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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86화 (163/256)

86화

수혁은 두 팔을 늘어뜨리고 조용히 정면을 응시했다.

‘기습하려면 빨리하든가.’

놈들이 망설이는 이유도 짐작은 갔다.

발아래 동료를 어떻게 감지하고 작살을 냈는지 알지 못해 혼란스러울 터였다. 저들은 수혁이 가진 청각을 비롯한 오감 범위가 어디까지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이럴 땐 연막이나 미끼를 쓸 가능성이 크다. 화염 능력자가 있으니 불길을 갑자기 피워 올린다거나, 혹은 다른 어떤 곳에 큰 소음과 진동을 일으켜 수혁을 혼란스럽게 할 거다.

푸확!

생각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무시무시한 불길이 수혁의 주변에 번졌다. 직경 1미터 정도 되는 불의 원은 금방 안으로 좁혀져 왔다.

‘쉬운 새끼들.’

속으로 비웃으면서도 수혁은 짐짓 놀란 듯 허둥댔다. 사실 화상을 감수하고 바로 걸어 나가도 상관없다. 피부 재생이야 금방 되니까. 그냥 심심해서 연기 좀 했다.

“우악! 뜨거워!”

아까 롭슨이 그랬던 것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면서 팔로 얼굴을 가렸다. 그러는 사이 전창의 철판이 갈라지면서 수혁의 위로 떨어졌다.

쿵!

묵직한 타격음이 항모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다.

쿵! 쿵!

뒤이어 철판이 더 날아왔다. 이미 수혁을 덮친 철판 위로 척척 쌓였다. 불은 계속 화르르 타올랐다. 철판이 열을 받아 주황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잠깐. 밑에 조니가 있어.

-아래층에서 천장을 파내지.

놈들이 뭐라고 지껄이더니 아까 수혁이 작살내 놓은 놈을 구출하기 위해 아래로 이동했다. 순간이동 능력자였다.

화염 능력자는 계속 불길을 피웠다. 그러는 사이 아래로 이동한 순간이동 능력자와 염력 능력자는 열기가 느껴지는 부근 천장을 뜯었다. 붉은 피가 훅 끼치면서 엉망으로 당한 동료가 바닥으로 낙하했다. 염력 능력자가 그를 캐치하는 사이 순간이동 능력자가 천장을 관찰했다.

-이봐.

-왜?

조니를 추스른 상대는 동료가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으로 시선을 던졌다. 붉게 변한 천장 철판 중앙에 거대한 사람 모양 그을음이 있었다.

-몸이 증발했나 보군.

-너무 과했어. 우린 그를 생포해야 했어.

-이건 조니의 복수야. 생포라니 웃기는 얘기지.

-그런데 조니의 위치를 어떻게 알아낸 거지? 그건 앞으로도 비밀로 남겠군.

-심이 있잖아. 그녀가 알겠지.

놈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있을 때였다.

‘아줌마를 노리는군. 근데 우리 아줌마는 연두부 새끼 때문에라도 못 줘.’

철판 사우나를 즐기던 수혁은 어떤 극적인 방법으로 모습을 드러내 등신 패거리를 놀라게 할까 궁리하고 있었다.

끼익.

수혁의 주변 철판이 열기를 견디다 못해 흐물거리더니 아! 하는 사이에 아래로 추락했다.

쿵.

사람 모양 철판이 뚝 떨어지자 막 몸을 돌렸던 놈들의 고개가 동시에 천장으로 향했다. 서로 어색한 시선이 교차했다.

위층 기준으로 바닥, 아래층 기준으로 천장에 붙어 있던 수혁은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헬로우?”

초면에 통성명까진 아니라도 기본 예의는 갖췄다.

한 놈의 아랫입술이 윗니 아래로 들어가더니 거센 F 단어가 터졌다. 동시에 떨어졌던 철판이 뚜껑처럼 수혁을 덮으려고 들었다. 예의 밥 말아 먹은 양놈들.

“어딜.”

서핑 보드처럼 철판에 올라탄 수혁이 힘으로 내리누르자, 상대 놈은 철판에 대한 지배력을 금방 상실했다. 다른 놈은 요단강을 건너기 직전인 조니를 데리고 훅 사라졌다. 직후 화염 방사기 놈과 다시 나타났다.

수혁을 중심으로 불 쓰는 놈과 힘 쓰는 놈이 사방을 번쩍이며 철판이며 각종 집기며, 불꽃을 날렸다. 순간이동 능력자는 동료들에게 이동 지원을 하면서 간간이 수혁의 허점을 노리려고 들었다.

연계 공격은 꼭 외톨이 맹금류를 능욕하는 까마귀 떼처럼 날쌔서 상당히 성가셨다. 아까부터 치민 짜증이 선을 넘으려고 했다.

수혁은 인근 공기를 모조리 끌어모았다가 폭탄처럼 터트렸다.

쾅!

압축 공기가 터지면서 항모 복도 사방이 원형으로 일그러졌다. 귀찮은 까마귀 놈 하나가 벽에 엉겨 붙은 채로 기절했다. 다른 놈들은 간발의 차로 공격을 피했다.

수혁은 기절한 놈을 둥둥 띄웠다.

“야, 나와. 아니면 이 새끼 사지 찢어 버린다?”

경고에도 반응이 없었다. 혹시 번역이 안 된 것일까?

“유, 노쇼? 디스 다이.”

친절한 설명과 함께 수혁은 경고차 기절한 놈의 왼쪽 대퇴부 관절을 약 240도 꺾어 버렸다. 실제로 찢지는 않았다. 피는 냄새 나고 지저분하니까.

“끄악!”

기절한 중에도 극심한 고통을 느꼈는지 공중에 둥둥 뜬 놈이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완전히 돌아간 다리는 꼭 부러진 곤충 다리처럼 흔들거렸다.

“허, 원 모어?”

이번에는 팔을 꺾었다. 여전히 숨은 놈들의 반응이 없을뿐더러 이번엔 기절한 놈도 반응 없이 축 처졌다.

흥미를 완전히 잃었다. 이딴 놈들 데리고 노느니, 의식 없는 김윤조의 호흡을 세는 편이 훨씬 즐겁다.

사실 아까부터 놈들의 위치는 파악하고 있었다. 하나는 천장. 다른 하나는 후방 대각선 너머에 있었다. 사방이 철근이라 수혁의 능력 범위 안이었다. 맨 처음 끼인 채로 당한 놈을 보고도 저러다니.

‘멍청이들.’

우지끈.

수혁은 인근 철판을 옷감 뜯듯 죽죽 찢어 꼬아 날카로운 창을 만들었다. 한두 가닥이 아니었다. 수십 가닥의 철근이 놈들이 있는 방향으로 갈라져 날아갔다.

당황한 놈들이 창의 접근을 피하려 들었다. 하지만 한두 개도 아니고 수십 개를 어떻게 피하겠는가. 무엇보다 여긴 사방이 철판이었다. 무기로 탈바꿈할 재료가 무궁무진했다.

삽시간에 백여 개로 늘어난 철근은 결국 놈들의 사지를 관통했다.

“끄아아악.”

“큭!”

이미 당한 놈들까지 철근으로 휘휘 감아 매달았다.

사방을 다 뜯어내자 항모 내 시거리가 제법 넓어졌다. 군데군데 기계실과 작업실, 혹은 선실이 있었고 그 안에 있던 캐나다 선원들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얼어붙어 있었다. 심장 뛰는 소리와 침 삼키는 소리가 요란했다.

“헬로우, 아임 파인 땡큐.”

공동 기자회견 때 가끔 짓는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각양각색의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으나 하나 같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기겁하며 각자 소화기(小火器)를 꺼내 수혁을 겨냥했다.

“유, 슛? 유 다이.”

짧은 영어로 친절하게 경고했다. 이렇게 이성적인 제 모습을 김윤조가 봤어야 하는데.

아까와는 달리 캐나다 놈들은 일제히 총을 내렸다. 처음에는 미국 놈들보다 말귀를 잘 알아듣는가 했다.

-강. 에이브리를 대신해 전합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던 놈이 덜덜 떨면서 소리쳤다.

에이브리라는 말에 수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텔레패서 놈이 총구를 내리게 한 모양이었다.

-인큐베이터와 롭슨 대여를 전적으로 승인하는 바이니, 더 이상의 행동은 삼가십시오.

“승인? 그런 거 해 달라고 한 적 없는데.”

가져가겠다고 하면 가져가는 거다. 특작부 내 직원 마트나 캐나다 항모 마트나. 수혁에게는 근본적인 차이가 없다.

-……이거 진짜 말해야 합니까? 지금 전 죽음 직전에 있습니다.

에이버리의 말을 전하던 놈이 애매한 허공을 보면서 항의했다. 공포에 질린 놈의 미간에 한줄기 땀방울이 흘렀다. 놈은 이내 눈을 질끈 감더니 수혁을 향해 외쳤다.

-넌 즉시 죽을 것이다. 빨리 달아나라. 확실한 죽음. 뇌 튀김. 광적인 강아지. 미쳐 버린 사형 집행관. 너의 생명을 수습해라. 이건 심의 전언입니다. 신이시여, 저를 구하소서.

뒤의 두 마디는 놈이 스스로 하는 말이었다. 실제로 놈은 허공에 작은 십자가를 그었다.

“뭐야, 아줌마. 뭔 이상한 소리를…….”

수혁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전언한 놈의 시선이 수혁의 등 뒤를 향했다. 순간 몸을 홱 돌리자마자 손을 뻗었다. 누가 있든 반 작살을 내줄 생각으로. 하지만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몸을 돌리고 손을 뻗는 데는 성공했으나, 등을 기습한 놈을 처리하진 못했다.

그저 손을 허공에 뻗은 채로 수혁은 우뚝 멈췄다. 제 의지는 아니었다. 알 수 없는 작용이었다. 제 신체가 갑자기 남의 물건이 된 듯한 기묘한 감각이 전달되었다.

-이런, 이런.

군복을 입은 웬 영감이 수혁을 보고 있었다. 짧은 곱슬머리는 흰색에 가까운 회색이었고 반대로 피부는 짙은 커피색이었다. 아프리카계였다.

-내 예상을 능가하는군. 놀라워.

상대가 수혁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오기까지 수혁은 어떻게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한 걸까.

거기다가 몸이 계속 움직이지 않았다. 웬만한 능력자는 수혁을 향해 지배력을 행사할 수 없다. 아니 사실상 그런 능력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새끼…… 뭐지?’

당황하는 수혁을 향해 상대가 눈웃음을 쳤다.

-나는 가이드라네.

* * *

-경고. 연결 소실. 에스퍼를 찾을 수 없습니다. 대상 에스퍼 : 강수혁.

위성 AI의 음성이 인큐베이터에 연결된 패드를 통해 흘러나왔다.

“뭐라고?”

심 박사는 깜짝 놀라 패드를 확인했다.

윤조가 의식 불명이라 가이드의 임무를 AI가 전담하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 갑자기 연결이 끊긴다고? 김윤조를 버리고 달아날 놈도 아닌데?

“왜지?”

시스템을 빠르게 훑었다. AI 시스템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연결이 그냥 사라졌다.

가이드는 페어링한 에스퍼에게 특별한 영향을 미치도록 극대화되어 있다. 가이드가 에스퍼에게 행사하는 ‘영향력’의 기본 개념은 텔레파시와 흡사했다. 그러니까 가이드는 거칠게 말해 특정 에스퍼 한정 패시브 텔레패서다.

S급에 이르는 에스퍼의 텔레파시도 통하지 않는 강수혁에 대한 위성 AI의 영향력이 갑자기 사라졌다는 뜻은, 누군가 위성을 해킹하여 강수혁의 뇌파 패턴을 복제하여 가로챘다는 뜻이다.

이건 윤조를 캐나다 인큐베이터에 넣은 탓이다. 뭔가 털릴 줄은 말았지만, 이렇게 빠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세부 조정도 없이 다루기 까다로운 강수혁을 강탈한다고? 상대 가이드는 보통내기가 아니었다.

“시발.”

심 박사는 욕설을 뱉으며 빠르게 패널을 조작했다.

당장 김윤조를 깨워야 했다. 윤조가 일어나야 강수혁을 도로 찾아올 수 있다. 강제로 깨우는 것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올지 모르긴 해도 지금은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멈추십시오.

내내 조용히 있던 에이브리가 나섰다.

전투 상황에서 제법 협조적이었던 텔레패서는 강수혁과의 연결이 끊긴 상황을 기민하게 알아채고 심 박사를 멈추려 들었다.

“그 말을 듣겠냐?”

정신 조작에 대항하여 심 박사는 제 두뇌에 방어 장치를 달아뒀다.

기본적인 정신 조작은 소용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텔레패서가 전력을 다해 달려들면 극단적인 수단이 발동한다. 뇌에 심은 장치가 작은 폭발을 일으킬 것이다. 그 후에 남는 건 뇌사한 몸뚱이뿐이다.

-당신은 미쳤습니다.

심나연이 제 두뇌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차린 에이브리가 미간을 구겼다.

“내 머리를 노리는 놈들이 오죽 많아야지. 이 안에 든 뇌는 내 거야. 빼앗기느니 죽겠어. 두뇌 강화 A급의 특별한 뇌가 파괴되는 걸 보고 싶지 않으면 난 되도록 안 건드리는 편이 좋아.”

냉소하면서 심 박사는 패드에 뜬 ‘실행’ 버튼을 눌렀다. 강력한 각성 효과가 있는 약물이 인큐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삐이이이―.

긴 신호음과 함께 인공양수가 빠지면서 응급 소생 절차가 시작되었다. 강수혁의 피가 다량 섞인 탓에 시뻘건 양수가 연꽃 모양의 철판 사이로 쏟아졌다.

유리 덮개가 옆으로 밀려나면서 그 안에 든 인영이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G0001-pt 준위 김윤조. 안녕하십니까, 심나연 박사님.”

말투가 평소 김윤조답지 않았다. 저건 가이드 기본 프로그램에 따른 자기소개 절차였다.

시작부터 불길하지만 심 박사에게는 다른 선택권이 없었다.

“준위 김윤조, 나가서 강수혁 찾아와.”

“네. 박사님.”

예의 바르게 대답한 김윤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사방을 둘러싼 강철 연꽃을 양손으로 무심하게 쪼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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