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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96화 (173/256)

96화

빈정댈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뜩 들었으나, 수혁은 조소를 참기가 어려웠다.

“이제 와서?”

“이제 와서가 아니야. 말했잖아. 8년 전부터 준비했다고.”

“아줌마, 진짜 알다가도 모르겠어. 도대체 진의가 뭐야? 나를 왜 살리려고 하는데? 아니 그전에 내가 죽든 말든 아줌마랑 무슨 상관이야?”

“상관있지 왜 없어? 내가 네 이몬데.”

“하.”

이번에는 수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손바닥으로 이마를 쓸어 올리면서 저도 모르게 한 바퀴 맴돌았다. 어처구니가 없고 기가 막혔다.

“언제는 그런 사이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 사이 아니라고 했다고 정말로 아니게 되는 게 아니잖아. 함께 보낸 세월이 있는데. 김윤조처럼 인격을 바꾼 것도 아니고.”

“김윤조처럼?”

되물어 오는 에스퍼의 음성엔 비웃음이 가득했다.

“뭐든 참 쉽다. 그렇지? 빌어먹을 연두부 새끼나, 그 연두부를 만든 미친 아줌마나. 그리고 입이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나한테 이모가 어디 있어? 부모도 없는 마당에.”

“없다고 해서 없어지는 게 아니야. 김윤조가 바뀌었어도 여전히 네 가이드인 것처럼.”

뇌 외에는 보통 군인만도 못한 신체를 지닌 주제에 상대는 기가 죽기는커녕 분노한 에스퍼를 상대로 할 말을 또박또박 늘어놓았다.

“나도 이러고 싶지 않아. 솔직히 너 따위 전혀 신경 쓰고 싶지 않다고. 그런데 못 그러겠어. 내 마음대로 안 돼. 작전 중 사망도 아니고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인생을 누려 보지도 못하고 제 손으로 그러는 걸…… 어떻게 그냥 두고 봐.”

그러면서 심 박사는 떨리는 손으로 경련하는 뺨을 거칠게 닦아 냈다. 내린 손에는 물기가 있었다.

수혁은 심 박사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그제야 알아차렸다.

“지금 나…… 동정하는 거야?”

아까보다 한결 가라앉은 어조였는데도 심 박사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지만 부정하진 않았다.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내가 그렇게 불쌍해? 이런 미친 행각을 벌일 만큼?”

“…….”

상대는 침묵을 지켰다. 하지만 대답을 알 수 있었다.

“동정심이 남아도나 보네. 하다못해 나 같은 괴물도 동정하고.”

“내 마음이지.”

물기 어린 대답이 돌아왔다. 그에 수혁은 입꼬리를 올렸다.

“내가 괴물이라는 건 부정 안 하네.”

“그야…….”

상대가 차마 맺지 못한 말을 수혁이 대신했다.

“나는 무고한 시민 수십만 명을 몰살시켰어.”

“…….”

심 박사는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수혁을 외면했다. 그러면서 두 팔로 제 몸을 감쌌다. 최근 들어 살이 빠졌는지 몸통이 전보다 가늘어졌다.

“나 같은 건 빨리 죽는 편이 좋아.”

“누가 그래?”

“죽은 사람들이.”

질식할 것 같은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도 심 박사는 웃음 지었다.

“이제 영계 통신도 하냐? 멋지네. 휴가 끝나고 능력 테스트 다시 해야겠다.”

“농담할 일이 아니잖아.”

“나도 농담 아니야.”

힘겹게 숨을 고른 심 박사는 파들파들 떠는 손으로 이마를 쓸어 올렸다. 그 동작은 언쟁을 벌이는 상대와 닮아 있었다.

“그건 G형 게이트였어. 인구 이천 오백만이 우글거리는 수도권에 나타난 G형. 네가 비록 수십만을 증발시키는 경악스러울 짓을 저질렀지만. 네가 아니라면 수백만이 죽었을 수도 있어. 그걸 생각해서 장선욱이 너를 필사적으로 커버친 거고.”

긴 한숨 뒤에 낮은 음성이 계속 이어졌다.

“거기다가 너는 탯줄도 안 떨어졌을 때부터 군 소속이 되어서 여태까지 군에 의해서만 살았잖아. 수십만 명을 죽인 괴물이라도 성장 과정에 따른 참작은 해야…….”

“장선욱은 본인이 관리한 에스퍼가 괴물임을 인정하기 싫어서 그렇게 호도한 것일 뿐이야. 나는 괴물이 맞아. 굳이 죽일 필요가 없는 수십만을 몰살시킨 사상 최악의 괴물. 죽어 마땅해.”

고개를 도로 든 심 박사는 수혁을 진득하게 응시했다.

“스스로 사형 판결을 내린 건 좋은데. 그럴 거라면 대량 학살의 동기라도 밝혀.”

“……나 같은 괴물에게 무슨 동기가 있어. 생겨 먹은 게 그러니까 그렇게 된 거지.”

수혁이 답을 회피하자 심 박사는 코웃음을 쳤다.

“계속 회피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런데 어쩌나? 구속 장치로는 자폭 못 해. 그러니까 괜한 짓은 그만두고 그냥 살아. 기왕이면 재미있게 살면 더 좋고.”

재미있게 살라는 말에 수혁 또한 헛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이게 재미있어 보여?”

“이렇게 될 줄은 몰랐어. 하지만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이용만 당하다가 제풀에 죽을 필요는 없잖아. 서울 사건의 진실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야. 그중에 몇은 벌써 갔고. 이젠 장선욱과 나, 최정을 제외하면 아는 사람이 없어. 우리만 입을 다물면 영원히 묻힐 거야.”

수혁은 무거운 한숨을 토했다.

“아줌마, 지금 보니까 무서운 사람이네. 아무리 애국심이 없다고 하더라도 인류의 적 앞에서 그런 소리 막 하고. 정신 감정 다시 받아야 하겠어.”

“누구에게나 속죄할 기회는 주어져야 해. 그게 아무리 인류의 적이라도. 그게 우리 성질 더러운 꼬맹이라면 더욱. 내가 애국심은 없어도 인류애는 조금 있거든.”

심 박사가 조소했다.

“인류애 좋아하시네. 이렇게 살면서 죗값 갚으란 거잖아.”

“뭐 그렇게 생각해도 좋고.”

수혁은 조롱조로 덧붙였다.

“재생력 때문에 신체적 처벌은 불가능하니까. 그래서 정신적 처벌을 떠올렸을 테고. 김윤조 같은 또라이 새끼를 붙여서 평생 괴롭히면서 한편으로는 목숨 계속 부지시키면서 인류를 위해서 우주 괴물 새끼들도 처리하고 일석이조야. 아주 멋져. 훌륭해. 과연 천재다운 발상이야.”

“수십만을 증발시킨 괴물 새끼에게 자율 사형은 너무 관대한 처분이긴 하지. 너 같은 새끼는 죽을 때까지 고생 좀 해 봐야 해.”

그 말에 심 박사 악의인지 선의인지 헷갈릴 대답을 돌려주었다.

“인류애 두 번 발휘했다가는 아주 날 재생도 못 하게 난도질하겠다, 아줌마.”

“어차피 가이드 바꾸려고 했잖아. 기왕 이렇게 된 거 김윤조 버전2로 여기고 잘해 보는 게 어때?”

미친 소리에 수혁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게 사람이 할 말이야? 이 못돼 처먹은 아줌마야.”

“틀린 말은 아니잖아. 너 위한답시고 뇌까지 수정한 애한테 가이드 바꾸니 마니 하면서 괜히 상처 주지 말고 그냥 이대로 살아. 네 업보라고 생각하고.”

반박할 말이 없긴 했다.

수혁은 주먹을 꾹 쥐었다. 은은한 기세로 인해 발밑 콘크리트에 금이 쩌적 갔다.

“성질머리 계속 그따위로 부리다가 말년에 곱게 못 죽을 거다.”

“알아.”

더는 할 말이 남아 있지 않았다. 수혁은 더는 여기 있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몸을 돌리자 심 박사가 한 발짝 나섰다.

“어디가?”

“내 죗값 마주하러.”

냉소를 남긴 채 수혁은 들어왔던 방식 그대로 연구소를 떠났다.

휑하게 몰아치는 바람이 심 박사를 흔들었다. 나부끼는 몸을 감당하지 못한 채로 빈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늦게 머리가 핑 돌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래도 차도가 없어서 느릿느릿 몸을 움직여 각성과 진정 효과가 있는 약물을 조합했다. 주사를 맞은 후 의자에 다시 축 늘어졌다.

손바닥으로 차갑게 식은 뺨을 문질렀다. 하도 흥분했더니 이젠 울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못된 새끼.”

축축한 숨을 토해내기를 십여 분쯤 했을 무렵, 연구실 출입문 앞에서 알림이 들어왔다.

-나야. 문 열어.

최정이었다. 움직일 힘도 없기에 심나연은 음성 명령으로 문을 열었다.

“강수혁 왔지?”

최정은 들어오자마자 주변을 살폈다. 박살 나서 흩어진 캐비닛 하나에 바닥에 간 실금 두어 군데를 제외하면 연구실 안은 생각보다 멀쩡했다. 그 중간에는 심나연이 반쯤 넋이 나간 채 앉아 있었다.

“휴가 잘 가놓고 왜 왔대?”

“그냥 평소처럼 땡깡이지. 눈치도 없는 새끼. 거기까지 가서야 김윤조 변한 걸 알아차리다니.”

그에 최정은 상황을 파악하고 혀를 찼다. 그 관련으로 찾아온 것치고는 후폭풍이 제법 얌전했다.

“그래서 너는 뭐랬는데?”

“김윤조가 그런 거라니까 그럼 애초에 가이드를 왜 만들었냐고 하도 화를 내서 나도 홧김에 다 말했어. 구속 장치에 자폭 기능 없어서 가이드는 일부러 붙인 거라고.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그냥 있는 대로 살라고 했어.”

“거기까지 다 말하다니.”

최정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북북 문질렀다.

왜 그랬냐고 역정을 내고 싶어도 심나연이 너무 지친 상태라 그러지 못했다. 근처에는 막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주사 총도 있어 더욱 그랬다. 대신에 긴 한숨을 토했다.

“앞으로는 어떨 것 같아?”

“두고 봐야지.”

그러고는 심나연은 말이 없었다.

“그런데 김 준위 말이야. 의도가 뭐래?”

“의도랄 것도 없어. 이동형에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이럴 일은 없었는데 중간에 인큐가 파괴돼서 남의 나라 장비까지 썼잖아. 당시엔 김윤조 살리는 게 최우선 목표였으니 뇌까지 포함해서 전체 재생에 들어간 거고. 그러면서 윤조의 잠재의식이 반영되었을 뿐이야.”

한 박자 쉰 심나연은 지친 목소리를 이었다.

“망나니 말로는 앞으로 걸맞게 대우하겠다고 했대. 그게 올바른 가이드의 태도라나. 무의식중에 미안함이 제법 있었나 봐.”

“미안할 사람이 따로 있지. 김 준위는 그냥 군 상부 명령에 따른 것뿐이고 무엇보다 강 소령에게 몇 차례나 죽을 뻔했잖아. 상관 몰라보는 거야 뭐 김 준위만 그래? 강 소령이 더 하지.”

그에 심나연은 고개를 들고 힘없이 웃었다.

“강수혁에게는 안 통하는 말이잖아. 망나니 자식이 저지른 짓을 다 아는 나도 이렇게 마음이 쓰이는데 김윤조는 어떻겠어. 하물며 애인이기도 하고.”

최정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강수혁은 아직 한창 응석을 부릴 나이에 전장에 섰다. 누구는 입학식을 할 나이에 부모 손을 잡고 새 교실에 첫발을 들이는 대신 유례없는 소형 전투복을 입고 처음 외계인을 맞닥뜨렸다. 졸업식을 할 나이가 되어서는 축하 꽃을 받는 대신에 누구나가 두려워하는 트리플 S 등급을 받았다. 그리곤 본격적인 전투 투입이 시작되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보통 인간으로서 삶을 누려보지 못한 고독한 아이는 너무 강하기에 함부로 동정하지도 못한다.

심나연처럼 천재 에스퍼도 아닌 주제에 트리플 S급을 상대로 동정하는 건 주제를 한참 넘은 짓이지만, 가끔 최정은 그 주제넘은 짓을 하고야 만다.

* * *

쏴아아아.

윤조는 머리 꼭대기에서 흘러내리는 온수를 한참 맞았다. 아까 소닉붐에 맞아 차가운 바닥에 나뒹군 탓에 뭉쳤던 근육이 풀렸다. 근육 이완제를 쓰거나 혹은 인큐 15분 정도면 금방 복구되지만, 이 낯선 외딴섬에서 시행 가능한 조치는 온수를 이용하는 전통적인 수단뿐이었다.

온탕에 오래 몸을 담가도 좋은데 강수혁이 언제 돌아올지 몰라 조금 긴 샤워를 택했다.

물을 맞으면서 윤조는 조금 전 있었던 일을 복기했다.

제 행동에서는 딱히 이상을 찾지 못했다.

오히려 매우 적절하다고 평했다. 전투로 인한 에스퍼의 성욕 해소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나섰으며, 그의 다소 거친 언행에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히 대처했다. 중간에 불필요한 부상을 입지 않도록 미리 손을 써 두기도 했다.

‘왜 화가 난 걸까.’

피도 눈물도 없는 최악의 병기라는 이미지와 다르게 강수혁은 상당히 가정적이면서 서민적이기도 했다. 노출에 민감한 만큼 일상적인 상식 수준은 일반 군인보다 강한 편이며, 동시에 집안일에 꼼꼼하고 또 생활 방식에 관해서는 보수적인 면모도 강했다.

종합하자면 강수혁은 인간적이었다. 적어도 특수작전사령부 내에서는 가장 그런 편이었다.

가정적이고 보수적이라는 결론에 이르자 강수혁이 행위 중에 갑자기 화가 난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인격 수정은 일상적인 변화라고 가볍게 치부하기 어렵다.

아무리 일반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에스퍼-가이드라지만 인격 변화를 쉽게 접하지는 않는다. 무엇보다 강수혁에게 사전 통보 없이 이루어진 갑작스러운 변화라 더욱 그랬다.

뇌의 리셋은 불가피한 과정이었다.

두뇌 부상으로 인해서 너무 많은 뇌 조직이 파괴되고 새로운 조직으로 대체되었다. 기존에 남은 뇌 조직과 자연스러운 연결을 위해 전반적으로 다시 조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에서 기존에 손상된 뇌 조직까지 수정되면서 후유증으로 남은 감정 과잉과 충동 장애가 사라졌다.

뇌 손상으로 인해 소실된 기억은 대부분 AI 기록으로 보충했다. 기억 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화면 자료를 통해 과거 기억을 재흡수하는 과정과 비슷했다. 그러다 보니 본인의 기억이긴 한데 실감이 떨어졌다.

과거에 대한 거리감은 강수혁을 향한 적개심을 상당히 덜어냈다. 그래서 한결 침착한 대응이 가능했다.

‘기존 일상으로의 회복을 중점으로 현재 장점을 어필해야겠군.’

윤조는 차분하게 결론을 내린 후에 욕실을 나왔다. 안가에 준비된 옷을 입곤 주방으로 향했다. 냉장고 안에 든 식자재를 가늠한 후에 위성 AI를 호출하여 밥 안치는 법과 함께 된장찌개 레시피를 검색했다.

안가에는 곧 구수한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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