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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00화 (177/256)

100화

11. 따로 함께

어린 시절 에스퍼로 분류되어 특수 교육을 받던 미성년자는 법적 성인이 되는 해 정식 입영 통지를 받는다. 에스퍼 의무 복무법이 시행된 해에는 일 년에 열 명 남짓했으나 이후로 점차 숫자가 늘어서 지금은 수백 명에 이르렀다.

특수 교육 시설에서 꾸준히 능력 테스트를 하지만, 입대를 앞두고 정식으로 풀 배터리 테스트를 받는다. 그 결과 정서 안정 항목에서 높은 등급을 받고 또 균질한 능력을 보유한 우수 에스퍼는 특작부 외 다른 부대에서 사전 선발로 데려간다. 특히 빽이 있는 신병은 기준 미달이더라도 후방 부대 내 꿀 보직으로 빠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능력 통제가 잘 안 되거나 정서 등급이 모자라거나 빽이 없는 놈은 모조리 특작부로 보내진다. 그 덕분에 특작부 신병 교육은 교육이 아니라 야생 동물 길들이기에 가까웠다.

특작부 인근 야외 훈련장엔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녀가 주황색 체육복을 입고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쉰 명 전후였다. 불안한 기색은 다분해도 신병다운 군기는 눈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들은 흰 전투복을 입고 나타난 윤조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나는 김윤조 준위입니다. 오늘부터 여러분의 교육을 맡게 되었습니다.”

신병들이 시선을 교환하며 뭐라고 웅성거렸다. 개중에 빤지르르해 보이는 남자가 손을 번쩍 들었다.

“저기요!”

뭘 들은 건가. 군대 신병 교육을 받으러 와서 ‘저기요?’라니. 갑자기 안 마시던 라떼가 급 땡겼다.

“조교님이라고 부릅니다. 뭡니까?”

“조교님은 왜 흰 전투복이에요? 에스퍼는 검은색이잖아요. 혹시 군 간호사세요?”

정신이 멍했다. 저게 지금 놀리나? 싶다가도 무구하게 저를 바라보는 머저리 눈깔을 보고 침착을 유지했다.

“군 간호사가 아니라 간호 장교, 군의관 혹은 의무병입니다. 그리고 본 조교는 셋 다 아닙니다.”

“그럼 뭔데요?”

“가이드입니다.”

윤조의 대답에 신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야, 가이드래.”

“와, 가이드 처음 봤어.”

“우리나라에 가이드는 하나뿐이지 않아?”

“그럼?”

저들끼리 쑥덕대던 놈들이 갑자기 눈을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라고 한 적도 없는데 여러 명이 손을 번쩍 들었다. 그러곤 윤조가 허락하기도 전에 입을 털었다.

“강수혁 소령님 얘기 좀 해 주세요.”

“강수혁 소령님이 구축함으로 게이트 부수는 장면 직접 봤어요?”

“가이드는 정확하게 뭐 하는 거예요?”

“둘이 같이 살아요?”

“가이드님 엄청 잘생겼어요.”

“장교 임관하면 저희도 가이드 생겨요?”

시작부터 엉망진창이다. 무슨 수련회 온 줄 아는 건가.

에스퍼 조교들이 왜 전부 영창 가 있는지 단박에 이해 갔다. 이런 무개념한 신병 떼거리를 어떤 강압적 수단 없이 민주적인 방법으로 훈련 시킬 수 있다면 그건 생불이다. 그리고 생불은 에스퍼 사이에선 절대로 태어나지 않는다.

“조용히 하십시오. 사적인 질문은 받지 않습니다. 강수혁 소령님에 관한 사항은 기본적으로 기밀이라 발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발언은 허락 후에 하십시오. 말투는 ‘다’ 혹은 ‘까’로 끝나야 합니다.”

특작부에서 말투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

상관을 상대로 바른 존댓말만 꼬박꼬박 써도 향교 졸업한 줄 안다. 하지만 이 난감한 신병들의 기강을 잡기 위해선 말투부터 고칠 필요가 있었다.

“왜요?”

“훈련만 잘 받으면 되잖아요. 말투까지 진짜 오바다.”

“에스퍼라서 어차피 임관하면 바로 소위 다는데. 가이드는 준위잖아.”

버릇없는 햇병아리들이라 그런지 상황 파악 능력이 현저히 떨어졌다. 물리적 수단으로 입을 막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았다.

최정이 윤조에게 갑자기 신병 교육을 떠맡긴 이유도 얼추 짐작이 갔다. 에스퍼 조교라면 지금쯤 땅이 파이고 그 안에 신병 몇 마리가 차곡차곡 누웠을 거다.

대신에 윤조는 함정을 던졌다.

“본 조교가 준위라 지시를 따르기 싫은 신병은 이쪽으로 나오십시오. 본 조교와 겨루어서 이기면 훈련소 수료증을 바로 지급하겠습니다.”

“예? 저희는 에스퍼인데요. 일반인이랑 싸우는 건 불법이잖아요.”

“나는 일반인이 아니라 가이드입니다. 아까 가이드가 하는 일이 뭔지 물어본 사람 있었습니다. 지금 말씀드리겠습니다.”

윤조는 냉랭한 시선으로 버릇없는 자식들을 쭉 훑었다.

“가이드의 의무는 에스퍼 서포트 및 통제입니다. 본 조교가 서포트 했던 에스퍼가 누군지 기억하십시오. 여러분 중에 구축함으로 게이트 박살 낸 전적이 있는 사람 있습니까?”

조롱 어린 설명에 대부분은 뒤늦게 눈치를 보면서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어린애가 쉰 명쯤 모여 있다 보면 하나쯤은 업계 고인물을 상대로 가당찮은 자신감을 발휘하는 놈이 있기 마련이다.

“저기요.”

맨 처음 ‘저기요’라고 불렀던 신병이었다.

덩치도 다른 남성 신병보다 월등했다. 하지만 괴물 같은 스펙을 자랑하는 S급과 어울렸던 입장에서는 살찐 병아리에 불과했다.

“이름.”

“고진수요.”

빡빡머리에 시시껄렁한 태도가 딱 봐도 버릇 나빠 보였다. 주황색 체육복 목둘레를 따라 문신 일부가 드러났다. 귀에도 빼지 않은 피어싱이 주렁주렁 달렸고, 손목에 굵은 순금 체인 팔찌를 걸고 있었다. 촌스럽지만 돈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엄마가 차려 준 뜨신 밥 잘 먹고 나서 아빠가 사준 외제 차를 몰면서 세상을 향해 영문 모를 분함을 토하는 부류인가.

“고진수 훈련병. 특기는?”

“염력.”

이제는 예의상 붙이던 ‘요’ 자도 사라졌다. 견적을 보아하니 그냥 라떼도 아니고 라떼 라지 사이즈다.

“덤벼서 이기면 바로 훈련 수료하고 임관하는 거 어떻게 보장할 건데요?”

한걸음 나온 놈이 도발적으로 물었다.

“이기고 따져도 늦지 않습니다.”

“아니 말 바뀌면 나만 억울하잖아. 훈련병 말이야 못 들었다고 뭉개면 그만이고.”

“훈련 과정은 전부 녹화됩니다.”

숫제 반말을 찍찍 지껄이는 놈을 향해 비즈니스 표정을 유지했다.

“그쪽에서 녹화한 거 편집할 수도 있어서. 증인 불러도 되죠?”

“증인? 고진수 훈령병이?”

“아는 사람 있어서.”

씩 웃은 놈은 체육복 바지 주머니에서 분명히 제출했어야 할 개인 통신기기를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어, 형 나야. 와서 심판 좀 봐줘. 조교가 한판 붙어서 이기면 훈련 바로 수료시켜 준대. 증인으로 형이 오면 좋거든. 어. 10분 후에 봐.”

전화를 뚝 끊은 놈은 10분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어린놈답지 않게 개기름이 줄줄 흐르는 면상이 징그러웠다.

놈이 ‘형’과 하는 통화를 듣고서 윤조는 고진수가 왜 저렇게 나대는지 알았다.

장소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는데도 10분 만에 올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다. 특작부에 상근하면서 멋대로 근무지를 이탈할 수 있는 존재는 한마디로 고위 장교로 압축할 수 있다.

머릿속에 있는 고진수에 관련된 파일을 불러내서 다시 검토했다. 양친은 그냥 평범한 일반인이었다. 생긴 대로 불량 태도와 학교 내 폭력으로 인한 관련 기록 외에 다른 특별 사항은 없다. 다른 경로로 아는 인맥이 있다는 소리다. 그것도 윤조에게 저런 불량 신병에 관해 미리 귀띔하지 않을 만큼 끼리끼리 노는 성격의 소유자가.

‘누구지?’

윤조가 의문을 가지고 고진수를 보는 사이 저 멀리서 이미 차량의 낌새가 났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빠르게 진입하는 차에선 이상하게 더럽고 지저분한 기운이 났다.

* * *

창가 소파에 드러누운 수혁은 멍하게 천장을 봤다.

내내 굶어서 그런지 기운이 없다. 그렇다고 막 죽을 것 같지도 않았다. 심각한 의욕 상실로 인해 자연스럽게 도전하게 된 아사(餓死)는 역시 실패로 돌아갔다. 망할 놈의 몸뚱이가 광합성이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찌르르륵. 찌르르륵.

열린 창문 사이로 벌레 소리가 요란했다. 웃자란 정원 잡초는 옅은 산바람에도 흔들거렸다. 원래부터 조용한 집이었다. 그런데 이렇게까지 스산했던가.

어제 집을 비운 사이에 헌병대가 와서 불필요한 짐을 빼 갔다. 그런데도 남은 흔적이 수혁을 괴롭혔다.

온 집 안에 퍼져 있는 은은한 향기라든가. 혹은 같이 썼던 침대의 존재라든가. 일부러 무시하고 눈을 감았다. 시각을 차단하자 청각과 후각이 더 날뛰었다.

“시발.”

어금니를 박박 갈면서 일어났다.

팡!

온 집 안의 문이란 문이 일시에 열렸다. 개중에는 수혁의 힘을 감당하지 못하고 경첩이 일그러진 채 끄떡거리는 놈도 있었다. 전혀 관심 없다. 아예 모든 벽을 다 허물고 싶은 심정이다.

풀냄새 가득한 산바람이 들어오면서 1층에 스며든 냄새는 약간 가셨다. 하지만 위층에 도사리고 있는 냄새의 원천을 제거하지 않는 한 완전한 환기는 불가능했다.

어차피 일어선 김에 불필요한 잔재를 모조리 다 제거하고 싶었다. 쿵쾅거리면서 2층으로 올라갔다. 일전에 뚫어 놓은 벽으로 들어가 안에 있는 침대를 들어 창밖으로 내던졌다.

쾅! 와장창!

거대한 침대는 창문을 부수면서 아래층으로 떨어져 박살이 났다. 뒤이어 붙박이장 문을 뜯어냈다. 안에 든 예비 침구를 모조리 다 밖으로 흩어 버렸다.

툭.

뭔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낡은 종이가방이었다. 인형 새끼가 이 집에 처음 왔을 때 애지중지 했던 작은 가방. 그걸 헌병 새끼들이 또 까먹은 모양이었다.

돌려줘야 하나?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지워 버렸다.

“중요한 거면 벌써 찾으러 왔겠지.”

수혁은 아직 군화를 신은 발로 그 종이가방을 걷어찼다. 낡은 종이는 금방 찢어졌다. 그 안에 든 물건이 문짝이 날아간 붙박이장에 부딪혀 뒹굴었다.

양말이었다.

상표 태그를 뜯지 않은 새 양말은 흔히 신는 색깔은 아니었다. 앞코와 발목 둘레에 포인트를 준 제품으로 어린 애들이 멋을 낼 때 신는 종류였다.

유품으로 보이진 않았다. 딴에는 빈티지에 드는 것이라 아꼈던 걸 수도.

“버려.”

수혁은 양말을 침대가 날아간 창문으로 획 날렸다.

위층을 뒤집고 나자 그나마 성질이 좀 가라앉았다. 1층으로 내려온 수혁은 소파에 다시 누웠다. 머리를 비우려 노력하며 웃자란 풀밭을 둘러봤다.

살랑이는 풀 위에 방금 2층에서 던진 양말이 걸쳐져 있었다.

‘하필 왜 저기에.’

심지어 양말 새끼는 은은한 탓을 하는 듯했다.

소멸시켜 버리기엔 놈이 애지중지하던 모습이 너무 걸렸다.

“아…… 진짜…….”

소파에서 벌떡 일어난 수혁은 두 손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길고 긴 한숨을 내쉰 끝에 그는 양말을 집어 들고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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