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화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삐이잉! 삐이잉!
비상 알람의 비명이 한층 거세졌다.
일분일초가 아까운 가운데 강수혁은 냉랭한 낯을 하고만 있었다. 홍채의 오팔빛 테두리가 생기긴 했어도 완전한 개방은 아니었다. 두고 보겠다는 태도에 안달이 난 건 도리어 윤조 쪽이었다.
“만 12시간 및 횟수 4회 보장.”
“…….”
“횟수 5회 보장.”
“후. 사람을 우습게 아네, 연두부 새끼가.”
강수혁은 관심 없다는 듯이 팔짱을 꼈다. 하지만 자리를 피하지 않았다. 아예 무관심한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판돈을 올리란 얘기. 시발.
이러는 중에도 게이트는 열리고 있었다. 게이트 발광이 점점 강해지면서 최정이 띄운 입체 투사기 또한 밝아져서 격납고 전체에 빛이 흩뿌려졌다.
-게이트 오픈 직전! 모두 전투 태세! F형에 대비하라!
함 내 방송이 알렸다. 조만간 입구가 열리고 F형이 쏟아진다. 간절한 순간에도 강수혁은 요지부동이었다.
‘시발. 이러니까 군 상부에서 가이드를 만들지, 개새끼야!’
윤조가 속으로 욕을 했다.
‘동의.’
‘내 말이.’
‘진짜 늙는다, 늙어.’
주변의 동의가 우르르 뒤따랐다.
‘오늘따라 강 소령님이 많이 비협조적이네요. F형 게이트는 재미있다고 적극적이셨는데.’
심지어 임성준까지 거들었다.
텔레파시라는 건 생각보다 되게 귀찮은 거였다. 오픈 채널의 뇌 내 버전이랄까. 수신기처럼 볼륨을 죽일 수도 없어서 너무 정신 사납다.
‘곧 익숙해질 거야.’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강수혁이 저거 움직일 삘이 아닌데?’
‘어쩌긴. 페널티라도 날려야지.’
두 대령의 대화에 임성준이 반응했다.
‘페널티…… 우우 무섭다. 저는 항상 바른 자세로 협조하겠습니다. 가이드 달지 말아 주세요.’
-나는 가이드 찬성. 대신에 잘생긴 남자로 해 주세요. 김 준위만큼 잘생기지 않아도 성격이 좀 더 푸근하고 자상한 스타일이면 돼요. 알았죠, 언니?
게이트 처리가 무슨 동네 하수구 청소인 줄 아는 건가? 무슨 한가로운 수다인지.
이율희 함장의 말대로 특작부 자체의 문제인 걸까 아니면 여기 모인 인원들의 문제인 걸까.
특작부 전체가 글러 먹었다고 하기에는 유일한 일반인인 최정만은 얼굴이 썩고 있었다. 그는 게이트를 확인하며 초조한 듯 발을 탁탁 굴렸다. 또라이 에스퍼 새끼들을 어떻게 할 기력이 없어서 눈치만 보는 무능력한 삼촌 신세였다.
한가롭게 수다를 떠는 새끼들은 두뇌 특화형 에스퍼인 심나연 박사를 포함한 막강한 S등급의 에스퍼 둘뿐.
‘내가 무슨 커플 매니저인 줄 알아? 망나니 새끼도 그렇고 세인이 너도 그렇고. 그냥 해 주는 대로 받아, 망할 놈들아.’
-S급이라 평생 연애나 결혼은 꿈도 못 꿀 줄 알았는데. 강수혁과 김 준위 사례를 보니까 희망이 있는 것 같아서요. 기왕이면 다목적이 좋잖아요.
‘그런데 꼭 남자인 건 아니죠? 여자 가이드도 가능하죠? 저는 여자면 좀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순간 뚜껑이 열렸다. 윤조의 목구멍에서 우렁찬 육성이 발사되었다.
“이 망할 에스퍼 새끼들아! 입 다물어!”
계급이고 뭐고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예의범절과 시의적절, 사리 분간이라는 개념을 상실한 세 에스퍼를 향한 짜증과 분노뿐이었다.
“이 시간 이후로 텔레파시를 통한 개인 잡담 금지. 어길 시 임시 뇌파 연결을 통한 직간접적인 제재에 들어갑니다. 장세인 대위, 임성준 중위, 아시겠습니까?”
싸늘한 어투와 함께 경고했다.
-F형 게이트 오픈 확인. 전투 모드 승인. 임시 뇌파 동조 시행합니다. 대상 에스퍼, 대위 장세인, 중위 임성준.
심 박사의 장치로부터 위성 AI의 무감각한 보고가 흘러나왔다.
현재 아군에는 가이드가 윤조 하나뿐이다. 거기다가 트리플 S급인 강수혁을 제제하기 위해서 많은 권한을 부여받았다.
게이트가 확인된 전투 상황에서는 가이드의 권한 등급이 훨씬 올라간다. 에스퍼를 어떻게든 통제해서 게이트를 닫고, 인명 피해를 줄이는 것이 최우선 목적이 되기 때문이었다.
전투 모드가 승인되자마자 이미 존재를 확인한 에스퍼의 뇌파를 따올 수 있었다. 스캔할 것도 없었다. 가이드 프로젝트상 프로토 테스터 후보였던 장세인이나 임성준은 위성 AI가 이미 뇌파 정보를 가지고 있어 그냥 연결하겠다는 의지 하나만으로 바로 임시 페어링이 성립된다.
임시 페어링은 정식 페어링과 달리 페널티와 전투 보조에 한계가 명확했다. 연결 자체가 불완전하기도 했다. 정식 페어링을 통한 페널티가 쇠파이프나 야구 배트를 휘두르는 타격감이라면 임시 페어링은 얇고 낭창한 대나무 회초리 정도였다.
하지만 두 상대는 망나니력으로는 강수혁에 한참 못 미쳤다. 대나무 회초리로도 충분히 말을 듣게 할 수 있다. 역시나 둘은 약속이나 한 듯 입을 다물었다.
심 박사는 예외였다.
자산 가치가 강수혁보다도 높기에 전투 시에도 임의로 페어링 할 수가 없다. 대신에 윤조는 제 창조주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분위기를 파악한 심 박사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에서 유리되는 에스퍼와의 가교 역할을 기대한다더니. 결국 인간성이 메마른 미치광이들이 개소리할 때마다 매를 드는 역할인가 보다.
쿡쿡.
뒤에서 웃음소리가 들렸다. 누구보다 못난 개망나니였다.
“멍청이들. 내 뒷담은 적당히 까야지. 아무리 그래도 연두부 새끼는 내 가이드라고.”
등신 머저리가 다른 사람들이 윤조에게 욕을 처먹은 이유가 자신을 욕해서라는, 같잖은 착각을 했다.
어이가 없었다. 강수혁 본인을 향한 욕지기로 따지면 김윤조를 따라올 자가 없는데.
“후우.”
청개구리를 백만 마리쯤 고아 먹은 시발 새끼는 또 어떻게 조질까. 역시 페널티뿐인가 싶은 찰나였다.
“12시간에 다섯 번. 보장하는 거지? 이번에는 지구가 불타도 무조건 약속 지켜. 말 바꾸면 그때는 여기 있는 증인들 싹다 모가지 따 버리고 같이 자폭한다.”
어라? 착각 덕분에 자기 혼자 풀어진 모양이었다.
심지어 뇌파 패턴에 즐거움이 나타났다. 만족감도 떠올랐다. 그 패턴이 꼭 정사 후의 리듬과 비슷했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잘된 일이다.
“네. 보장합니다. 이번에는 정말로 말 바꾸는 일 없습니다.”
“게이트가 열려도?”
“그건…….”
순간 윤조는 대답을 못 했다.
게이트가 잇달아 열리는 경우가 아주 드물지만 있기는 했다. 그런 경우가 발생한다면 자신은 아무래도 게이트 대처에 더 몰두할 것이다.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었다.
“그건 가이드로서의 기본 의무로 규정되어 있습니다. 게이트 발생 시에는 무조건 전투 모드로 에스퍼를 서포트합니다.”
“내가 출격하지 않아도?”
“네.”
“누가 그렇게 시켰는데?”
“그냥…… 제 DNA에 새겨진 프로그램입니다. 자의로 게이트 발생과 외계 지성체 출현을 무시하는 경우는 없을 겁니다. 인명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
윤조는 그렇게 프로그램되었기에 그렇게 움직인다. 그건 이성과 감성을 넘어선, 존재의 목적이었다. 예전에 이세명을 구해야 한다는 최정 대령의 읍소를 무시하지 못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기도 했다.
“윤조는 가이드야. 목적이 있어서 개발된 인조 강화 인간. 이미 알고 있으면서 뭘 당연한 걸 확인하고 그래.”
심 박사가 무심한 어조로 설명했다.
“역시 재수 없는 인형 새끼라니까.”
강수혁의 즐거움 패턴이 사라졌다. 만족감도 마찬가지였다. 그 자리를 불만과 분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하여간 졸갑킹이었다.
아무리 인류애가 없는 에스퍼라지만, 같이 ‘마더 어스’에 빌붙어 사는 생물로서 전 지구적인 위기를 심각하게 받아들이면 안 되나 싶다.
“게이트가 나보다 우선인 것도 마음에 안 들어. 시발.”
순간 강수혁이 사라졌다. 국지 돌풍이 부나 싶더니 그는 어느새 임성준 곁에 있었다.
-작전 개시합니다.
장세인의 선언과 함께 강수혁과 임성준이 동시에 사라졌다.
어깨를 잡는 순간 둘 다 사라졌다. 장세인을 통해 그들이 함상으로 간 것을 알았다. 1초의 시차를 두고 임성준이 다시 나타나 윤조를 함교로 이동시켰다. 그리고 그는 바로 사라졌다.
“김 준위.”
이율희 함장이 윤조를 알아보았다. 윤조는 경례를 붙이고 바로 이율희 함장이 가리키는 위치에 섰다. 전투 상황이 잘 보이는 자리였다.
아까 강수혁이 함교에 쳐들어갔을 때 하필 전방 유리창을 뚫고 들어간 모양이었다. 시원하게 뚫린 전방 유리창의 반만 방사능 차폐 격벽이 내려서 꼭 해적 선장의 애꾸 얼굴 같았다.
“강수혁 에스퍼, 함상 대기합니다. 임성준 에스퍼, 텅스텐 빔 이동 시작.”
다른 장교가 보고했다. 장세인과 연결된 통신 장교 같았다.
윤조에게 함대가 가진 작전 해도와 함께 함대 위치 및 레이더의 취합 정보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위성 스캔 자료보다 훨씬 역동적이고 빨랐다. 더불어 레이저 가동 정보도 들어왔다. 덕분에 윤조는 심 박사의 도움 없이 난수 장막 회피 루트를 짤 수 있었다.
“김 준위, 난수 장막 전개에 유의. 그러라고 우리 측 정보 공유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장세인 대위를 통해 해군 측 통신 장교를 통해 현재 함교의 분위기가 전해졌다.
이율희 함장은 F형 발생 보고를 받은 직후부터 전적으로 군인 태세로 돌입했다.
국가와 국민을 지키는 군인으로서 모든 전력을 적을 쳐부수기에 집중한다. 타군과의 알력 싸움이나 정무적 판단에 의한 비협조적 자세를 조성함으로써 비롯하는 전력 낭비는 배격한다.
노년의 함장은 자존심이 강한 군인이었다. 비록 에스퍼에 대해 차가운 견해를 지녔으나, 별 세 개를 단 중장으로서 책임감과 결단력은 군더더기 없이 훌륭했다. 과연 해군의 자랑이었다.
“견제 사격을 비롯한 1차 공격은 이쪽에서 시작. 에스퍼 출격은 그쪽에서 판단하고 보고하도록.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까?”
심지어 이율희 함장은 에스퍼에 대한 지휘권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에스퍼를 무시해서가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효율적인 운용 면에서 가이드인 김윤조에게 일임하겠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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