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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75화 (152/256)

75화

윤조가 제시한 작전을 수행해 낸다면 탈 인간을 넘어서 탈 에스퍼급 전과(戰果)로 기록될 거다. 군사 전술 전문가나 에스퍼 전문 작전 장교가 봐도 단연코 기절초풍할 수준으로, 현재까지 최강으로 기록된 에스퍼라 할지라도 해내지 못할 영역이었다. 그만큼 수행 난이도가 높았다.

-뭐가 이렇게 복잡하고 귀찮아. 그냥 공간 자체를 폭사시키면 되잖아.

페어링을 통해 작전을 인지한 강수혁이 툴툴거렸다.

어마어마한 화력을 보유한 그는 이제껏 쉽고 무식한 방법만 써 왔다. 게이트 인근의 공간 자체를 폭발시키는, 가공할 만한 위력 발산이 실행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이미 차원이 다르긴 했다. 하지만 그래서는 아군까지 휘말려 괜한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크다. 매우 매우 크다.

지금까지 게이트를 닫는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도 강수혁에 대한 군내의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이제는 개망나니라는 오명을 벗을 때였다. 온갖 짜증과 분노를 극복하고 가이드를 받아들인 성과가 강수혁에게도 있어야 할 게 아닌가. 지구 순수주의자 앞에서 에스퍼가 얼마나 귀중한 존재인지 확신시키고 싶은 개인적 바람도 있었다.

“훈련의 연장이라고 생각하십시오.”

눈길을 주지 않고도 국자며 식칼을 자유자재로 움직이던 강수혁의 요리 실력을 늘 보아 온 윤조는 그가 이 경악할 만한 작전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고 믿었다.

당연히 완벽하게 해낼 것이라고는 믿을 생각조차 없다.

7할만 완료해도 세계 군사 랭킹이 바뀔 정도였고 5할만 해내도 윤조는 보람찬 마음으로 강수혁의 손을 잡고 무인도로 힘차게 뛰어갈 수 있다.

-12시간 5회는 아무래도 내 손해야, 시발.

미련이 철철 흐르는 강수혁은 마지못해 윤조가 제시한 작전대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선풍기 바람에 슬슬 날려 가는 듯 느긋하게 출발했다가 점점 속도를 올리기 시작하더니 10초 내로 아음속에 돌입했다. 언제 봐도 대단한 가속도였다.

총알처럼 날아가는 에스퍼 주변으로 전봇대 5기가 빙글빙글 돌면서 동시 비행했다.

“9회! 10회! 1차 그룹 냉각기 들어갑니다.”

함교 장교의 보고와 함께 이율희 함장의 시선이 윤조에게 향했다.

윤조는 방사능 차폐막이 내려져 실시간 화상 전송으로 창의 기능을 유지하는 앞면을 바라보았다. 시퍼런 게이트의 발광에 젖은 플라이 괴물이 온 사방으로 산개했다. 그리고 가장자리에서부터 강수혁이 접근하고 있었다.

-이렇게 하라는 거지?

음속에 가까운 속도를 내면서도 강수혁의 음성은 마른 듯 차분했다.

그때였다.

강수혁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비행하던 텅스텐 빔 5기가 갑자기 사방으로 뻗었다. 그들은 마치 각자 살아 있는 듯 제각각의 방향으로 마구잡이로 움직였다. 갑자기 가속했다가 멈췄다가, 방향을 틀었다가 낙하, 상승을 반복하며 복잡한 기동이 이어지는 때였다.

쿠와아아! 꿰에에엑!

각양각색의 플라이들이 우수수 떨어지더니 해수면에 닿기 전에 소멸했다. 텅스텐 빔이 그들을 관통하면서 핵이 일시에 파괴되었기 때문이었다. 난입하여 공간을 휘젓는 5기 텅스텐 빔을 피하려다가 함대의 레이저에 맞고 떨어지는 개체 수도 상당했다.

그중에 일부는 떨어지다가 다시 상승하기도 했다. 핵을 가까스로 피한 듯 보였다. 플라이들 사이를 종횡무진 누비던 텅스텐 빔 중 하나가 해수면 가까이 쏜살같이 날아가더니 다시 상승하는 놈들을 모조리 꿰뚫어 버렸다.

-김윤조, 똑바로 안 해? 핵이 아니라 대충 몸통만 노리면 어떻게 해? 일을 두 번 하잖아.

“실시간 보정 중입니다.”

‘아, 망나니 새끼 까다롭네. 빗나간다 싶으면 자기 선에서 보정하고 맞추면 되잖아. 하여간 대가리는 일절 안 쓰려고 하지.’

보정 담당인 심 박사가 툴툴거렸다.

-방금 내 욕했지? 누구야?

-나다, 이 새끼야!

-제대로 좀 해, 아줌마.

아줌마란 얘기에 심 박사가 발끈했다.

-어디 하나라도 놓치지만 해봐 아주 그냥!

보정이 더해지면서 핵이 빗맞거나 누락 되는 경우가 확연히 줄어들었다. 하나라도 놓치면 아주 그냥 뭘 어쩌겠다는 말을 하지 못할 만큼 깔끔한 처리였다.

위성 AI와 윤조의 뇌, 그리고 심 박사의 장비와 연결된 특작부 내 메인 컴퓨터까지 모조리 열을 내며 도출한 공격 루트를 강수혁은 기대 이상으로 잘 소화했다.

심지어 임의 보정 중에 제대로 하라고 불만을 늘어놓을 정도라니.

-수행률 98.7퍼센트.

AI의 보고에 윤조는 저도 모르게 입이 떡 벌어졌다.

모자란 1.3퍼센트도 작전의 실질 수행자인 강수혁이 임의로 비행 속도를 높이거나 방향을 바꾸어 전투 상황에 더 최적화하느라 발생하는 오차였다.

천부적인 전투 감각의 소유자였다. 트리플 S급 에스퍼 겸 변태 겸 전투 천재. 심지어 용모도 발군이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판타지 캐릭터가 왜 실존하는 거지? 신의 실수인가?

-기분이 이상한데. 김윤조, 너도 내 욕하냐?

“아닙니다. 작전을 너무 잘 따라 주셔서 감탄했습니다.”

-뭐, 내 성미에는 안 맞아도 게임 같아서 그럭저럭 재미있긴 하네.

허세 섞인 응답이 돌아왔다.

잠깐, 저걸 허세라고 할 수가 있나? 실제로 재미있어서 수행하는 티가 역력한데? 허세보다는 압도적 실력이 가져오는 여유로 봐야 옳다.

‘과연 우리 특작부의 핵심 전력! 트리플 S급답다, 다워. 이러다 혼자 게이트 닫겠어.’

최정이 감탄할 때였다.

쿠아아아악!

차원이 다른 울음소리가 들렸다.

한껏 벌어진 게이트의 둥근 틈 사이로 거대한 물체가 모습을 드러냈다.

대체로 푸른색으로 빛나는 보통의 플라이와 달리 그것은 진한 황금색으로 빛났다. 윗 표면에서 긴 돛 두 쌍이 돋았는데 완전히 펼쳐지자 꼭 박쥐 날개 같았다. 아랫부분에는 두꺼운 돌기 네 개가 꼭 개다리소반 다리처럼 생겼고 결정적으로 앞뒤로 굵은 기둥이 길게 솟은 모습이었다.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야?”

함교의 누군가가 나지막하게 경악했다.

“가지가지 하는군.”

전투 개시 후 진지하기 짝이 없던 이율희 함장도 탄식했다.

-야, 김윤조. 보고 있냐? 저거…….

강수혁조차 멍하게 음성을 낮췄다.

“압니다. 알아요.”

용각류 공룡에 박쥐 날개 네 장이 달린 듯한 초거대 플라이를 지칭할 만한 단어가 하나 떠올랐다.

하지만 윤조는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했다. 개조되었으나마 어디까지나 지구 테란 소속의 지성체였다. 그 단어를 육성으로 뱉는 순간 근본적인 세계관이 붕괴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저거 뭐라고 불러야 해?

‘용? 날개 있고 뚱뚱하니까 서양식으로 골드 드래곤?’

‘와 좆같다. 우주 전쟁 찍더니 예고도 없이 장르 변경 하기 있기, 없기?‘

섬세함이라고는 먼지 만큼도 없는 망할 에스퍼 새끼들이 또 수다질이었다.

“초거대 플라이입니다. 스캔 강도를 올려 핵 추정 시작합니다.”

윤조가 단단한 어조로 수다를 잘랐다.

-저건 내 거야. 다른 놈들 다 꺼지라고 해.

강수혁의 일방적인 선언에 이번만큼은 토를 달 수 없었다. 차라리 자기 몫이라고 선점해 줘서 감사할 지경이었다.

“초거대 플라이 제거는 강수혁 소령이 전담합니다. 아군은 전투 지역에서 벗어나길 권고합니다.”

윤조가 보고했다.

“난수 저격 중지. 전 함대 후퇴. 가까이 접근하는 플라이형을 각개로 격파한다.”

이율희 함장의 명령과 함께 게이트를 비추는 화면이 빠른 속도로 줌아웃되었다.

게이트를 가로지르는 거대한 형상이 서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어마어마한 크기로 봤을 때 혹여 날갯짓이라도 한다면 인근에 있는 항공기는 전부 휘말려 추락할 수 있다.

-날개부터 뜯으란 얘기군.

윤조의 우려를 읽은 강수혁이 이미 초음속 비행 중임에도 불구하고 텅스텐 빔을 더한 속도로 날렸다.

총 5기의 텅스텐 빔은 거대 플라이의 날개 뿌리에 꽂혔다.

콰아아아아!

플라이가 반응했다. 특별히 목구멍도 없어 보이는 괴물의 울부짖음은 공간을 뒤흔들었다. 수천 마리가 동시에 우는 듯한 무시무시한 음파와 전파에 함대 레이더가 교란된 것은 물론, 함대에 설치된 전자 장비의 두꺼운 방사능 차단벽을 뚫고 오류를 일으켰다.

-아파! 아파!

끔찍한 비명 소리가 들렸다.

“강 소령님! 후퇴하십시……헉!”

시간 차를 두고 윤조에게도 충격이 있었다. 백업 및 보정용 프로세서에 기대어 아찔한 정신을 가다듬는 사이 함장이 외쳤다.

“EMP인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놈이 발산하는 강한 자기장과 방사능으로 인해 전파 방해 효과가 일어났다. 각 장교는 빠르게 상태를 점검했다.

“신호가 약합니다! 통신이 불량합니다!”

통신 장교의 보고에 이율희 함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새로운 개체가 나타난 상황에 통신 오류는 치명적이다.

-저라면 전 함대의 통신 장교와 텔레파시 가능합니다.

이율희가 즉시 윤조에게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함장에게 말을 건 상대는 윤조가 아니라 장세인이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너그러운 양해 바랍니다.

“좋아. 단, 통신 장교에 한한다.”

-알겠습니다.

장세인이 각 함대 통신 장교를 모조리 연결했다. 다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지만 곧 안정되었다. 상황 설명과 설득에 시간을 쏟지 않아도 되는 것이 텔레파시 연결의 장점이었다.

“여기는 항모 전대 사령관이다. 각 함의 피해 사항을 보고하라.”

각 함에서 보고가 잇달았다. 대부분 전자 장비 오류로 어려움을 겪고 있으나, 운항 불능이나 대응 불능에 빠질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가장 전방에 있던 구축함 하나가 엔진 고장을 일으켰다. 초거대 플라이에게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었다. 그 가까운 거리가 15km 이상이었다.

정신을 차린 김윤조 또한 얼른 강수혁에게 통신했다.

“강 소령님, 현재 상태가 어떻습니까! 후퇴하고 있습니까?”

-아파! 아프다고!

아프다는 일방적인 호소 외에는 돌아오는 것이 없었다.

전파가 불안정하여 이쪽의 말이 안 들리는 것 같았다. 기이한 분노와 좌절과 두려움이 윤조의 전신을 휘감았다. 윤조 자신의 감정만은 아니었다. 심장이 쿵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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