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윤조는 벗었던 옷을 다시 입고 소파에 앉았다.
강수혁의 상대의 위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섬에서 2km 떨어진 해상이었다. 별다른 움직임이 없이 조용히 부유하는 모습을 위성 촬영으로 확인했다. 감정을 다스릴 시간이 필요해 보여서 조용히 기다렸다.
적어도 한나절 이상, 길면 하루 이상 그렇게 있을 거라고 여겼다. 하지만 강수혁은 네 시간 후에 안가로 돌아왔다. 예상보다 빨랐다. 윤조는 그의 이동을 감지하고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막 현관에 도착한 상대는 문을 열지 않고 묵묵히 섰다.
10분쯤 지났을까. 네 시간도 지루함 없이 기다렸는데 고작 10분을 참기가 어려웠다.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들었다. 윤조는 서둘러 현관을 열었다.
거구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전투복에서는 짠 바닷물이 뚝뚝 떨어졌다.
“괜찮으십니까?”
“……어.”
대답하는 음성은 반대로 건조했다.
윤조는 손바닥으로 상대의 체온을 가늠했다. 전투복 패드는 완전히 식어서 도리어 차가웠다.
“다행입니다.”
댔던 손을 거두려는 찰나 상대가 윤조의 손을 잡았다. 직접 손을 댄 건 아니었다. 능력으로 윤조의 손을 잡은 강수혁은 빨갛게 부은 손끝을 묵묵히 내려다봤다.
“약은 발랐어?”
“그럴 정도는 아니라서요.”
“그러면 안 돼. 약은 발라야지.”
건조한 음성이 조용히 이어졌다.
“너는 잘 다치잖아.”
“이따가 바르겠습니다.”
“지금 바르자.”
그 말과 함께 강수혁은 윤조를 가볍게 들었다. 이번에도 능력을 사용했다. 윤조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로 이동당했다.
집 안에 들어선 강수혁은 사방을 둘러봤다.
거실에 있는 작은 서랍장과 주방 캐비닛, 그리고 사방의 문이 저절로 열렸다가 닫혔다.
“구급상자는 저쪽 욕실 옆 서랍장에 있습니다.”
윤조의 말에 수혁은 바로 구급상자를 찾아냈다. 날아오는 도중에 이미 뚜껑이 열린 상자 안에서 연고와 반창고가 나왔다. 그것들은 알아서 내용물을 윤조의 손끝에 발리고 저절로 포장을 벗고 상처 부위에 부착되었다. 남은 건 구급상자에 도로 들어갔고 알아서 정리된 상자는 거실 한복판 테이블 위에 안착했다. 모든 것이 물 흐르듯이 진행되었다.
“감사합니다.”
“감사는 뭐. 화상 입혀서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강수혁이 사과했다. 목소리를 계속해서 건조했지만 진중한 시선에선 진심이 묻어났다.
“아닙니다. 소령님이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제가 먼저 손을 댔습니다.”
“그래도.”
옅은 한숨과 함께 강수혁은 입꼬리를 올렸다. 미소가 대단히 피로해 보였다.
“일단 씻고 쉬셔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수혁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그가 씻는 사이 윤조는 식은 된장찌개를 다시 끓였다.
‘기왕이면 김치찌개면 좋았을걸.’
냉장고에 각종 재료가 넉넉하게 있는데 이상하게 김치찌개를 끓이긴 애매했다. 그나마 있는 김치도 갓 담은 새 김치였다. 아무리 요리 문외한이라도 김치찌개에 새 김치는 천인공노할 짓인 건 안다.
대신에 차돌에 두부와 애호박, 팽이버섯 등 된장찌개 재료는 차고 넘쳤다. 심지어 된장마저 대용량이었다. 강성 김치찌개 파에서 된장찌개 파로 전향한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없다. 분명히 윤조를 먼저 생각해서 준비한 걸 거다. 맥주만큼 가득 쌓인 두유처럼.
된장찌개 냄새가 퍼질 무렵, 윤조는 안가에서 찾아낸 여벌 옷을 챙겨 욕실로 향했다. 막 노크를 하려고 할 때였다. 욕실 문이 저절로 열리고 윤조의 손에 들렸던 옷이 알아서 욕실 안으로 날아갔다.
“고마워.”
짧은 인사와 함께 문이 다시 닫혔다.
정중한 태도였으나 거리감이 현저하게 커졌다. 지금 윤조의 상태가 상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건 확실했다.
‘시간이 걸리겠는걸.’
윤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인격 수정 이전에도 이랬기 때문이었다.
둘의 관계는 언제나 피 터지는 전투였다. 그나마 이번에는 물리적 격돌까진 없다는 점에서 오히려 훨씬 나았다.
잠시 후 욕실 문이 열리고 강수혁이 나왔다. 머리를 닦으면서 나온 그는 거실과 주방을 잇는 길목에 서 있는 윤조를 발견하곤 수건을 내렸다.
“식사도 준비했습니다. 어느 쪽이든 소령님이 편하신 순서대로 하십시오.”
“무슨 순서?”
“밥을 먼저 드셔도 되고 아니면 섹스를 먼저 하셔도 됩니다.”
샤워로 살짝 풀어졌던 얼굴에 다시 그늘이 졌다. 그는 피로한 듯이 손바닥으로 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그러는 사이 젖은 수건은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
눈앞의 에스퍼는 밖에서는 거침없는 행태로 지저분한 흔적을 잔뜩 남기면서, 집 안에선 누구보다도 깔끔하게 행동했다. 고작 얼굴을 문지르느라 젖은 수건을 바닥으로 팽개칠 성격이 아니었다.
단순한 실수인 걸까. 너무 피로해서 능력 사용에 지장이 있는 걸까. 아니면 내 집이 아니라서 편하게 행동하나. 집에선 잘해도 밖에 나가면 지저분하게 행동하는 인간이 많으니까.
세 번째를 유력 후보로 낙점하는 사이 강수혁이 고개를 들었다.
“일단 얘기부터 좀 하자.”
윤조의 몸이 저절로 떠서 소파에 안착했다. 강수혁과 함께 있을 때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라 딱히 놀라지도 않았다. 대신에 똑같이 귀신처럼 미끄러지는 상대를 응시했다.
화목한 가정을 위한 주택이 아닌 만큼 안가의 거실은 휑하고 삭막했다. 검은색 가죽 소파 세트도 공간을 넉넉하게 두다 못해 이쪽과 저쪽이 별도의 공간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강수혁은 윤조의 반대편에 앉았다.
둘 사이에는 구식 유리 테이블이 자리를 잡았다. 위엔 아까 쓴 구급상자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강수혁은 천천히 상체를 숙여 양 팔꿈치를 양 무릎 위에 두었다. 긴 손가락을 가닥가닥 엮은 그는 긴 한숨을 토했다. 막상 얘기하자고 하고선 그는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혹시 말이야.”
어렵사리 말을 시작한 강수혁은 무거운 숨을 연거푸 토하면서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쉽게 짐작이 갔다.
혹시 자신을 생각해서 말을 꺼내지 못할까 싶었다. 된장찌개에 두유까지 챙기는 세심한 성격이니 그럴 수 있다.
윤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되돌릴 방법은 없습니다.”
정곡이었는지 수혁이 즉시 얼굴을 들었다.
못 믿겠다는 듯이 마구 흔들리던 눈동자가 이내 힘을 잃었다. 윤조를 바라보던 시선이 소파 발치로 서서히 움직였다. 젖은 머리카락이 훤칠한 이마를 덮었다. 명백한 실망감이었다.
“대신 최대한 가깝게 추가 수정해 볼 수는 있습니다.”
“그게 더 이상하니까 절대로 하지 마.”
추가 수정이라는 말에 상대는 진저리를 쳤다. 인조인간 같은 면모를 대단히 혐오했으니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정신과 신체 양면에서 깊은 유대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가이드의 상태가 저렇게 마음에 안 드는데 수정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우는 것도 이해하기 어려웠다.
“정말이십니까? 수정하려면 현 인격을 통한 로그가 더 많이 쌓이기 전에 시도하는 편이 좋습니다.”
“아니, 수정 안 할 거야.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야.”
“그렇습니까. 언제든 마음 바뀌면 조속히 알려 주십시오.”
그러자 수혁은 피로한 듯 숨을 골랐다.
“정말이야. 더는 괜히 멀쩡한 머리를 고친다느니 그런 끔찍한 소리 하지 마.”
통제 불가능하기에 구속 장치를 달고 개별 가이드까지 배정된 에스퍼가 이렇게 신중한 태도를 보이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차라리 불같이 화를 내면서 섬을 때려 부수는 쪽이 자연스러웠다.
침묵은 길게 이어졌다. 집 안에 진동하던 된장찌개 냄새마저 가실 무렵 강수혁이 무거운 입을 드디어 열었다.
“김윤조.”
“네. 말씀하십시오.”
윤조는 자세를 바로 고쳤다.
“우리 그만하자.”
“네?”
윤조가 생략된 목적어를 추리해내기 전에 강수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거실 저쪽에서 검은 전투복이 스르륵 다가왔다. 목 없는 귀신 같은 전투복이 강수혁의 곁에 그림자처럼 섰다. 강수혁이 상의를 벗어 던졌다.
역시 휴가를 즐길 기분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에 윤조도 방에 챙겨 두었던 제 전투복을 가지러 갔다.
원래대로라면 안에서 전투복으로 갈아입은 후에 밖으로 나갔을 거다. 하지만 기분이 이상해서 전투복을 들고 거실로 바로 나갔다. 막 현관을 나서던 강수혁이 윤조를 발견하고 멈추었다.
눈이 마주친 강수혁은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멈췄던 발걸음을 옮겼다. 윤조가 잡을 사이도 없이 그는 섬을 떠났다. 그러곤 다음 날까지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다시 끓이고 또 끓인 된장찌개가 상해 버렸다. 버린 후에 남은 재료로 새로 끓이길 세 번이나 반복했다. 그러는 사이 윤조는 천천히 깨달았다.
그만하자는 건 휴가만이 아님을.
일주일 후 특작부에서 보낸 수송 헬기가 도착했다. 윤조는 안가를 정리하고 수송 헬기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