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연두부는 특작부 본부 인근에 없었다. 별다른 확인이 없어도 그냥 본부를 둘러본 느낌이 그랬다. 숙소는 원래 쓰던 장교 아파트였다. 동호수를 알기에 찾아가면 되는데 그러기 곤란했다.
얌전하게 지내면서 시키는 일은 잘하겠다는 굴욕적인 약속을 망할 꼰대와 했다. 얌전하게 지낸다는 조건은 여러 가지를 내포하는데 뒷산이 무너진 이후 갓 복구 공사가 끝난 장교 아파트에 접근은 하지 않는 것도 포함이었다.
아줌마에게 넘겨주고 대신 전달하라고 부탁하려 했다. 날아가면 그만인 것을 왠지 그러기 싫어서 미적미적 걸었다.
막 본부 초입에 들어섰는데 웬 군용 지프가 수혁이 있는 방향으로 돌진했다. 뻔히 알아서 잘 지나갈 수 있는 넓은 도로인데 조수석에 앉은 새끼가 수혁을 향해 삿대질했다.
“야, 이 새끼야, 길 막지 말고 비켜!”
흙먼지를 일으키며 휑 지나가는 지프 뒤꽁무니를 보며 수혁은 할 말을 잃었다.
검은 티셔츠에 별 표식 없는 군복 바지 차림이긴 했다. 하지만 특작부에서 자신을 못 알아보는 새끼가 있다고? 최근 새로 특작부에 들어온 놈인가……. 하지만 특작부 근무자는 에스퍼 얼굴을 필수적으로 외워야 한다. 저건 그냥 개념이 없는 거다.
관자놀이에 옅은 긴장감이 돌았다. 저 새끼를 잡아 족치고 싶었다. 하지만 꼰대와의 약속을 생각하며 욕망을 간신히 억눌렀다. 대신에 어금니를 갈면서 본부로 향했다.
본부 정문에 막 들어서는데 이번에는 다른 놈이 달려들어 수혁에게 부딪쳤다. 욕지기가 치밀어 막 입을 여는 순간이었다.
“야 이 새끼야! 눈깔 제대로 뜨고 다녀.”
적반하장으로 돌아온 호통에 수혁은 그제야 상대가 심 박사임을 알아챘다. 떨어뜨린 패드를 주워든 심 박사는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네가 웬일로 문으로 걸어 다니냐?”
마침 잘되었다. 수혁은 바지 주머니에서 양말을 꺼내 내밀었다. 심 박사가 말없이 ‘웬 양말?’이라고 물었다.
“그 새끼 놓고 간 거. 아줌마가 대신 전해 줘.”
“한가한 네가 갖다주면 되잖아.”
“장교 아파트 접근 금지야.”
“김윤조 지금 외곽 훈련장에 있어.”
그러곤 심 박사는 바쁜 걸음으로 홱 가 버렸다.
수혁은 양말을 든 채로 잠시 서 있다가 느릿느릿 그걸 다시 바지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귀찮게. 굳이 내가 직접 거기까지 가야 해?”
의도는 분명히 씹어 뱉는 거였는데 이상하게 목소리가 약간 들떴다. 주변에서 누가 보거나 듣지는 않았는지 둘러봤다. 헛기침으로 목을 정리한 후 정말로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깃털처럼 가볍게 옮겼다.
일부러 최대한 천천히 갔다. 주먹을 쥐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심호흡을 거듭했지만, 괜히 빨라지는 맥박을 진정시키기는 역부족이었다.
그냥 두고 간 물건을 전해 주기만 하면 된다. 뭣 하면 인근에 가서 양말만 날려 보내도 되고. 그런데도 이상하게 뒷덜미가 뜨끈하고 광대 언저리가 경직된다. 열흘 남짓 동안 안 봐서 그런가. 갑자기 얼굴도 되게 보고 싶어진다.
‘답도 없는 새끼.’
스스로 욕하면서 수혁은 훈련장 인근에 도착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지프였다. 운전석 문에 기대어 담배를 맛있게 빨던 놈이 수혁을 발견하고 기겁했다.
“추, 충성!”
파랗게 질린 낯은 좀 전에 봤던 그 운전병이었다. 옆에 있던 싸가지는 없었다. 그냥 시선만 옮겼을 뿐인데 겁에 질린 상대가 빠르게 태우고 온 놈이 누군지 보고했다.
“이세명 대위입니다.”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어디서 들어 봤지?
수혁은 고개를 갸웃대면서 지프를 지나 훈련장으로 향했다.
딱히 요란한 등장은 아니었어도 그렇다고 기척을 죽이지도 않았다. 자연스럽게 알아볼 것을 예상하며 훈련장에 들어섰다. 심장이 괜히 두근거렸다.
촌스러운 주황색 체육복을 입은 애송이 수십 명이 우글거렸다. 수혁이 그들 뒤로 바짝 붙을 때까지 아무도 수혁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반 원형으로 선 그들의 이목은 맨바닥서 펼쳐진 난투극에 집중되어 있었다.
빡! 퍽!
신병이 아니라 어디 난전(亂廛)에서 지게꾼으로 한 십 년은 굴렀을 법한 노안을 한 놈이 날뛰고 있었다. 바닥에 박혀 있던 짱돌이 사방으로 날아다니고 둔탁한 몸이 가볍게 떠올랐다가 아래로 내리찍었다.
쿵!
놈이 밟은 자리에 얇은 먼지구름이 감돌았다.
상대는 흰 전투복을 입은 김윤조였다. 힘은 거창해도 전투 기술이 현저히 모자란 애송이를 아주 여유롭게 상대하고 있었다. 놈이 이를 악물고 쇄도하면 슬쩍 비켜서 제풀에 나뒹굴게 하거나 하찮은 능력으로 짱돌을 날리면 발등으로 차 상대에게 강한 직구로 되돌려 주는 식이었다.
다양한 각도로 움직이기에 시야가 사방 전체를 커버할 텐데도 그는 수혁을 눈치채지 못했다. 반대로 수혁은 그의 기척을 아주 민감하게 감지했다. 도착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본부에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 정도였으니까.
아무리 페어링을 끊었다지만 이렇게 가까이에서 빤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몰라볼 수가 있지? 하여간 냉정한 새끼다.
저런 새끼를 위해서 양말을 들고 설레면서 여기까지 온 제 꼴이 갑자기 우스웠다. 뭘 직접 가져다주냐. 그냥 헌병대 불러서 맡기면 그만인 것을. 아니면 택배로 부쳐도 되고. 애초에 그런 옵션을 생각 못 한 것도 괜히 짜증 났다.
막 돌아설 때였다.
“어?”
주황색 애송이 중 누군가가 수혁을 발견했다. 짧은 탄성은 연쇄 반응을 불려왔다. 수십 명이 한 방향을 바라보면서 짧은 헛바람을 내뱉자 김윤조가 드디어 수혁을 돌아봤다.
“어?”
다른 놈과 똑같이 옅은 탄성을 뱉은 그는 막 취하던 방어 자세를 풀었다. 그때였다.
퍽!
날아온 짱돌이 하얀 이마에 정통으로 날아와 박혔다. 수혁도, 김윤조도, 그리고 주변을 둘러싼 모두가 놀랐다.
무방비한 상대를 향해 돌을 날린 비겁한 개새끼는 비죽 웃었다.
“아직 대결 중인 거 아냐?”
신난 놈은 동의를 구하듯 주변을 둘러봤다. 그러다가 수혁과 시선이 마주쳤다.
“헉.”
삽시간에 쫄아 버린 놈은 개기름 흐르는 비웃음을 싹 지워 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면서 침을 꿀꺽 삼켰다. 흔들리는 놈의 시선은 곧 인근에서 개인 영상 장비로 대결을 촬영 중인 작자에게 향했다.
“형.”
“아, 뭐? 너 잘못한 거 없어. 대결 중이잖아. 계속해.”
이세명 대위라고 했던가. 낯이 익긴 한데 솔직히 누군지 모르겠다. 특작부에 근무하면서 마주쳤으나 관심을 줄 필요가 전혀 없어서 기억을 위해 뇌세포 1개도 할애하지 않은 부류였다. 형이라고 부르는 걸 보니 저 썩은 호박 에스퍼 새끼와 무슨 관계가 있는 모양이었다.
휙. 휙.
뒤이어 짱돌이 더 날아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김윤조는 느리게 날아오는 돌을 피했다. 하지만 아까처럼 날쌘 몸놀림은 아니었다. 여유 없이 아슬아슬했다. 반대로 신난 놈은 한 번에 여러 개 돌을 날리는 하찮은 재주를 맘껏 부렸다. 제법 큰 짱돌 하나가 김윤조의 허벅지를 정통으로 때렸다.
“어.”
살짝 놀라 멈춘 김윤조의 미간을 노리고 날카로운 돌부리가 날아들었다. 저걸 정통으로 맞으면 두개골 골절이다. 이성이 움직이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했다.
돌멩이는 윤조의 미간에 닿기 전에 멈췄다. 그러곤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상대의 미간을 향해 고속으로 날아갔다.
“헉!”
썩은 호박이 깨지는 통쾌한 장면은 없었다. 대신에 미간에 살짝 닿은 채 떠 있는 날카로운 돌을 발견한 새끼가 입을 쩍 벌린 채 부들부들 떨 뿐이었다.
돌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사방에는 싸한 침묵이 깔렸다.
주황색 무리가 수혁 뒤로 우르르 빠졌다. 덕분에 넓어진 스테이지엔 상처 난 이마를 살짝 문지르면서 이쪽을 바라보는 김윤조와, 쫄아서 굳은 썩은 호박, 그리고 여전히 상황 파악이 안 되는 카메라맨뿐이었다.
“이거 무효야! 다시 해!”
이세명이 소리쳤다. 수혁은 묵묵히 놈을 보다가 입을 열었다.
“저거 에스퍼야?”
“아닙니다. 일반인입니다.”
김윤조가 대답했다.
“그럼 패스. 이 새낀 에스퍼 맞고?”
“네. 하지만 아직 훈련 중인 신병입니다.”
“돌 날리는 폼이 너무 하찮아서 에스퍼인 줄도 몰랐네. 그런데 저거 하나 제압 못 해서 다쳐? 너 특수부대 출신이잖아.”
수혁의 물음에 김윤조는 쪽팔리다는 듯이 시선을 살짝 깔았다.
“잠시 다른 데 정신을 파는 바람에.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 건 없고. 훈련 중에 정신 팔린 다른 데가 혹시 난가?”
“……예.”
“그럼 내 책임이네.”
“아니 그런 뜻은 아닙니다. 그냥 제 부주의입니다.”
김윤조가 다급히 부인했다. 하지만 수혁이 원한 대답은 그게 아니었다.
“내 책임인 것 같은데.”
“전혀 아니니 개의치 마십시오.”
“그냥 내 책임으로 하지?”
“아닙니다. 그럴 순 없습니다.”
뭔가 이상한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참을성도 없고 눈치도 없는 새끼가 나댔다.
“맞아! 그쪽 탓이니까 책임져!”
이세명 새끼는 숫제 삿대질까지 했다. 그에 동생 놈이 사색이 되어 고개를 저었다. 갓 입대한 신병도 아는 수혁의 얼굴을 저 멍청이 놈만 몰랐다.
“혀, 형! 아니야. 저분 책임 아니야.”
“무슨 소리야? 훈련을 방해했으니까 책임이 맞지. 대결에서 이기면 훈련 수료증 준다고 했는데 이건 네가 이긴 대결이잖아. 김 준위, 내 말 맞지?”
김윤조는 수혁을 잠시 보더니 낮은 한숨을 쉬었다.
“재대결을 제안합니다. 이번에는 방해 없이요.”
“그러면 내 동생이 불리하지. 체력 다 소진해 놓고 재대결하면 그쪽만 유리하잖아.”
이세명은 계속해서 목청을 높였다. 이쪽도 똑같이 체력 소진했다는 생각은 못 하는 모양이었다.
“아하. 훈련 수료증을 걸고 대결한 거야? 음, 에스퍼가 가이드를 상대로 단박에 이기지 못한 것부터가 지옥의 훈련감인데. 내 책임이라고 하니까 내가 책임질게.”
“예? 강수혁 소령님과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김윤조가 거듭 거절했다. 관계없다는 얘기가 무척이나 거슬렸다. 이쪽 보느라 다쳤으면서 관계가 없긴.
“에스퍼 훈련은 원래 에스퍼 담당이잖아. 조교 보조라고 생각해. 야, 너 이름 뭐야?”
“고, 고진수입니다.”
‘요’ 자만 쓰던 고진수가 갑자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저 새끼랑은 무슨 관계인데?”
“사촌형이요. 그러니까 외사촌.”
“그래서 성이 달랐나.”
뒤늦게 수혁의 정체를 깨달은 이세명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서도 놈은 들고 있던 소형 카메라를 놓지 않았다.
“진수야, 걱정하지 마. 과도한 폭력은 형이 인권위에 즉시 알릴 거야. 아버지도 그러라고 했고.”
“아, 대위 따위가 소령 상대로 경례도 안 붙이고 막 반말하고 그래도 돼? 영창감인데.”
수혁이 느긋하게 읊조렸다.
“이, 이건 헌법에 따라 인권을 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세명 새끼는 뒤늦게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헌법에 따라 내가 신병 교육에 힘을 써 보지.”
씩 웃은 수혁은 윤조를 뒤로 물리고 대신 고진수 앞에 섰다.
고진수는 숫제 울려고 들었다. 그는 이세명을 보면서 고개를 저었다.
“고진수! 괜찮아. 우리 아버지가 있잖아. 전혀 걱정 안 해도 돼.”
놈은 카메라를 들고서는 큰소리쳤다.
김윤조가 수혁의 곁으로 다가왔다. 근 열흘 만에 맡는 향기가 수혁의 후각 세포를 자극했다. 뒤이어 낮은 음성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이세명 대위 부친은 이찬규 여당 대표입니다. 인권위 얘기를 하는 걸 보니 귀찮게 되었네요. 소령님은 되도록 빠지시는 편이 좋을 듯합니다. 장 중장님과 딜한 것이 있지 않습니까.”
자연스럽게 돌아간 시선에 놈의 얼굴이 가득 들어찼다. 흰 이마에 빨간 생채기를 단 놈은 진지하게 수혁을 바라보았다.
후각, 청각, 시각에서 시작된 저릿저릿한 감각은 금방 뇌까지 닿아서 수혁의 정신을 아찔하게 했다. 뭔가 이상했다.
성욕은 페어링의 부작용이니까 끊으면 사라지는 것 아니었나? 그런데 그저 가까이 선 것만으로도 왜 이렇게 만지고 싶고 껴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어지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