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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97화 (174/256)

97화

취이익.

취사를 끝낸 구형 전기밥솥이 김을 내뿜기 시작했다. 세월의 흔적이 은근히 남은 가스레인지 위 편수 냄비의 유리 뚜껑에선 진한 된장 국물이 넘치려고 했다. 막 불을 끄려던 순간이었다.

쿵.

미세한 진동이 맨발바닥에 닿았다. 뒤이어 옅은 찬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오셨습니까.”

막 몸을 돌린 윤조에게서 2미터쯤 떨어진 현관 앞에 온통 검은 에스퍼가 있었다.

초음속 비행을 했는지 강수혁의 몸에서는 은은한 열기가 감돌았다.

저 강대한 에스퍼 몸은 거대한 핵융합 발전소와 비슷했다. 안에서 끊임없이 에너지를 뿜어낸다. 하지만 능력을 활성화하지 않은 상태에서 열기가 빠져나오는 경우는 드물다. 이상 상황이었다.

아까 섹스를 중단하는 것이 아니었다. 고집을 부려서라도 끝까지 다 한 후에 보내야 했었다. 윤조는 제 실책을 반성했다.

“미활용 잠재 에너지는 제거하는 편이 컨디션 유지에 유리합니다. 섹스를 재개하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입고 있던 티셔츠와 바지를 훌렁 벗었다. 나체로 선 윤조는 주방과 반대편에 있는 방을 가리면서 한편으로 강수혁을 돌아봤다.

“안 계신 동안 안가 내부를 확인했습니다. 저쪽 방에 큰 침대가 있어서 관계하기 좋습니다.”

상대는 방에도 윤조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대신에 묵묵히 오픈된 주방을 응시했다. 너무 급하게 옷부터 벗었나.

“식사부터 하시겠습니까. 있는 재료로 준비했습니다.”

“…….”

상대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윤조는 그의 뇌파를 꼼꼼히 살폈다.

-분노, 가학, 슬픔.

세 가지가 도드라졌다. 부정적인 주 감정들이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들끓어서 부 감정을 아예 감지하기 힘들었다.

분노와 가학은 충분히 이해됐다. 화가 나고 뭐든 다 때려 부수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에스퍼를 물심양면으로 서포트하는 가이드에 관한 중요한 변화를 정작 사용 당사자에게 제때 보고하지 않았다. 아무리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할지라도 화가 날 수밖에 없다. 가전제품을 수리할 때도 뭐를 어떻게 고치는 정도는 사용자에게 통보하지 않는가.

애초에 인격의 오류를 수정한 것이라고 해도 미리 얘기하는 편이 좋았을 거다. 적어도 특작부 귀환 후 24시간 전체 재생에 들어가기 전에는 알렸어야 했다. 그렇다면 전투 후 쌓인 스트레스를 풀던 도중에 관계를 멈추고 장거리 초음속 비행을 할 이유는 없었을 거다.

“인격 수정에 관해 사전에 소령님의 동의를 구하지 못했습니다. 당시 뇌 손실률이 예상 이상이었고 또한 인큐베이터 고장으로 인해 타국 인큐베이터를 쓰면서 적절한 수정 절차와 세부적인 재생 조건 설정이 어려웠습니다. 제 생존과 소령님 재탈환이 최우선 과제라고 판단한 AI의 결정입니다. 어렵겠지만, 양해 부탁드립니다. 다만 이런 점에 관해 제때 보고 하지 못한 점은 전적으로 제 불찰입니다. 죄송합니다.”

두 손을 허리 뒤로 돌리고 상체를 꾸벅 숙였다. 머리를 박으라면 박을 각오도 되었다. 다만 강수혁이라면 다른 조건을 더 요구할 거라 여겼다.

“12시간 5회 제약 없이, 시간과 체력이 허락하는 한 얼마든지 응할 생각입니다. 다만 지금은 제가 전체 재생을 끝낸 지 24시간도 되지 않은 시점이라, 특정 이상의 물리적 충격에 취약합니다. 염치없지만 그 점은 양해 부탁드립니다.”

이미 숙인 고개가 약간 더 아래로 내려갔다.

-슬픔! 슬픔! 슬픔! 감정 과잉에 주의하십시오.

슬픔이 단숨에 제1 감정이 되었다. 수치가 70퍼센트를 넘었다.

사람의 감정이랑 실로 다채로워서 어떤 순간에도 감정 한 종류가 압도적 지위를 차지하는 경우가 드물다. 50퍼센트를 넘어가는 순간에는 광기가, 70퍼센트를 넘어가면 감정에 먹혀서 이성 상실 수준이다.

강수혁의 경우, 분노와 가학이 70퍼센트에 가까웠던 경우가 왕왕 있긴 했어도 그건 전투 혹은 테러에 가까운 항명을 벌일 때 한정이었다.

조용한 외딴 섬에 있는 안가였다. 극한 상황은 없다. 거기다가 익숙한 분노나 가학이 아니라 슬픔이 70퍼센트에 이른다고? 이해하기 무척 어려웠다.

강수혁에게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고 있다. 트리플 S급 에스퍼가 갑자기 이성을 상실이라도 한다면? 그건 곧 국가적인 위기다. 그런 불상사를 막기 위해서 만들어진 존재가 바로 가이드 김윤조였다.

무작정 머리 숙이고 사과할 때가 아니었다. 윤조는 고개를 들고 상대를 조심스럽게 관찰했다.

주방을 보던 강수혁의 시선은 어느새 윤조에게로 향했다. 홍채는 여전히 칠흑같이 검었다. 오버로드되는 에너지에도 오로라 같은 광휘가 사라졌다. 꼭 음울한 아지랑이 같았다.

왜 슬픈지 물어봐야 했다. 좋은 타이밍이 아님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원인을 모르는 채로 에스퍼의 감정 극단 상태를 해소할 방법이 없었다.

자극을 피하려고 목소리를 최대한 부드럽게 가다듬었다.

“저, 소령님?”

녹슨 동상처럼 서 있던 상대는 겉보기에는 변화가 없었다. 대신 슬픔과 그 뒤를 잇는 가학 그래프가 물결쳤다.

윤조는 의식적으로 눈매를 풀고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혹시 특작부로 가셨던 일이 잘 안 풀리셨나 봅니다.”

분명히 심 박사를 만났을 거고 거친 대화를 주고받았을 거다. 기가 완전히 죽어 있는 모습으로 봐서는 논쟁은 심 박사의 압도적 우위로 끝났을 거다. 논쟁 주제는 당연히 윤조 자신의 인격 수정일 테고.

“제 현재 인격에 관해 마음에 안 드시는 점이 있다면 뭐든 말씀하십시오.”

말이 떨어지자마자 상대의 뇌파가 크게 일렁였다.

“제게 허용된 선에서 최선을 다해 수정하겠습니다. 이번에는 미리 상의하여 소령님의 의사를 적극 반영하여 인격을 디자인할 수 있…….”

허풍이 아니었다. 수정할 수 있는 거면 수정할 용의가 얼마든지 있다. 인격이 디자인 가능한지 확답하기 어려우나, 심 박사의 도움이 있다면 모난 부분이나 모자란 부분은 그럭저럭 거칠게나마 다듬을 수 있을 거다. 물리적 시술이 불가능하다면 정신과적 교정 프로그램을 이수할 수도 있다.

여러 가지 옵션을 빠르게 정리하는 동안 강수혁이 무거운 입을 드디어 열었다.

“……하지……마.”

지독하게 긁히는 음성에는 심지어 물기까지 묻어 있었다. 가학이 슬픔을 제치고 제1 감정이 되었다. 그러다가 다시 슬픔이 가학을 제치고 올라오더니 다시 가학이 순위를 바꾸었다. 슬픔과 가학이 뒤섞인 채로 감정 절대 수치 또한 계속해서 상승하고 있었다.

-주의. 정신 붕괴에 유의하십시오. 주의. 정신 붕괴에 유의하십시오.

AI가 긴급 경고를 반복했다. 소리도, 바람도 없는 태풍이 안가 안에 휘몰아쳤다.

굳건히 버티고 선 줄 알았던 에스퍼는 내부부터 무너지고 있었다. 피어오르는 아지랑이는 내부를 불태우는 거친 불길 탓이었다. 덕분에 신체적 스트레스도 상승 중이었다. 그에 따라 AI가 재생력 저하를 경고했다.

무엇이 잘못된 건가.

“소령님.”

윤조는 강수혁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강수혁의 상태 변화는 분명히 제 인격 수정과 연관이 있다. 그것도 모르는 멍청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정확하게 어떻게 연관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인격을 수정하면서 페어링 미세 조정을 즉시 하지 않은 탓인가. 아니면 조정된 인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가. 정확한 의사 표현을 해 주면 좋겠지만, 현재 강수혁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자신은 가이드였다. 에스퍼의 정서적 안정이 최우선 과제인 가이드. 가이드로서 뭐라도 해야 했다.

당장 떠오르는 수단은 역시 신체적 위로였다. 단순하고 무식하지만, 강수혁과 김윤조 사이를 연결하는 가장 깊은 교류. 신체적 유대를 바탕으로 대화를 끌어내는 방식은 매우 효율적이었다. 지난 가이드 로그가 그를 증명했다.

하지만 감정 포화 상태라 불안정한 그에게 손을 대는 것이 과연 옳을까. 확신이 없는 중에도 윤조의 손은 저절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AI가 윤조를 보호하기 위해 뇌파 동조율을 낮추려고 들었으나 윤조가 거부했다. 오히려 동조율을 올렸다. 아주 작은 감정 변화도 놓치기 싫었다.

AI가 계속 진행하겠느냐는 물음을 반복했다. 기계식 만류였다. 하지만 윤조는 AI의 경고를 무시했다.

희멀건 손이 검은 전투복에 닿았다. 전투로 인해 자잘한 흠집이 난 전투복의 흉부 패드는 뜨거웠다. 계속 대고 있다가는 화상을 입을 것 같았다. 하지만 가이드는 제 손바닥보다는 걷잡을 수 없는 감정을 뜨겁게 토해 내는 에스퍼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강수혁은 불꽃 그 자체였다. 그나마 전투복을 외피까지 단단히 입고 있어서 열기가 덜한 것이었다.

이미 데이기 시작한 손끝이 두툼한 흉곽에서 딱딱한 어깨로 그리고 굵은 목으로 향했다. 전투복 목둘레 위로 솟아오른 살결이 화끈거리는 손끝에 닿았다.

“읏!”

윤조는 손을 황급히 뗐다. 피부 온도가 예상 이상으로 높았다. 아무리 인공적으로 개조된 강화 인간이라도 윤조의 시작은 평범한 인간이었기에, 본능적으로 데인 손끝을 다른 손으로 감쌌다.

하지 말라는 멍한 한마디를 뱉는 것 외에는 내내 미동도 없던 강수혁의 안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검은 눈가가 얇게 떨리더니 이내 눌어져 있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전투복 장갑을 낀 커다란 주먹이 꾸욱 말렸다.

광휘가 퍼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처럼 휘황찬란한 색이 아니었다. 수백만 년 동안 고인 원유(原油)처럼 진득하고 시커멨다.

“소령님?”

강수혁의 시선이 윤조의 손으로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일그러진 안면에 깊은 어둠이 서렸다.

“잠시…… 열 좀 식히고…… 올게.”

사포에 갈아 버린 목소리를 힘겹게 토한 직후 강수혁은 몸을 돌렸다.

윤조는 그를 따라가려다가 멈칫했다. 초음속 비행을 시작하면 소닉붐이 발생한다. 나체로 두 번이나 뒹구는 건 사양이다. 하지만 불안정한 에스퍼의 상태를 끝까지 확인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앞섰다.

아까와 달리 현관을 나선 강수혁은 지표면에서 조용히 미끄러졌다. 그리고 안전 가옥과 거리를 벌리면서 천천히 가속했다. 이번에는 모습이 아주 사라질 때까지 소닉붐이 발생하는 일은 없었다.

1분여 후.

섬 인근 바다에 큰 폭발음과 함께 거대한 물보라가 몰아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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