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09. 최초의 가이드
막 70세에 접어든 로건 노리스 미 해군 제독은 밤늦도록 캐나다 항모 전단에서 보내온 시각 자료를 검토하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게 가능하다고?’
F형 게이트는 단독으로 상대하기 까다롭다.
15년 전에 북미 대서양 연안에 생긴 소급 F형을 상대하는데 항모 전단 3개가 달려들어야 했다. 간신히 닫긴 했으나 손실이 컸다. 그걸 수복하는 데 막대한 자산이 들었다.
그것을 항모 1개 전대가 해치웠다고? 더욱이 군사 패권도 아닌 나라가?
결말부터가 황당한데 더욱 충격적인 것은 초거대 플라이의 출현과 그것을 없애는 일련의 과정이었다.
한국이 위성 궤도 저격 시스템을 완료했음은 진작 첩보를 통해 인지했다. 또 3년 전 한국 국방부가 공식적으로 실전 배치를 공표하기도 했다.
한국의 위성 레이저 위력은 미군이 보유한 ‘제우스’ 시스템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대신에 타격 정밀도가 미친 수준이었다. 아군의 함대가 가까이에 있는데 저런 정확한 타격이라니. 하드는 좀 딸려도 소프트웨어가 약점을 메꾸다 못해 능가했다.
괴물 같은 정확도를 자랑하는 타격 프로그램을 과연 누가 짰을까.
노리스는 한국이 보유한 매우 특수한 에스퍼를 떠올렸다.
‘심나연.’
두뇌 강화형 에스퍼는 원래 극소수다. 만에 하나 태어난다고 해도 유전자 변이률로 따진 등급표에 따르면 대부분 D급을 부여받는다. 하지만 그 D급도 평범한 인간에 비하면 차원이 다른 두뇌 회전을 보여 준다.
두뇌 강화 C급은 반드시 국가 기관에 소속되어 비밀 프로젝트를 하나씩 도맡는다. 여기서부터는 지극히 중요한 인적 자원으로 분류되어 국가가 그들의 삶에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현재 미국은 세상에서 제일 많은 C급 보유국이었다.
B급은 두뇌 강화형 내에서도 지극히 소수다.
삼십여 년 전 미국 내에 B급이, 그것도 셋이 동시에 나타난 시기가 있었다. 그 셋을 한데 모은 미합중국 정부는 그들을 ‘베타클럽’이라 명명했다.
원래부터 군사 과학이 발전했던 미국은 베타클럽 덕분에 ‘가이드 시스템’을 창조하고 효율적인 에스퍼 관리 체계를 만들었다. 베타클럽은 하급 에스퍼에 각종 강화 훈련과 약물 프로세스를 더해 상급 에스퍼로 업그레이드하는 프로그램도 완성했다. 또 레이저 함포의 기본 개념을 세우고 막대한 출력을 감당하기 위한 신개념 엔진을 고안해 내기도 했다.
베타클럽의 성과가 상식을 아득히 초월했기에, 미군이 외계인을 붙잡아 고문한다는 음모론이 심심찮게 등장하기도 했다. 베타클럽이 아니었다면 지구는 게이트를 상대로 이렇게 오래 버티지 못했을 거다.
안타까운 건 그 베타클럽이 슬슬 한계에 부딪힌 시점이 왔다는 것이었다.
둘은 두뇌 활동을 감당하느라 신체가 급격하게 노쇠했고 하나는 백혈병에 걸렸다. 그들의 뇌를 보존하기 위해 인큐베이터를 개조한 장치가 만들어졌다. 베타클럽이 전부 개조 인큐베이터에 들어가 뇌 활동만 한 지 벌써 10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그들의 인간성은 점점 퇴화했다. 뛰어난 두뇌의 기대 수명은 아직 남아 있기에 여전히 훌륭한 해결법을 제시하긴 한다. 그러나 세상과 점점 동떨어진, 너무나도 비인간적이고 괴상한 대책이 툭툭 튀어나와 정부와 군부를 곤란케 했다.
게이트를 상대하는 데는 하등 쓸모없어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경험인 음식 섭취와 배설, 수면과 성욕과 같은 동물적 본능이 결여된 환경. 농담, 분노, 기쁨 등의 감성과 그것을 더욱 뒷받침하는 인간과의 신체적 교류와 사회적인 상호 작용의 결핍.
정부 기관 소속 뇌과학자 집단은 베타클럽의 이런 한계가 점점 뚜렷해진다고 뜻을 모았다. 그리고 베타클럽을 대신할 새로운 두뇌 강화 에스퍼 집단을 찾으라고도 조언했다.
십수 년에 걸쳐 북미 전역을 탈탈 턴 후에 간신히 B급 셋을 모으기에 성공하긴 했다. 애석하게도 새로운 베타클럽은 기대에 못 미쳤다.
B급만으로는 기존의 베타클럽과 근본적으로 다를 수 없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들은 눈부신 과학적 성과를 내긴 하지만 대(對) 게이트 전쟁의 패러다임을 바꿀 수준은 아니었다. 게이트를 상대로 80년째 지리멸렬한 공방이 이어지는 근본적인 이유였다.
답습된 전쟁 양상을 뒤바꿀 새로운 인물이 필요하다. 그 대상이 두뇌 강화 A급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었다.
미국을 비롯한 군사 선진국들은 A급 보유를 위해 반인륜적인 생체공학 실험을 감행했다. 하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두뇌 강화 A급은 존재 불가능하다는 연구 결과가 도출되었다. 뇌 신경 변이가 너무 빠르게 일어나 모체의 태내에서 죽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태어나도 미숙아로 대부분 유아 시기에 조기 사망한다. 간신히 10대까지 가도 정신 이상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하거나 혹은 자살하고 만다.
사실상 A급은 없었다. 심나연이 출현하기 전까지는.
사상 최초의 두뇌 강화 A급은 다른 B급 다수가 십수 년에 걸쳐 만들어 낸 가이드 시스템을 고작 2년 만에 따라잡았다. 그런 A급이 무수한 데이터를 축적한 미군 산하에서 막대한 자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연구에 매진한다면?
‘게이트 완전 정복도 시간문제일 뿐.’
그런 귀중한 A급이 하필이면 한국 따위에 태어난 것이 문제였다.
한국군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다. 그들은 제법 강한 나라였다. 수도권에 G급 직격을 맞고도 좀비처럼 살아난 터프한 나라. 존경할 점이 분명히 있다.
단지 A급을 보유할 깜냥이 없을 뿐. 실제로 A급을 보유하고도 고작 미군 현재 전력을 따라잡는 게 전부가 아닌가.
A급이 제 역량을 모조리 펼칠 수 있도록 뒷받침할 수 있는 국가는 현재로선 미합중국뿐이다.
마침 그 귀중한 A급이 자국을 떠나 캐나다 항모에 있다. 각국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트리플 S급과 함께.
‘트리플 S라니.’
노리스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전투를 직접 경험하지 못한 민간인 중 일부 정신 나간 머저리들은 게이트와 그에 대항하는 에스퍼 및 가이드가 무슨 게임 캐릭터인 줄 안다. 등급에 따라 기대치가 있기 마련이지만, 더욱 중요한 건 경험치다. 베테랑 C급은 얼치기 B급을 간단하게 제압할 수 있다.
트리플 S급의 위력도 캐나다가 보내온 시각 자료를 통해 확인했다. 분명히 입이 떡 벌어지는 어마어마한 화력이긴 했다. 하지만 그게 정말로 그 본연의 힘일까? 노리스는 그렇게 믿지 않았다.
좀 더 자세한 분석과 검토가 필요할 거다. 하지만 노리스의 실전 경험은 그 에스퍼가 강화 부스터를 맥스치로 맞았거나 혹은 다른 기술적 트릭을 먼저 의심케 했다. 그런 과정에서 두뇌 강화 A급인 심나연의 역할이 지대할 터. 지극히 긍정적으로 생각하자면 장차 미합중국이 트리플 S급을 다수 보유할 수도 있다.
‘이번이 절호의 기회야. 마침 심이 개발한 가이드도 함께 있고 말이야.’
황금 같은 기회에 유일한 방해물은 트리플 S급 에스퍼다.
그가 순순히 협조해 주면 몰라도 아마 그러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에스퍼란 존재는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명령받는 걸 싫어하니까. 오랜 공을 들여 설득해야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제거하는 방법도 있다.
미리 조치는 해 뒀다. 통제 불가능한 에스퍼를 단번에 제압하기 위해 개발된 특수 마취제를 동원했다. 캐나다 항모 전단 사령관이 노리스와 긴밀한 관계에 있기에 수월하게 협조를 받았다.
노리스 제독을 태운 미 해군 소속 항모는 현재 북태평양을 향해 힘차게 나아갔다. 앞으로 2시간 후면 캐나다 해군과 접촉할 거다.
시간을 잊고 시각 자료를 돌려보고 또 돌려보는 사이 누군가 노리스의 선실을 방문했다. 연락을 담당하는 장교였다. 간편한 통신을 쓰는 대신 그는 직접 노장(老將)을 마중하러 왔다.
“제독님. 사건 해역에 도착했습니다.”
“알겠네. 곧 가겠네.”
베타클럽이 완성한 최초의 가이드로서 무수한 전투에서 각종 전과를 올렸을 뿐 아니라 최고령의 가이드로서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며 미 해군 소속 에스퍼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노(老) 제독을, 미 해군에서는 무한한 존경심을 가지고 우대했다.
군 상부에서는 노리스 제독이 되도록 내륙 군사 학교에서 머물면서 후대 양성에 힘써 주기를 바랐다. 가이드여서 신체 내구성이 일반인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할지라도 70세에 이르니 슬슬 몸이 부친지라, 노리스 본인도 이번 훈련 입회를 마지막으로 군사 학교 교수로 이전할 생각이었다.
함상에 올라가자 이륙 대기 중인 헬기가 있었다. 헬기 방향으로 그렇게 멀지 않은 해상에 캐나다 전단이 있었다.
평소 경호를 담당하는 에스퍼는 두 명 정도 거느린다. 하지만 이번에는 넷이다. 그것도 S급에 전투 베테랑들로만 구성했다. 이들의 동행은 캐나다 측에도 미리 양해를 구했다. 그들을 태운 헬기는 캐나다 항모 전단으로 날아갔다.
캐나다 항모에 착륙하자 다른 누구도 아닌 캐나다 전단 사령관이 직접 나와서 맞았다.
“파파 노리스.”
에스퍼 병사를 효율적으로 운용하는 장교를 양성하기 위해 미군은 자국과 동맹국 장교를 대상엄격한 지도자 양성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한다. 프로그램 자체의 미친 난이도로도 악명이 높았지만, 더 유명한 건 바로 교관 노리스였다.
현재 에스퍼 대대를 보유한 북미 장군의 대부분은 노리스의 제자였다. 그들은 무서운 교관이 점점 나이 들어감에 따라 어느 틈에 ‘파파’라는 친근한 별명을 갖다 붙였다. 할아버지라는 뜻도, 그리고 목사라는 뜻도 있었다. 미숙한 에스퍼를, 길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어린양으로 보는 노리스도 그 별명이 내심 마음에 들었다.
이름이 사람을 만든다고 했던가. 파파라는 별명을 가진 이후에 노리스는 왠지 모르게 자상하게 늙은 개신교 목사처럼 행동하곤 했다. 하지만 무수한 전장에서 살아남은 베테랑의 기민한 감각은 여전히 펄펄 살아 있었다.
“실패로군.”
사령관의 어두운 안색을 보자마자 노리스는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