전력을 다해도 승산이 50퍼센트가 안 된다는 거 알고 지랄하는 거지? 여당 대표면 뭐. 게이트 터지면 네 애비가 나서서 외계 괴물 상대로 정치 협상이라도 할 거래? 대선 주자면 뭐 용가리 통뼈라도 되시나?”

수혁이 손을 확 들자 놈이 대가리를 얼른 땅바닥에 처박았다. 머리를 감싸고 덜덜 떠는 꼴에 헛웃음이 터졌다.

“소령님.”

김윤조가 고개를 저었다. 사고 치지 말랍신다.

수혁은 얼굴을 구기면서 몸을 세우고 뒤로 물러났다.

“두, 두고 보자!”

“반말!”

“……요!”

이세명은 아동 만화 속 유치하고 지질한 빌런처럼 외치면서 부리나케 도망갔다.

이후 훈련은 별문제 없이 진행되었다.

공중 침대에 누운 듯 한가롭게 둥둥 떠 있는 수혁을 의식한 신병들이 때때로 실수를 범하는 것 외에는 기초 체력 훈련을 잘 따랐고 각종 군대 상식도 잘 학습하였다. 수혁의 힘을 얼추 감지한 썩은 호박은 그중에서도 아주 모범생이었다.

훈련을 파하고 녹초가 된 신병들은 열을 맞춰 가볍게 뛰면서 본부 숙소로 귀환했다. 아무래도 생활관 조교까지 김윤조가 할 순 없었다. 생활관을 담당한 일반인 조교를 본 신병들은 10년 만에 고향에 돌아온 탕아처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조교를 뒤따랐다. 그때까지 수혁은 공중 침대에 누운 채로 둥둥 따라다녔다.

신병을 인계하고 나온 김윤조가 수혁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늘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 뭐.”

누워서 감사받기 뭐해서 바닥에 얌전히 착지했다. 분위기가 갑자기 쑥쑥해졌다.

“그런데 왜 오셨습니까?”

김윤조는 가벼운 열중쉬어 자세를 취했다. 뭔가 벽이 생긴 것 같았다. 서운한 것도 잠시, 수혁은 내내 바지 주머니에 있던 물건을 꺼냈다.

“이거 놓고 갔더라.”

“이게 뭡니까?”

“양말이잖아.”

수혁이 대답하자 김윤조는 약간 당황한 듯 보였다.

“압니다. 그런데 양말 하나 때문에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엄청 중요한 물건이라며. 일부러 챙겼는데 진짜 쌀쌀맞네.”

“예? 이게요?”

윤조는 양말을 받아 자세히 들여다봤다. 어색하게 매만지는 손길에 그에 수혁은 불현듯 물었다.

“너 혹시 기억 없냐?”

“잘…… 모르겠습니다.”

이번엔 수혁이 당황했다. 애지중지하던 물건의 존재까지 잊었을 줄은 몰랐다.

“제가 많이 아꼈습니까?”

“어…… 어. 그랬던 것 같아. 이사할 때 제일 먼저 챙겼어. 이게 낡은 종이가방에 들어 있었는데 말이야. 가방은 어쩌다가 찢어져서.”

수혁이 이런저런 변명을 주워섬기는 사이 곰곰이 생각하던 윤조는 이윽고 차분하게 물었다.

“가방은 기억이 납니다만 양말이 들었을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유품입니까?”

“그것까진…… 나도 모르겠어.”

대답하는 수혁의 목소리가 깊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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