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바스락. 바스락.
키가 190cm가 넘는 거구의 에스퍼는 에너지 바를 묵묵히 쉬지 않고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아까 의무병이 에너지 바가 각 25개씩 든 박스를 2개 가져왔다. 둘 다 포장이 뜯긴 채였는데 그걸 받자마자 트리플 S급 에스퍼는 한쪽에 다른 에너지 바를 쏟아 넣은 후 다른 박스를 쓰레기통으로 사용했다. 거칠고 무시무시한 존재치고는 깔끔하고 예의 발랐다.
‘동양계라서 그런가.’
롭슨은 긴장한 중에도 트리플 S급의 동태에 주의했다.
강수혁의 다른 쪽 발치에는 의무실에 비치된 베드 시트가 바닥에 깔려 있고 그 위에 두뇌 강화 A급 에스퍼이자 2년 만에 가이드를 개발한 천재 중의 천재 심나연이 벌렁 드러누워 있었다.
군인이 전투 중에 쪽잠을 자는 건 너무 자연스러운 상황이라 이상할 일이 아니었다. 다만 심나연에게 묻고 싶은 것이 너무 많은데 그럴 틈이 없어서 안타까웠다.
대신 롭스는 심나연이 단독으로 만들어 낸 가이드를 집중적으로 관찰했다.
흑발에 준수한 외모를 한 한국 측 가이드는 다행스럽게도 순조롭게 재생되는 중이었다. 상체를 숙이고 인큐베이터와 그에 딸린 패널을 확인했다. 뇌파 그래프와 심박, 그 외 각종 바이털 사인을 꼼꼼히 체크할 때였다.
휑한 정수리에 날카로운 시선이 콱 틀어박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자 인큐베이터 반대편에 앉아있던 에스퍼와 눈이 마주쳤다.
꿀꺽.
은은한 진주색으로 빛나는 눈동자는 꼭 지옥에서 만든 듯한 섬뜩함이 가득했다. 능력 활성에 따라 홍채 색이 변하거나 발광하거나 발화하는 에스퍼를 종종 보긴 했다. 특이한 변신에 익숙하기에 강수혁의 비범함을 단번에 알아챌 수 있었다.
활성화를 저렇게 오래 유지하는 에스퍼는 존재하지 않는다. 폭발적인 속도를 내는 스프린터라도 전력 질주를 계속 할 순 없다. 그렇다고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는 마라토너 스타일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강수혁은 초거대 플라이를 단독으로 해치웠고 나아가 게이트까지 닫아 버렸다. 보통 에스퍼라면 지쳐서 나가떨어지고 남을 만큼 기력 소진이 심할 거다. 심지어 피까지 2L 넘게 뽑지 않았나? 거의 3L였다.
“대머리.”
에너지 바를 손에 든 악마가 롭슨을 불렀다.
‘주여.’
평생 안 찾던 신이 지금 이 순간 아주 간절했다.
-네?
“김윤조 어때?”
-누구?
멍청하게 반문하는 롭슨을 향해 강수혁이 눈짓으로 인큐베이터 속 가이드를 가리켰다.
-재생하고 있습니다.
“그걸 누가 몰라? 아까보다 얼마나 나아졌냐고.”
아니 그걸 왜 자신에게 묻나. 이쪽은 시설만 대여했을 뿐, 구체적인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수치 분석까지 하고 있진 않다. 특히 현재 사용 중인 가이드 재생 프로그램의 인터페이스가 영어 기반이긴 해도 프로그램 구성이 대단히 자의적이라 해석하기 어려웠다.
-닥터 심에게 물어야 합니다.
“아줌마는 자잖아. 그쪽도 가이드 전문가 아냐?”
-그렇긴 합니다만. 이 가이드는 내가 다루는 가이드와 다릅니다. 아주 많이 달라요.
“모른다는 거군.”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롭슨은 다시 한번 침을 삼켰다. 강수혁은 묵묵히 다시 에너지 바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때 되면 알아서 눈뜰 거야. 뭘 그리 닦달하고 그래.”
심 박사가 눈을 뜨지도 않고 말했다.
“안 자면서 왜 자는 척해? 안 잘 거면 일어나서 김윤조 어떤지나 좀 봐.”
강수혁이 심 박사의 발을 툭툭 찼다.
“자나 깨나 제 애인 생각뿐이지. 망할 새끼.”
심 박사는 짜증을 부리더니 미적미적 몸을 일으켰다. 산발인 머리를 대충 누른 후 맨손으로 얼굴을 북북 문지르더니 베개로 사용하던 패드를 들고 일어났다.
“뇌파 안정적이고 심박 좋고. 전신 재생 거의 다 되어 가고. 조만간 눈뜨겠네. 예상보다 경과가 좋아. 괴물 같은 네놈의 피가 큰일 했다.”
“김윤조 깨면 내가 피까지 줬다고 꼭 그렇게 말해.”
심 박사와 강수혁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대화를 듣던 롭슨은 속으로 놀랐다.
‘애인? 그러니까 에스퍼와 가이드가 애인?’
특정 에스퍼에게 몰입하는 가이드는 종종 있다. 반대로 가이드에게 집착하는 에스퍼도 많다.
그들이 공적 영역을 넘어서 사적으로 얽히기 시작하면 군 입장에서는 대단히 곤란해진다. 개인 감정에 따라 작전 수행력이 현저히 떨어지며 또, 한쪽이 사망했을 경우 다른 한쪽이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입곤 한다. 시간이 오래 걸려서라도 복귀하면 그나마 낫다. 보통은 폐인이 되어 은퇴한다.
초창기 가이드에게 그런 복잡한 감정 문제가 다발했다. 오랜 시간이 걸려 간신히 개발한 가이드가 에스퍼 사망으로 인한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자살하거나, 에스퍼가 특정 가이드를 독점하기 위해 다른 에스퍼와 자주 다투면서 에스퍼들 사이에 긴장도가 불필요하게 올라가곤 했다. 사망 사고도 다수 있었다.
그렇기에 북미에서는 가이드-에스퍼 관계는 철저한 멘토-멘티 혹은 교관-훈련병 관계를 유지한다. 이 규칙을 어길 시에는 군법에 의거해 처벌한다.
군종 종교인이나 참전 용사 전문 심리 상담사와 비슷한 개념의 가이드 프로그램을 운용 중인 유럽에서도 두 부류의 사적 관계는 철저하게 금지한다. 그런 낌새가 보이자마자 둘을 떨어뜨리는 것이 관례였다.
“야, 너만 먹냐. 나도 줘. 속 쓰려.”
심 박사가 강수혁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싫어.”
“야.”
유치한 반응에 심 박사가 소리를 질렀다. 그러곤 몇 개 남지 않은 에너지 바에 손을 대려고 했다.
상자는 심 박사의 손이 닿지 않는 곳으로 휙 날아올랐다.
“치사하고 더러운 새끼야. 그걸 하나 안 주냐? 내가 얻어다 준 건데.”
“그게 아니라 이거 먹으면 아줌마 큰일 나.”
“큰일 나긴 뭐가 큰일 나? 개소리도 상황과 때를 가려가면서 해라. 이 개망나니 새끼야.”
화가 난 심 박사가 언성을 높이자 강수혁이 눈매를 구겼다.
“정 먹고 싶으면 자.”
강수혁이 에너지 바의 귀퉁이를 새끼손톱 반만큼 떼서 둥둥 띄워 보냈다.
“누구 놀리냐?”
“일단 먹어 보라니까. 먹어 보면 나한테 감사하다고 할 거야.”
“맛이 그렇게 없어?”
이번엔 심 박사의 시선이 롭슨에게 향했다.
-통상적인 시리얼 바 맛입니다. 마른 과일이나 견과류를 첨가한.
“훗.”
그 말에 강수혁이 웃었다. 뭔가 석연찮다.
심 박사는 제 눈앞에 떠다니는 작은 알갱이를 조심스럽게 잡아 롭슨에게 내밀었다.
“먹어 보세요.”
-네?
“먹어 보시라고요.”
심 박사의 강요에 롭슨은 하는 수 없이 알갱이를 받았다.
강수혁은 계속해서 에너지 바를 우적우적 먹고 있었다. 동물적 직감이 위험을 알렸지만 거부할 순 없었다.
입에 넣은 에너지 바 조각이 금방 녹았고 목구멍으로 사라졌다. 긴장한 것과 달리 롭슨은 어떤 변화도 느끼지 못했다.
-그냥 에너지 바입…… 헉.
갑자기 무릎이 꺾였다. 머리가 핑 돌았다. 심 박사가 달려와 그를 부축했다.
“음식에 무슨 짓을 한 거야? 천벌받을 새끼들.”
심 박사의 질문에 강수혁이 대답했다.
“진정제나 마취제 같아. 아까부터 약간 알딸딸한 느낌이 들거든.”
“미친 새끼야. 그걸 알면서 계속 처먹고 있냐?”
“은근히 맛있어서. 기분도 좋아지고. 취하는 게 이런 건가?”
그러면서 강수혁은 남은 에너지 바도 계속해서 해치웠다.
-누…… 누가?
롭슨은 혼란스러웠다.
아주 적은 양에도 어질어질할 만큼 강한 약물이 어떻게 에너지 바 안에?
순간 그의 시선은 의무실 각 구석에서 내내 대기하던 자국 에스퍼 5명에게 향했다. 그들은 당황한 채로 모두 고개를 저었다.
-에이버리?
-저희는 아닙니다.
에이버리가 부인했다. 하긴 저들은 에너지 바가 의무실에 들어오기 전부터 저 자리를 지켰다. 의무병들도 당혹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에너지 바를 들여온 의무병이 자기는 아니라고 두 손 들고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설비 있으니 분석부터 해 볼까요?”
심 박사가 에너지 바 포장지를 들어 보였다.
분자구조 분석은 의무실 전자 현미경 촬영을 통해 금방 끝났다. 신종 약물이라 데이터에 없었다.
심 박사의 표정이 험악하게 구겨졌다.
“이거 화학 구성을 봤을 땐 에스퍼용 마취제 기반으로 새로 개발한 것 같은데요. 어쩌죠? 우리 개망나니에게 소용이 없어서?”
악의 가득한 비꼼에 롭슨이 당황했다.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오해는 무슨.”
강수혁이 느릿느릿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동북 아시아계 치고 유달리 강한 체구에선 은은한 오로라 빛이 새어 나왔다.
“먹고 나자빠지지 않아서 얼마나 상심이 크겠어요? 우리 개망나니가 괜히 개망나니가 아니라서요. 우리 윤조 재생에 큰 도움을 주신 은혜가 이렇게 허무하게 날아가네요.”
심 박사의 입에서 갖은 조롱이 튀어 나갔다.
“나중에 김윤조 깨어나면 나 약에 취해서 저지른 거라고 꼭 말해.”
“당연하지. 배 가라앉혀도 정당방위야, 이거.”
한국인 두 명이 대화를 주거니 받거니 중에 탤레패서 에이버리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긴급 상황을 외부에 알리는 모양이었다.
취이이익!
의무실 천장에서 갑자기 흰 기체가 뿜어졌다. 액화 질소였다. 에스퍼를 얼리겠다는 뜻이었다.
“같잖은 지랄을 하네.”
강수혁이 말함과 동시에 의무실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망가진 인큐베이터의 겉 철판이 와드득 뜯어졌다. 그러고는 액화 질소 주입구에 찰흙처럼 들러붙었다. 질소는 금방 끊겼다.
롭슨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는 의무병들과 함께 황급하게 입구로 향했다.
“어딜.”
쾅!
남은 인큐베이터 몸체가 슬라이딩 도어에 처박혔다.
출구가 막히자 마자 캐나다의 전투형 에스퍼 4명이 강수혁에게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