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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88화 (165/256)

88화

-무슨?

정작 경악성은 노리스에게서 터졌다.

피가 흐르는 어깨를 추스르는 그의 충격 어린 시선이 총구에서부터 팔을 거슬러 윤조의 두 눈까지 올라왔다.

-가…… 가이드가 어떻게 에스퍼를? 너는 그의 가이드가 아닌가?

“가이드이며, 강수혁 소령님의 가이드 맞습니다.”

윤조는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런데 어떻게 에스퍼를 죽인 거지? 그것도 본인의 에스퍼를? 그건 가이드에게는 있을 수 없는…… 금기야.

“맞습니다. 저는 가이드로서 자기 보호 목적 외에는 에스퍼 강수혁 소령님에게 어떤 상해를 입히거나 죽일 수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를 죽인 거지?

“죽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를 보호할 뿐입니다.”

덤덤하게 대답하는 윤조를 보며 노리스의 얼굴은 완연하게 굳었다. 분명히 목에 총알 두 발을 처박았다. 두 번째는 의식이 있음을 확인하고 발사했다. 어떤 에스퍼도 목을 당하면 재생하기 어렵다.

-죽여 놓고 보호한다고?

끔찍한 고통에 신음하는 동료를 죽이는 경우가 있다. 회생 불가능할 때 고통 없이 가라고 저지르는 전쟁의 참혹상이다.

하지만 강수혁은 의식이 있었다. 하다못해 응급 처치라도 시도해야 하지 않는가? 아니 애초에 강수혁을 위급 사태에 빠트린 건 가이드 본인이 아닌가?

-너는 가이드가 아니야.

“그렇습니까? 하지만 그 외에는 강수혁 소령님을 지킬 방법이 없었습니다.”

충격을 금치 못하는 노리스를 향해 에이버리가 심나연이 제 두뇌에 저지른 짓을 알려 왔다.

빼앗기느니 망가뜨려 버린다는 비틀린 소유욕을 제 뇌를 향해 발휘할 인간인 줄은 차마 몰랐다.

-심은 미쳤어…… 완전히 미쳐 버렸어.

트리플 S급을 빼앗기느니 처리해 버리는 가이드와 그 제작자를 미군에서 감당할 수 있을까?

두뇌 강화 A급에 대한 큰 열망이 한 김 식었다. 천재지만 상식을 초월한 미치광이라면? 현재의 베타클럽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파파 노리스. 지금 에스퍼 팀이 승선했습니다. 시간을 끄십시오.

에이버리가 알려 왔다. 노리스가 침을 꿀꺽 삼키는 동안 흰색 사이코패스의 총신은 노리스의 미간을 향했다.

“가이드는 국제법 보호를 받는 자산입니다. 항복 의사를 밝힌다면 공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항한다면 국제법보다 우선하는 자국법에 따라 당신의 처우를 결정하겠습니다. 우리 한국은 에스퍼에 대한 타 국가군의 납치, 조작 및 각종 탈취, 위해를 목적으로 한 공격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당신은 대한민국 육군 특작부 소속 에스퍼 강수혁을 한국군 당국의 승인 없이 임의 조작하였습니다.”

윤조가 담담하게 경고문을 읊었다.

노리스는 어떤 의사도 밝히지 않았다. 쓸데없는 반항도 하지 않는 대신에 엉뚱한 말을 꺼냈다.

-가이드가 되기 전에 뭘 했는지 물어봐도 되나?

에스퍼 팀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려는 것이었다.

“군인이었습니다.”

-군인이라. 뛰어난 전투 실력은 그때 쌓은 건가?

“답변하지 않겠습니다.”

노리스는 질문에 꼬박꼬박 대답하는 윤조를 보며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시간을 끌려는 그의 속셈을 윤조가 알고 있음을 노리스도 알고 있다. 에스퍼 팀 전체를 상대할 자신이 있는 것일까. 혹은 노리스를 인질로 잡아 탈출을 노리는 걸 수도 있다.

미 함대는 이미 둘로 갈라져 한국 항모 전대를 나포하러 갔다. 노리스에 대한 공격을 미군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 F형 게이트를 상대하느라 완전히 너덜너덜해진 한국 항모 전대는 미 항모 전단을 이기지 못할 거다.

이후 국제 분쟁이 일어나도 상관없다.

강수혁이 죽은 이상, 노리스가 먼저 뭔가를 했다는 증거는 남지 않는다. 그마저도 심과 이 사이코패스 가이드가 캐나다 항모를 무사히 탈출한다는 가정하에서나 가능하다.

시간을 끌수록 불리할 텐데도 기계 같은 면상을 한 가이드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현재 에스퍼 팀이 습격 대기에 있습니다. 신호하면 엎드리십시오.

에이버리의 전언에 노리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윤조가 입을 열었다.

“일어나십시오.”

-보시다시피 늙은 몸이라 총상을 감당할 수 없다네. 계속 앉아 있으면 안 되겠나?

노리스는 일어났다가 제 타이밍에 주저앉을 자신이 없었다.

“당신에게 한 말이 아닙니다.”

-뭐라고?

늙은 가이드가 의아한 듯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일어나십시오, 강수혁 소령님.”

노리스의 시선이 홱 돌아갔다.

경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피로 흥건한 시체만 보였다. 이번엔 다시 미친 가이드를 봤다. 그는 한쪽 발로 강수혁의 발치를 툭툭 찼다.

“죽은 척 그만하십시오. 에스퍼 공격팀이 가까이 있습니다.”

담담한 문장이 끝을 맺자마자 피에 젖은 시체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노리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어떻게 알았어?”

살아난 시체가 심지어 말도 했다.

“조금 전부터 다채로운 뇌파가 제 머리를 아프게 하고 있으니까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주고받는 대화에 노쇠한 가이드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 하나님 맙소사.

총에 맞은 목이 불편한 듯 좀비가 고개를 이리저리 꺾었다. 작은 물체가 부활한 시체의 목에서부터 굴러떨어졌다.

도르륵 툭.

피에 젖은 탄알이었다.

노리스가 마지막 힘을 모아 일어나는 에스퍼를 다시 통제하려고 했다. 그때 총구가 노리스의 미간에 닿았다.

“내 에스퍼를 다시 탈취하면 그때는 쏩니다.”

노리스의 사고가 정지했다. 이건 상식적으로 감당할 수가 없는 범위였다.

-표적 재생! 즉시 발포!

노리스의 생각을 읽은 에이버리가 다급하게 외쳤다. 동시에 노리스는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탕탕탕! 위이잉!

사방에서 대구경 총탄과 중형 레이저 건이 날아들었다. 심지어 소형 로켓도 있었다. 배 안에서 로켓을 쏘다니!

쾅! 퍼퍼펑!

길고 긴 총격이 이어졌다. 총탄과 레이저로 인한 연기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난사 중에 누군가 노리스를 후방으로 끌어냈다. 고글을 쓴 에스퍼 병사였다.

-머리를 숙이십시오.

노리스를 다소 거칠게 보호하면서 그들은 잘 훈련받은 특수부대처럼 대형을 맞춰 집중 사격을 이어 갔다.

가진 총알을 거의 퍼붓고 중형 레이저 건의 배터리를 갈아 끼운 후, 에스퍼 팀의 리더가 공중에 주먹을 들어 올렸다. 정지 신호에 모두가 일제히 멈췄다. 사방에서 다가온 팀은 총구를 여전히 겨눈 채로 자욱한 연기가 빠지길 기다렸다.

철판으로 만든 거대한 알이 공중에 떠 있었다.

퓽. 퓽.

작은 물체가 화약 구름을 뚫고 사방으로 날아갔다. 철판 파편이었다.

억! 으악! 컥!

사방에서 단말마가 이어졌다. 에스퍼 팀이 쓰러진 건 순식간이었다. 당황한 리더가 퇴각을 명령하기도 전에 리더마저 당했다.

후방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노리스는 뒤를 지키던 백업 팀원과 함께 빠르고 대피를 시작했다. 하지만 백업 팀도 오래가지 못했다. 뒤이어 날아온 파편이 그들의 등을 꿰뚫어 버렸다.

컥!

팀원이 넘어지면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자동 소총이 발사되었다.

탕타타탕!

-악!

그건 하필 노리스의 허벅지를 뚫었다.

뒤이어 침묵이 이어졌다. 더는 유용할 부대가 없다. 남은 길은 하나뿐이다.

-모든 인원은 당장 항모에서 탈출하라. 당장 탈출하라.

캐나다 사령관의 명령이 방송되었다.

-우리는 항모를 버릴 겁니다. 파파 노리스, 당장 탈출하십시오. 곧 미 해군 전투기가 날아옵니다.

에이버리가 경고했다. 공중 폭격으로 항모와 함께 전부 날려 버릴 생각이었다.

노리스는 절뚝이며 앞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피를 너무 많이 흘러 금방 쓰러지고 말았다.

근처에 갑판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저 안에 타기만 하면 어떻게든 탈출할 수 있다. 죽을힘을 다해 간신히 엘리베이터에 닿았다. 몸을 일으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는 때였다.

피에 젖은 검은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을 가렸다. 어두운 그림자가 노리스 위로 쏟아졌다.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고개를 옆으로 조금 돌렸을 뿐인데, 놈은 유령처럼 둥둥 뜬 채로 노리스를 향해 고개를 비틀었다.

“영감. 우리 계산할 것이 있잖아. 그냥 가면 섭섭해.”

트리플 S급이 히죽 웃었다.

* * *

“뭐라고? 미 해군이 우리를 향해 무조건적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고?”

이율희는 보고를 듣고 놀랐다. 동맹군이 다른 동맹군을 향해 무장 해제를 요구할 일이 뭐가 있는가? 이건 선전포고다.

“전투에 대비하라.”

일단 명령을 내렸지만. 현재 제주도 함대는 전투 능력을 상실했다.

드론도 거의 손실되었고, 레이더도 완전히 망가졌다. 침몰하지 않은 것이 용한 지경이었다. 과열을 간신히 피한 레이저 함포가 더러 남아 있긴 하지만, 최신 함포를 갖춘 미군을 상대로는 나무젓가락을 들고 호랑이에 맞서는 격이었다.

“미군에 연결해.”

이율희가 명령하자 통신 장교가 채널을 오픈했다.

“나는 제주도 함대 사령관입니다.”

-나는 미 해군 항모 전단 사령관입니다. 제주도 함대에 전합니다. 항복하십시오. 불필요한 희생을 피하십시오. 항복을 권고합니다.

번역기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일단 이러는 이유나 압시다.”

-귀하는 이유를 이미 알고 있습니다.

“모르니까 묻는 겁니다. 이유가 뭡니까?”

-한국군 소속 에스퍼가 우리 측 가이드를 공격했습니다. 가이드는 국제법에 따라 보호됩니다. 한국군 에스퍼가 가이드에 대한 공격을 멈추지 않기에 우리에겐 이 방법밖에 없습니다. 다시 한번 권고합니다. 항복하십시오.

가이드 공격 행위가 대단히 엄중한 가해 행위임은 맞다. 가이드는 에스퍼 부대의 핵심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 때문에 동맹국을 상대로 아예 전면전을 각오한다고? 가이드가 누구길래?

“공격한 에스퍼는 누구입니까? 그리고 공격당한 가이드는?”

-공격자는 한국군 소속 에스퍼 강수혁. 그리고 공격당한 가이드는 미 해군 제독 로건 노리스.

그 말에 이율희는 당장 수도(手刀)로 제 목을 그었다. 통신 장교가 즉시 송신기 마이크를 죽였다.

“이 미친 에스퍼 새끼가! 하필 건드려도 노리스를 건드려?”

이율희가 분통을 터트렸다.

노리스는 미 해군의 자존심 그 자체였다. 무수한 전과를 올린 전설적인 가이드. 그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미군은 핵전쟁도 불사할 거다.

남의 기밀 시설을 빌려 쓰러 간 주제에 어떻게 전설적인 영웅을 건드리게 된 건지, 경위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이율희는 제 의자 손잡이를 쾅 내려치면서 육성으로 외쳤다.

“장세인 대위!”

-네. 함장님.

“심 대령에게 무슨 짓을 벌이고 있어도 즉시 멈추고 당장 귀환하라고 해! 미국이랑 한판 붙기 직전이야!”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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