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94화 (171/256)

94화

이게 무슨 개소리야?

수혁은 자신이 무엇을 들은 건지 명확하게 인지하기 어려웠다.

“다시 말해 봐. 뇌를 그러니까 네 머리를 어떻게 했다고?”

“리셋하여 인격 오류를 수정했습니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었다.

“그…… 그게 가능해?”

“네.”

군더더기 없이 딱 떨어지는 대답에 수혁의 뇌에 스턴이 우렁차게 걸렸다. 갖은 단상과 몰아치던 감정이 깔끔하게 말소되었다.

“아, 그렇구나. 그게 막…… 되는 거구나.”

머리가 하얗게 비니까 말이 제대로 안 나왔다. 사람이 보고 듣고 말하는데 일말의 감정이 없이 기계적으로 반응할 수도 있음을 처음 알았다. 또한 사람이 너무 놀라면 성욕이고 나발이고 없다는 것도 처음 알았다.

자각한 이래로 국운(國運)을 짊어진 용광로처럼 천둥, 비바람이 몰아쳐도 꺼질 줄 몰랐던 김윤조를 향한 욕구가 분무기에 직격 맞은 촛불처럼 푸시식 꺼졌다. 볼품없이 쪼그라든 제 음경엔 당황한 주인의 시선뿐이 아니라, 어쩌면 주인보다 더 음경과 친밀했던 사람의 의아한 눈빛까지 닿았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

떨떠름하다 못해 우왕좌왕하던 수혁은 소파 밑으로 쿵 떨어졌다. 작은 충격이 얼어붙은 몸을 일깨웠다.

수혁은 벌떡 일어서서 내피 상의로 사타구니를 닦고 팽개쳤다. 내피 하의만 챙겨입은 다음 곧장 전투복을 챙겨 들고 빠르게 현관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알몸의 가이드가 뒤를 따라왔다.

“특작부.”

“저도 같이 갑니까?”

전투복을 걸친 수혁이 뒤를 돌아봤다. 수치심을 모르는 인형 새끼는 털도 없는 알몸으로 현관 밖까지 걸어 나왔다.

“아니. 넌 여기 있어. 섬 밖으로 나갈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고.”

“그럴 수단이 없습니다만.”

“그러니까. 여기 처박혀 있으라고.”

저도 모르게 짜증이 벌컥 났다. 냉랭한 어조에 놈은 얼굴을 살짝 굳혔다. ‘원래’ 연두부답게 하찮은 깽깽이질이라도 할 건가. 내심 기대했다.

“알겠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돌아오는 대답은 갓 성형(成形)을 끝낸 고무의 냄새 같았다. 비인간적이고 역겨웠다.

“시발.”

쾅!

욕설과 함께 수혁은 즉시 음속으로 날아올랐다. 강력한 소닉붐이 안가 마당을 휩쓸었다. 무방비하게 서 있던 흰 몸뚱이 또한 현관 안 어딘가로 날아갔다.

너무 배려가 없었나.

반사적으로 뜨끔 하는 마음이 들었으나 이미 가속하여 섬이 저 멀리 멀어져 버린 마당에 다시 돌아가긴 뭣했다. 마침 구른 참에 미친 새끼가 한 번 더 미쳐서 제 자리로 돌아오면 더 좋고.

수혁의 전투복에는 초고성능 위치 추적 장치가 달려 있다.

남해로 내려오기로 했을 때 최정이 내건 조건이었다.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어디에 있는지 정도는 알려 달라는 얘기였다. 예전 같으면 어림도 없는 수작이라며 최정을 날리고 전투복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을 거다.

그러는 대신 수혁은 순순히 조건에 합의했다. 김윤조와 함께 누리기 위해서는 사소한 사안은 적당히 받아들이고 가는 편이 좋기 때문이었다. 사실상 대단히 화가 나지도 않았다. 물귀신 같은 군부 놈들에 대한 일상적인 언짢음이 다였다.

언제부터 화를 덜 내게 된 걸까? 명확한 과정은 잘 모른다. 다만 이유만큼은 확실했다.

김윤조.

상상을 초월하는 괴상한 연두부 새끼와 얽힌 이후로 수혁의 단조로운 일상은 빠르게 해체되었다. 그리고 기대치 못한 방식으로 재조립되었다.

팍팍하고 재미없던 수혁의 삶을 헛웃음을 더한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주범(主犯)이 갑자기 그런 적 없는 척 발을 뺀다고?

“누구 마음대로.”

쾅!

특작부의 구형 비행장에 또 다른 소형 크레이터가 생겼다. 이번에는 뛰어나오는 놈도 없다.

수혁은 곧장 심 박사의 연구실로 향했다. 들어가는 도중에 있는 자동문은 수혁의 속도에 맞춰 알아서 개폐되었다. 안에서 알고 조작한 거였다.

초인종을 눌러 달라는 우스꽝스러운 안내가 붙은 연구실의 두꺼운 문 또한 수혁이 물리적으로 돌입하기 전에 알아서 열렸다.

끼기긱.

스키드마크를 내며 정지한 수혁은 몸을 일으켜 세우기가 무섭게 이 사태의 책임자를 향해 소리쳤다.

“아줌마! 미쳤어?!”

막 몸을 도린 심 박사가 수혁을 향해 대답했다.

“멍청한 놈아, 이제 알았냐?”

심 박사는 남해로 희희낙락하며 떠난 개망나니가 갑자기 뚜껑이 열려 연구실로 쳐들어온 이유를 이미 알고 있었다.

명확한 이유를 말하기도 전에 대답하는 꼴에 물먹은 휴지처럼 흐물거리던 인내심이 박살 났다.

“이 미친 아줌마야!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않아도 인간 같지 않은 새끼를 왜 그 지경으로 만드는데!”

“내가 한 게 아니야.”

“시발! 아줌마가 한 게 아니면 누가 한 건데!”

성난 에스퍼가 고함을 치는 동시에 연구실 내부가 떨렸다. 무의식적으로 능력을 발산한 덕분이었다. 홍채가 벌써 진주색으로 변했다. 머리카락도 저절로 물결쳤고 무엇보다 실루엣을 따라 은은한 오로라가 발산되기 시작했다.

삐이이잉!

연구실 AI가 비상사태를 선언했다. 내부 불이 꺼지고 붉은빛이 왱왱 도는 즉시 외부에서 콜이 들어왔다.

-박사님! 무슨 일입니까?

본부 내 시설관리 책임관이었다.

“실험하다가 작은 실수가 있었어요. 여기 나밖에 없고 연구실 내부 무사합니다. 물론 나도 멀쩡하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지금 비상사태 철회합니다.”

-무사하시니 다행입니다만, 일단 사람을 보내서 내부 확인은 해야 합니다. 절차니까요.

“걱정하지 말라는 말, 못 알아듣습니까? 내 연구실은 내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문제 있으면 이쪽에서 먼저 연락할 겁니다. 연구실로 와도 문 안 열어 줄 거니까 헛걸음하지 말아요.”

-아, 그럼…… 알겠습니다.

연구실에 오지 말라는 심 박사의 강한 요구에 책임관이 물러섰다.

연구실에서 각종 사고가 끊이지 않아 익숙하기도 했고, 또 심 박사의 심기를 거슬렀다가는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치졸한 보복을 당할 수 있다. 군인이긴 하지만, 군인 같지 않고 괴팍하다 못해 해괴한 천재로 통용되는 심나연의 비비 꼬인 인간성은 특작부 내에서도 자자해서, 개망나니 강수혁과 순위를 다투는 인물이었다.

또 심 박사의 연구실은 대단히 중요한 기밀 시설이었다. 웬만한 벙커버스터로는 뚫을 수도 없는 콘크리트와 철판 덩어리로, 안에서 문을 열어 주지 않으면 밖에서는 사실상 뚫을 길이 없는 요새였다.

분을 제대로 삭이지 못하고 씩씩대는 위험한 에스퍼와 단둘이 있으면서도 심 박사는 두려운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통신할 때보다 더 느슨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김윤조야.”

“뭐라고?”

“인격 수정한 거 말이야.”

격노에 잠식된 수혁은 단숨에 심 박사의 멱살을 잡았다.

“대가리가 나간 새끼가 그런 짓을 어떻게 하는데!”

거구의 에스퍼에 비하면 반절이나 간신히 될까 싶은 중년 여성은 발끝으로 간신히 섰다. 얇은 주름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정확하게는 김윤조에 동조한 AI가 했지.”

부들거리는 수혁을 향해 심 박사는 또박또박 다시 말했다.

“AI가 김윤조의 강력한 의사에 따라 재생 중 인격을 자체 수정했어. 김윤조가 명령하고 AI가 수행한 결과.”

거듭 충격을 받은 강수혁의 손아귀에서 한결 힘이 빠져나갔다.

“그게 말이 돼? 의, 의식이 없다고 했잖아.”

“사람에게는 말이야 잠재의식이란 게 있거든.”

못 알아듣는 수혁을 향해 심 박사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김윤조가?”

멍한 질문에 심 박사는 낮게 한숨 쉬었다.

창백한 손이 멱살을 잡은 거친 손을 슬쩍 건드렸다. 멱살을 틀어쥐었던 에스퍼의 손은 저항 없이 풀렸다. 뒤꿈치를 제대로 디딘 심 박사는 저도 모르게 살짝 휘청였다. 멀미가 인 탓이었다.

“며칠 동안 AI에 있는 모든 재생 로그를 다 털어서 도출한 결론이야. AI가 김윤조의 잠재의식에 따라 인격 수정을 감행했어. 확실해.”

“같잖은 거짓말하지 마.”

수혁은 심 박사의 말을 믿지 못했다. 김윤조가 그런 일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너, 물리적인 인격 수정이 얼마나 어려운 줄 알아? 까딱하면 바로 뇌사 혹은 사이코패스행이야. 그런 짓을 내가 그것도 내 가장 귀중한 창조물에다 대고 하겠어? 사전 시뮬레이션이나 테스트도 없이? 네가 김윤조 죽이려고 들었을 때 전신 재생을 하면서도 뇌는 최대한 안 건드렸어. 자칫하다가는 간신히 완성한 가이드 시스템 자체가 날아가니까.”

심 박사는 누구보다 가이드 김윤조에게 진심이었다. 수혁이 갓 완성된 가이드를 공격한 대가로 극심한 페널티를 맞아 뇌가 곤죽이 되어 가고 있을 때조차 김윤조가 공격당한 것에 관한 분을 참지 못하고 쓰러진 수혁에게 발길질한 위인이었다.

“……왜?”

앞뒤를 다 잘라먹은 막연한 의문이었지만, 심 박사는 강수혁이 무엇을 묻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김윤조가 왜 그런 잠재의식을 가졌냐고 묻는다면…… 나도 모르지.”

“…….”

“본인은 아무 말도 안 해?”

심 박사의 물음에 수혁은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로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오로라는 어느 틈에 사라졌다. 진줏빛으로 빛나던 눈동자는 블랙홀처럼 까맸다.

“후유증으로 변질된 인격을 바르게 수정했으니 앞으로는 적절하고 합리적인 대우를 할 거래. 그게 원래 가이드래.”

“잘은 모르겠지만 네가 작전에 나서는 거 보고 뭐 심경의 변화가 있었나 보네. 너 함부로 대한다고 이율희 함장한테 대든 것도 그렇고. 그럴 수 있지. 그래, 그런 거겠네.”

심 박사가 혼자서 결론을 내렸다.

“휴가 끝나면 둘 다 연구실로 와. 김윤조 심리 점검하고 수정 인격에 맞춰서 페어링 세부 조정하자.”

“그게 다야?”

수혁이 허탈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럼 뭐? 다른 거 바라는 거 있어?”

애써 침착을 유지하는 심 박사와 달리, 수혁은 넘치는 감정을 전혀 제어하지 못했다. 조금 전처럼 분노에 차서 능력을 발산하진 않았다. 그럴 의지조차 사라졌다.

무거운 침묵이 이어졌다.

강수혁은 고개를 떨군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평소 같으면 할 말 다 끝났으면 귀찮게 하지 말고 얼른 꺼지라고 소리쳤을 심 박사도 묵묵히 서 있기만 했다.

전투복 장갑을 낀 손이 빽빽한 흑발을 쓸어넘겼다. 훤한 이마가 드러났다. 식은땀에 살짝 젖은 이마 아래 잘생긴 눈썹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바닥을 향한 새까만 눈동자는 태풍을 맞은 부표처럼 위험하게 떨렸다. 구겨진 입술이 달싹였다.

“아줌마, 나한테 왜 이래?”

이윽고 들린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지옥으로 꺼질 듯 낮았다.

“내가 뭘?”

“애초에 왜 그랬어? 가이드 같은 걸 왜 만들었는데? 가이드 만들지 않았으면 이런 일 없잖아.”

어금니를 악문 음성이 위험하게 울렸다.

“네가 만들게 했잖아.”

“그러니까 왜? 가이드까지 만들 이유가 뭔데? 내가 그렇게 좆같아?! 그래서 이런 빌어처먹을 엿을 먹이지 않으면 속이 안 풀려? 도대체 왜! 내가 아줌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귀가 먹먹할 만큼 크게 지른 고함에는 은은한 물기가 섞여 있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