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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66화 (143/256)

66화

-쿡.

스피커를 통해 낮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산 채로 지져지는 통증을 느끼면서 웃는다고?

윤조의 미간이 저절로 구겨졌다. 이건 터프하다고 할 수준도 아니었다. 광기였다.

-머릿속에 회피 루트가 바로 떠오르는 감각이 낯설고 신기해. 갑자기 천재가 된 느낌이야.

혼잣말한 강수혁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임 중위, 강 소령 뒤를 바짝 따라붙어.”

최정이 명령했다.

임성준은 짧은 점프 연속으로 비행 효과를 낼 수 있다. 염력을 이용하여 극초음속까지 속도를 내는 강수혁을 뒤쫓을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에스퍼였다.

회피 기동을 전달한 이상 레이저 장막을 벗어나는 건 순식간이었다.

강수혁이 교묘하게 빈틈을 노려 장막을 벗어나자마자, 함포의 움직임이 어수선해졌다. 그들은 신경질적으로 강수혁의 위치를 탐색했다. 윤조는 뒤이어 레이저를 피할 회피 루트를 계속해서 강수혁에게 전달했다. 그동안 임성준의 움직임이 자유로워졌다.

“임 중위, 제주도 갑판으로 점프! 레이저 후면 거울을 점프시켜 버려!”

최정이 지시했다.

-오케이.

강수혁이 윤조와 페어를 이루어 레이저를 교란하는 동안 임성준은 최정의 지시에 따라 제주도 함상으로 이동에 성공했다. 레이저 함포의 뒤에 나타난 그는 레이저 후면 거울을 잡고 다시 점프했다. 그는 항모 끝에 거대 거울과 함께 다시 나타났다.

후면 거울이 뜯긴 레이저는 충격을 받아 동작을 멈췄다.

-한 기 무력화 성공. 나머지 한 기 무력화 시도 중.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이미 나뒹구는 거울 위에 거울 하나가 더 포개졌다. 제주도함에 달린 레이저 두 기는 모두 무력화되었다.

삐이이잉. 삐이이이잉.

전투를 알리는 비상 알람이 울리기 시작했다. 제주도함 전체에 군홧발이 울리기 시작했다.

“이미 늦었어. 이 망할 새끼들아.”

심 박사가 쪼갰다.

“드론 뜹니다.”

특수 위성을 통해 내내 함대를 주시하고 있던 윤조가 연이어 보고했다. 전투형 드론이 각 함대에서 일제히 날아올랐다. 사각지대를 커버하겠다는 공산이었다.

“임 중위, 제주도함 내로 점프. 상황 종료될 때까지 안 보이는 곳에 숨어 있어.”

-네. 알겠습니다.

임 중위의 위치가 함내로 바뀌었다. 그러고는 이내 생활용품을 보관하는 비품실을 찾아서 몸을 숨겼다고 보고했다.

-임성준도 피했으니 이제 내 마음대로 해도 되지?

강수혁이 물었다.

“전파나 침몰은 안 됩니다.”

아군의 전력 손실 어쩌고 해 봐야 강수혁에게는 먹히지 않는다. 대신에 강수혁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에 대해서 정확하게 짚었다.

“함대를 잃으면 소령님은 몰라도 저는 귀찮은 일이 백 번도 더 생겨요. 소령님과 어울릴 시간이 없어진단 말입니다.”

장선욱 중장이 책임을 약속한 선을 넘으면 장선욱의 성긋성긋한 모발이 한 줌 더 빠지는 건 상관없는 일이지만, 그사이 가이드 김윤조는 여기저기 다니면서 청문회를 치러야 한다. 다른 부대와의 알력 싸움이기 때문에 해결하기까지 지독하게 골치 아프고 그만큼 시일이 걸린다.

-무슨 말인지 알았으니까 잔소리 그만해.

상대는 못마땅한 투로 대답했다.

레이저를 피한 순간부터 윤조에게 전달되던 강수혁의 통증은 빠르게 가셨다. 이제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재생이 완전히 끝났단 얘기였다. 여러 가지로 괴물 같긴 했다.

-침몰에 전파만 아니면 된다는 거지?

“강 소령! 그렇다고 움직이지도 못하는 고철로 만들면 안 되고 참! 사상자도 나면 절대로 안 돼!”

최정이 다급하게 외쳤다.

-조건이 자꾸 늘잖아.

“제발 살살하자, 우리.”

최정은 급기야 스피커를 향해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다 됐고. 다른 애들은 두고 이 망할 항모에 예쁘게 배수 구멍만 하나 시원하게 뚫어 주자. 김윤조, 항모 스캔해서 사상자 없을 루트로 전달해.”

심 박사가 허리에 양손을 척 얹으며 명령했다.

-아줌마, 간만에 마음에 드는 소리 하는군.

전에 박병관 중위 사건 때도 그렇고. 평소에는 못 말리는 앙숙지간이면서 보복할 때만큼은 죽이 척척 맞아떨어진다. 어릴 때부터 가까웠던 사이라 서로 물이 든 게 분명했다.

“루트 지금 전송합니다.”

심 박사는 배수 구멍만 하나 내라고 했지만, 윤조는 그럴 수 없었다. 이율희 함장이 강수혁과 임성준에게 한 취급을 생각하면 여전히 배알이 뒤틀리고 정수리에 열이 고인다.

스피커에서 낮은 웃음소리가 번졌다.

-연두부, 제대로 열받았나 보지. 정말 이대로 해?

“네.”

강수혁의 물음에 윤조는 단조롭게 답했다.

-나중에 딴말하지 마. 3초 후 잠수한다. 헬멧 없어서 물속에서는 통신 불가능하니 충돌 타이밍은 그쪽에서 알아서 예측해.

“이미 GPS 추적 중입니다.”

-깜찍한 스토커 새끼.

소름 끼치는 표현을 남기곤 스피커가 잠잠해졌다. 심 박사와 최정은 못 들을 걸 들었다는 듯이 눈을 굴려 윤조를 살폈다.

평소라면 오그라듦을 감추지 못하고 치를 떨었겠으나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사소한 수치심을 챙기기보다는 에스퍼 전투 보조가 우선이다.

“수면 충돌 2초 전. 1초 전. 잠수.”

윤조 일행이 있는 위치로부터 약 24km 거리 공중에 떠 있던 강수혁이 해수면을 향해 돌진했다. 엄폐할 구조물이 없는 해상에서는 아주 가까운 거리라 함대 레이더에 잡히고도 남았다. 하지만 계속해서 회피 기동을 지원받으며 동시에 초음속에 가까운 속도라 함포가 따라가지 못했다.

쿵!

총알 같은 속도로 돌진한 에스퍼가 해수면을 때리면서 큰 충격이 발생했다.

“충격파 발생. 곧 함대까지 도착합니다. 흔들림에 대비하십시오.”

윤조의 경고에 심 박사와 최정이 장비를 단단히 붙들었다.

우르르릉.

사방을 둘러싼 강철 구조가 흔들리면서 기이하고 소름 끼치는 울음소리가 났다. 배가 크게 꿀렁거린다 싶은 순간이었다.

쿵!

충격파와는 다른 뭔가가 부딪혔다.

“엄마야!”

삐이잉. 삐이잉. 삐이잉.

비상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면서 피격을 알리는 코드와 함께 즉시 피해 상황을 보고하라는 함내 방송이 시작되었다.

쿵. 쿵. 쿵.

저 아래에서부터 시작된 충격은 점점 가까워졌다. 심 박사의 선실을 중심으로 상당히 거리를 벌리고 빙 둘러 간 충격음은 곧 더 위로 향했다. 그에 따라 세 사람의 고개도 하향에서 상향으로 서서히 바뀌었다.

쿵. 쿵. 쾅!

마지막 충격음은 특별히 컸다. 서 있던 셋이 휘청거리다가 다시 바로 섰다. 그러는 내내 셋의 시선은 선실 천장 언저리를 맴돌았다.

“김 준위, 강 소령한테 뭘 시킨 거야?”

최정이 멍하게 물었다.

“방금 지나간 거 우리 망나니니?”

심 박사의 물음에 윤조는 “네.”라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최정의 고개가 이쪽으로 홱 돌았다. 안면에 피가 싹 쏠려 나간 중년 아저씨의 존재감이 한층 옅어졌다.

“김 준위.”

“걱정하지 마십시오. 침몰은 안 합니다.”

윤조의 말에 최정은 눈을 꾹 감았다가 다시 떴다. 원래부터 총기가 별로 없던 눈이 이젠 아예 동태 눈깔이 되었다.

“그래서 뭘 어떻게 한 건데?”

“하층부에서 상층부까지 외부 격벽을 뚫었습니다. 함내에는 전혀 타격을 주지 않고요.”

배은 원래 외벽과 내벽 이중으로 이루어져 있다. 배 밑부분 어디가 파손되어 물이 차더라도 내부 선실은 보호되고 내벽과 외벽 사이에는 각 구역을 나누는 격벽을 세워 배의 안정성과 내구성을 올린다. 혹시 공격을 받아 배가 뚫리더라도 무수한 격벽으로 인해 일정 구역만 물이 차고 다른 곳은 유입을 차단하여 침몰을 방지한다.

윤조는 강수혁에게 배의 외부 격벽 중 엔진룸과 연료 저장고 및 무기 저장고에서 거리가 있는 루트를 짜서 전달했다. 수면 아래 외부 격벽만 뚫은 후 내부로는 침입하지 않고 외부 격벽을 따라서 아래에서 위로 긴 통로를 뚫었다. 인명 피해와 자산 손실은 없으며 배 일부에 물이 찰 뿐 침몰하지도 않는다. 훈련을 빙자한 전투를 벌인 것치고는 경미한 손상이기에 다른 함대 전투에서 이런 경우가 발생하면 천우신조라면서 좋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주요 시설을 완전히 피했다는 의미는 달리 말하면 주요 시설의 위치가 완전히 드러났으며 파괴할 수 있는데 의도적으로 그러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됐다. 시험에서 전 과목 빵점 맞기가 백 점 맞기보다 힘든 것과 같은 이치다.

또 현 상황은 S급 에스퍼 1인의 공격으로 인한 결과이자, 내부 격벽을 전혀 손상하지 않은 채 공교롭게도 외부에만 타격을 준 상황이다. 게다가 그 공격 당사자는 현재 제주도함 함상에 있다. 수틀리면 거대한 항모를 물에 젖은 벌집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여전히 지니고 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쾅!

뭔가 터지는 소리가 났다. 강판이 터지는 소리와는 조금 달랐다.

-책임자 나와.

강수혁이 누군가에게 말했다.

탕! 탕!

권총 사격 소리가 들렸다.

“쟤 지금 어디 쳐들어간 거야?”

심 박사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함교요.”

“아, 신이시여.”

윤조가 대답하자 최정이 무너져 내렸다.

탕! 억! 큭! 쾅!

곧 총소리가 끊기고 사람이 뭔가에 맞아 자빠지는 소리가 연이었다.

스피커를 빤히 보던 심 박사가 윤조를 향해 입을 열었다.

“이건 말려야겠지?”

“아무래도요.”

“야! 강수혁! 동작 그만!”

최정이 고함쳤다.

-시끄러워. 딱 한 대만 때릴 거야.

“야! 네 한 대는 한 대로 깔끔하게 암살이란 뜻이잖아! 미친놈아! 중장 암살은 천지신명 할아버지가 와도 수습 못 해!”

-아하. 중장이란 말이지? 별 세 개를 단 사람이 어라? 할머니네.

강수혁이 이율희 중장을 발견하고는 히죽 웃었다.

“야아! 특작부 통째로 날릴 셈이야! 차라리 함대를 때려 부숴! 중장은 그냥 두라고!”

최정이 절규했다.

심 박사는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이율희 함장을 패려는 강수혁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는데 최정이 절규하니까 대놓고 편을 드는 티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미친 개망나니 새끼는 정말이지 정도를 모른다. 불쌍해서 편을 들어주다가도 한편으로 기어이 매를 들게 만드는 재주가 아주 탁월했다.

“패널티 150% 3초간 들어갑니다.”

덤덤한 경고와 함께 윤조는 미친개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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