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99화 (176/256)

99화

11. 따로 함께

남해 외딴섬 안가에서 헤어진 이후로 윤조는 강수혁을 보지 못했다.

지난 일주일 동안 강수혁의 위치를 추적한 결과 그가 특작부에 머무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구실 아니면 둘이 같이 사용하던 숙소였다. 연락은 없었다. 그러다가 윤조가 헬기를 타고 귀환하는 중에 숙소에서 벗어났다.

수송 헬기가 특작부 비행장에는 착륙했을 때 심 박사와 최정이 윤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반쯤은 예상했고 반쯤은 의아했다. 그 둘이 무슨 말을 꺼낼까 내심 궁금한 찰나, 최정이 먼저 입을 열었다.

“김 준위. 방금 명령서 전달되었어.”

그 말이 떨어지는 동시에 윤조의 개인 단말기에 알림이 들어왔다. 장선욱 중장 측에서 보낸 것이었다. 내용은 간단했다.

강수혁-김윤조의 페어링을 즉시 해제할 것.

아무리 더는 못하겠다고 했다지만 이렇게 빠르게 정리될 줄은 몰랐다. 그냥 시간이 더 필요한 줄로만 알았다.

“대령님?”

“보다시피 중장님 명령이야. 강수혁과 개인적으로 딜을 하신 것 같아.”

“명령 하달 날짜는 이틀 전인데 왜 지금 주신 겁니까?”

“휴가는 끝내고 알리라는 중장님 배려.”

시니컬한 대답은 심 박사의 것이었다.

“페어링 해제가 이렇게 쉽게 됩니까?”

이해할 수 없어서 다시금 물었다. 강수혁에게 가이드를 붙이려고 그 고생을 했는데?

어리둥절한 윤조를 보고 최정이 낮게 혀를 찼다.

“강수혁이잖아. 그 자식이 정하면 누구도 말릴 수 없어. 더군다나 가이드를 붙인 이유가 말을 너무 안 들어서 그런 건데 가이드 떼 주기만 하면 뭐든 시키는 대로 다 하겠다고 나오니 말이야. 거절할 이유가 없지.”

“물론 조건부긴 해. 시범적으로 해제하고 나서 사고를 치거나 명령 불복종 사태가 일어나면 바로 원상 복구시키기로 했어. 윗선의 결단이라 우린 따를 수밖에 없어.”

심 박사가 덧붙인 말에 윤조는 더는 입을 열지 못했다.

뒤에서 망나니니 괴물이니 욕을 해도 소령 강수혁의 의사가 가지는 힘은 막강했다.

특히 그의 존재와 능력이 세계 각국에 생생하게 알려진 마당인지라, 상부 명령에 무조건 협조하겠다는 그의 협상 카드를 뒤엎을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국내 최초의 가이드라고 할지라도 고작 준위에 지나지 않는 김윤조의 불만은 보고할 가치조차 없었다.

즉시 연구실로 향해 강수혁과의 페어링을 해제했다.

페어링 체결 과정이 대단히 거칠고 어려웠으므로 해제 또한 쉽지 않으리라 막연하게 여겼지만, 실상은 달랐다. 그저 AI를 다시 세팅하고 그에 맞춰 윤조의 신체를 세부 조정하면 그만이었다. 허망할 정도로 쉬웠다. 윤조는 인큐베이터에서 총 3시간 머물렀다.

조정을 끝내고 막 인큐베이터에서 벗어나는 윤조를 향해 심 박사가 다가왔다.

“컨디션 어때?”

“좋습니다.”

“뭔가 이상이 있으면 바로 보고해.”

“네.”

몸을 닦고 가이드용 내피를 챙겨입은 윤조는 페어링 해제 데이터를 검토하는 심 박사를 묵묵히 봤다. 시선을 느낀 심 박사가 고개를 들었다.

“왜?”

“앞으로 어떻게 합니까?”

“네 거취를 묻는 거라면 최정이 곧 알려 줄 거야. 미리 귀띔하자면 S급 에스퍼 중에 하나 선발해서 너와 페어링할 가능성이 커. 귀한 가이드를 계속 놀릴 순 없으니. 가이드 시스템에 관한 추가 데이터도 필요하고.”

S급 에스퍼라고 해 봐야 임성준과 장세인이 전부다. 둘 중 누가 파트너가 되든 상관없다. 하지만 윤조가 궁금한 건 그게 아니었다.

“저 말고 강 소령님 말입니다.”

“나도 몰라. 그 새끼가 무슨 생각인지. 사고 안 친다고 약속했지만, 천하의 강수혁이? 그렇게 하루아침에 뒤바뀔 성질머리면 개망나니라고 안 부르지.”

심 박사는 심통이 난 듯 보였다. 보고 있던 데이터 스크롤을 의미 없이 올리다 내리기를 반복하더니 이내 패드를 컨트롤 패널 위에 패대기쳤다.

“하여간 어떻게든 말을 안 들으려고 용을 쓰지 써. 망나니 새끼. 멋대로 페어링 깨기로 마음먹은 것도 모자라 나를 건너뛰고 바로 장 중장을 찾아가? 아주 엿 먹이려고 작정을 했어.”

“두 분, 싸우셨습니까?”

안 싸웠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윤조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매일 싸움박질이지 뭐. 하여간 망나니 새끼. 누굴 닮아서 성질머리가 그따위인지.”

강수혁의 부모에 관해서는 딱히 알려진 바가 없다. 혹여 정보가 있더라도 장선욱이 개인적으로 관리하는 기밀 파일에만 적혀 있을 터였다.

미지의 양친을 제외하고 강수혁이 누굴 닮았느냐? 묻는다면 반사적으로 얼굴 셋이 떠오른다.

모 중장의 유들유들한 매서움, 모 박사의 지랄 맞음, 그리고 모 대령의 유치한 섬세함을 막강한 염력과 버무리면 특작부 명물 개망나니가 된다.

제 얼굴에 침을 실컷 뱉은 심 박사는 윤조를 향해 위로하듯 덧붙였다.

“어차피 조건부야. 난 최장 한 달로 생각하고 있어. 그동안 그 새끼 뒤치다꺼리하느라 고생했으니 조건부 휴가라고 여겨.”

“네.”

그때 연구실로 최정이 들어왔다. 재생하는 사이 잠시 자리를 비웠던 그의 손에는 휴대용 저장 장치가 들려 있었다. 보안용으로 작전이나 혹은 각종 정보를 전달할 때 쓰는 군수품이었다.

“딱 맞게 왔네. 김 준위, 이거 받아.”

“뭡니까?”

“내일부터 김 준위는 에스퍼 신병 교육 담당. 그 관련 자료. 오늘 바로 검토해.”

“예? 그럼 에스퍼 서포트 임무는 어떻게 됩니까?”

“아, 그건 일단 보류. 강수혁 외에 통제 불능 에스퍼는 당장 없어서 말이야. 차차 준비하면 돼. 그때까지 신병 교육 좀 맡아.”

“에스퍼 신병 교육은 조교 에스퍼가 해야 하지 않습니까?”

느닷없는 보직 변경에 윤조가 의문을 표했다. 그러자 최정이 오만상을 찌푸리면서 손사래를 쳤다.

“에스퍼 중에는 적당한 놈이 눈 씻고 찾아봐도 없어. 조금만 기어오른다 싶으면 그 보송보송한 병아리들 팔다리를 다 쪼개 놓으니 원. 신병 교육 과정을 놓고 누가 군내 폭력 행위라고 인권위에 진정을 넣었어. 조교들 싹 다 영창 가 있어. 조만간 감사도 들어올 것 같아. 갑자기 정치 쟁점이 되기도 했고. 그것 때문에 중장님도 머리가 빠져. F형 게이트 처리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인권위랑 국정 감사라니. 누가 갑자기 그런 짓을 한 건지. 아니 막말로 온몸이 흉기인 아기 망나니들을 말로만 어떻게 가르쳐?”

“그렇다고 이렇게 갑자기요?”

“당장 믿을 사람이 김 준위밖에 없어. 가이드 되기 전에 특수부대 조교도 해 봤잖아. 이번 기수는 완전히 햇병아리들이라 김 준위로도 충분히 제압 가능할 거야. 훈련 커리큘럼은 거기 다 들어 있어. 확인하고 궁금한 점 있으면 나한테 묻지 말고 스스로 알아서 잘 해결해 봐.”

무책임한 소리를 늘어놓은 후에 최정은 금방 도망갔다. 황당해진 윤조는 저도 모르게 심 박사를 돌아봤다.

“나는 모르는 얘기다. 지금 처음 들었어.”

“아니 일반 출신 병사도 아니고 에스퍼 교육을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능력으로 난동을 부리면 제가 제압할 수단이 없는데요.”

“그건 아니라고 봐.”

심 박사가 이견을 표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윤조는 눈만 멀뚱히 깜빡였다. 그사이 심 박사는 대형 스크린에 윤조 관련 데이터를 띄웠다.

눈에 띄는 건 로건 노리스에게 탈취당한 강수혁을 재탈환하는 과정에 기록된 윤조의 전투 분석 그래프였다. 속력과 근력이 기존 수치보다 월등하게 향상되었다.

“북미형 인공 양수를 너에게 맞추는 과정에서 매질로 망나니 피를 한 양동이 썼거든. 메커니즘은 더 연구해 봐야 하지만 말이야. 아마 망나니 능력에 너에게 흡수된 게 아닌가 추정하고 있어.”

“몸이 전보다 가벼운 것 같긴 했는데. 이런 변화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사실 여러 가지로 알아볼 게 너무 많은데. 강수혁, 그놈이 협조를 안 해서 곤란해.”

“앞으로 군 상부 명령은 적극 협조하기로 딜을 했으니, 장 중장님께 부탁하시면 되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돌아오는 대답이 어쩐지 떨떠름했다. 강 소령만 연관되면 심 박사는 대단히 감정적으로 변하기 때문에 마뜩잖은 태도 또한 두 사람 간의 자존심 문제로 여겼다.

숙소는 장교 아파트로 다시 옮겼다.

짐은 전처럼 헌병대가 가져왔다. 단출한 상자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개인 물품이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도 가장 중요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망했으나 과거엔 엄청나게 유명했던 세계적인 스포츠 의류 브랜드의 로고가 찍힌 작은 종이 가방이었다.

“이런.”

낡고 헤진 작은 종이가방을 쓰레기로 여기고 처분할지도 모른다. 윤조는 급하게 일어서 현관으로 향했다. 막 현관 문고리를 돌리다가 문득 멈춰 섰다.

“그게 왜 중요한 거지?”

현관에 멀뚱히 선 채로 윤조는 그 낡은 종이가방이 무슨 물건인지 떠올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도통 생각이 나질 않았다.

종이 가방을 중요하게 생각한 건 강수혁과 동거를 시작하던 날 있었던 다툼에 대한 영상 자료와 함께 자세한 로그를 봤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종이 가방을 매우 중요하게 챙겨 두긴 했는데 왜 그랬는지,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는 로그에 없었다.

“까먹었나. 할 수 없지, 뭐.”

잊어버린 건 어쩔 수 없다. 리셋한 뇌를 완전하게 복원할 수 없는 것처럼.

윤조는 종이 가방에 관한 생각을 지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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