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화
분위기가 쑥쑥해졌다. 이후 두 사람은 사적인 대화를 배제하고 피지 훈련 얘기에만 집중했다.
최정은 강수혁에게 훈련 참여를 직접 통보하기를 꺼렸다. 그래서 따로 윤조를 불러서 훈련 사항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그러니까 윤조가 강수혁을 잘 달래서 훈련 참여를 유도하라는 뜻이었다.
더불어 참여 가능성이 큰 타국의 에스퍼와 가이드에 대해서도 자료를 넘기면서 강수혁과 혹시 모를 분쟁을 피하도록 당부도 잊지 않았다.
귀가하여 저녁을 먹던 중에 피지 합동 훈련에 관해 말을 꺼냈을 때, 강수혁은 의외로 아무런 반발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대신에 귀찮은 사전 정보 숙지는 네가 전담해. 나한테는 그때그때 알려 주고.”
훈련도 일종의 작전이다. 관련 정보 숙지를 안 하겠다는 선언은 군인으로서 빵점이다 못해 아군 속 엑스맨이나 진배없다. 어떤 의미에선 적군보다 위험했다. 그런 고로 강수혁 본인이 가이드의 존재를 얼마나 꺼리는지 관계없이 저런 태도는 가이드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할 뿐이다.
정작 윤조는 강수혁의 무책임한 태도에 별로 열받지 않았다. 도리어 탄복했다.
조건을 달긴 했어도 강수혁은 훈련 참여에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그런 귀찮은 일을 자신이 왜하냐며 누가 시켰냐고 최정이냐고 난리법석을 떠는 대신에 사소한 정보 숙지만 김윤조가 대신해 주면 참여하겠단다.
너무 순순한 태도에 도리어 물어본 이쪽이 놀랐다. 윤조는 막 미역국을 뜨던 숟가락을 국그릇에 놓았다. 덩달아 수저를 내린 강수혁이 윤조를 이상하게 봤다.
“왜 그렇게 놀라?”
“되게 편안하게 참여하시겠다고 말씀하셔서요.”
그에 강수혁이 콧방귀를 꼈다.
“어차피 안 한다고 하면 네가 무슨 개소리를 해서라도 참여를 유도할 거잖아. 패널티 때문에 너 이기지 못하는데 싸워 봤자 소용도 없고. 심심하기도 하고.”
“기왕 할 거 기분 좋게 하면 좋죠.”
강수혁과 뭔가 해 보려고 할 때 이렇게 편안하게 건의하고 동의받았던 적이 있던가? 잠시 되짚었는데 이번이 처음이었다.
‘방사능 지역에서 헬멧 벗고 경고 신호 보내서 유인했던 때가 고작 얼마 전이었는데.’
초창기에는 목숨을 내놓고 강수혁을 유인했고 이후에는 성 상납에 각종 대가를 치르면서 억지로 이끌었다. 좋게 말로 하자고 한 적도 최초고, 그러겠다는 대답이 곱게 돌아온 것도 최초였다. 심지어 숟가락을 탁 놓는 일도 없이.
노력 끝에 광명이 드는구나 싶어 감격을 금치 못했다.
한편으로 장선욱 중장의 혜안에도 탄복했다. 동거라는 획기적인 방안을 그가 제안했다. 직장에 괜히 워크샵이 있는 게 아니었다. 효과가 있으니 존재하고 지속되는 게 아닌가. 물론 직장인들이 들었다면 윤조의 멱살을 잡으려 들겠지만. 어쨌든 개망나니를 상대로는 통했다.
‘역시 밥상머리 딸랑딸랑이 최고야.’
밀당이라는 표현을 들었을 때는 정말로 토 나올 뻔했었다. 지랄 맞은 개새끼와 얼굴을 24시간 맞대고 사는 과정이 이렇게 극적인 변화를 이끌 줄은, 당시의 윤조는 꿈에도 몰랐다. 오히려 변사체로 실려 나가지 않을까 내심 두려웠다. 그런데 그게 정답이었을 줄이야. 장선욱 중장이야말로 강수혁의 심리의 달인이었다.
‘강수혁의 양부 역할을 했다더니 잘 알긴 아네.’
목숨을 건 밀당인데 당연히 소용이 있어야지.
윤조는 어제 분노한 강수혁으로 인해 겪었던 생명의 위기를 떠올리며 잘게 진저리를 쳤다. 그러자 강수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밥 먹다 말고 왜 떨어?”
어제 일을 다시 언급해서 분위기를 망칠 순 없었다.
“벌레가 있는 것 같아서요.”
반사적으로 벌레 핑계를 댔다. 강수혁은 없는 벌레를 찾기 위해 식탁 인근을 스캔했다. 최상급 에스퍼의 동체 시력을 간과했다. 윤조는 제 실수를 잠시 후회했다.
분명히 없는 벌레 핑계를 댄다면서 밥상머리에서도 거짓말하냐면서 버럭 고함칠 것이다. 그러곤 훈련 얘기는 또 저 멀리 날아갈 터.
그런데 강수혁은 잠잠했다.
“벌레 안 보이는데 먼진가 보지. 밥 먹고 환기해.”
“아, 예.”
세상에. 갑자기 사람이 이렇게 변할 수가 있나? 혹시 어제 패널티 잘못 맞아서 인격이 변했냐고 묻고 싶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입을 가볍게 놀리는 대신 꾹 참았다.
이렇게 평범하고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다니 얼마나 신기한지 국이 코로 들어갈 뻔했다.
수저를 제대로 놀리지 못하는 윤조를 향해 강수혁이 한마디 덧붙였다.
“미친놈 보듯 하지 말고 할 말 있으면 해. 나중에 또 지랄할 생각 말고.”
“미친놈 보듯 한 게 아닙니다. 소령님이 화를 내지 않으니까 평소보다 훨씬 멋져 보여서요.”
이번에는 할 말을 잊은 사람은 상대였다. 강수혁은 이게 돌았나? 하는 표정으로 윤조를 봤다.
“거짓말 아닙니다. 진짜 멋져 보여서 드린 말씀이에요.”
“…….”
“요즘 마초 상남자는 지나갔어요. 요즘은 강 소령님처럼 자상하고 가정적인 남자가 인기 있습니다. 장래 아내되실 분이 누군지 몰라도 벌써 부러운데요.”
기분 좋은 김에 그간 하사관으로 뺑이치면서 익힌 군대용 사교성을 한껏 발휘하여 아부를 떨었다. 그러자 무표정하던 상대의 낯이 살짝 일그러졌다. 못마땅해 보였다.
아, 이건 너무 나갔나? 아직 노골적인 딸랑딸랑은 섣부른가. 이번에야말로 청테이프로 붙여 놓은 식탁이 다시 분리되나 싶었다.
“멋져 보인단 말이지. 어때, 조만간 애인 생길 것 같아?”
그래! 이거야! 이게 보통 군인 동료 사이에 오가는 대화라고!
강수혁과 나누는 정상적인 대화에 너무나도 감격한 나머지 윤조는 기립 박수칠 뻔했다. 우리 망나니, 드디어 철이 들었구나! 박수 대신에 표정과 고갯짓에 오버를 충분히 섞어 맞장구를 쳤다.
그 사람이 윤조 본인과 털끝만큼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도시락을 싸 들고 다니면서 말릴 거다. 친분이 전혀 없는 생판 남이라도 마냥 잘해 보라고 빌기에는 솔직히 양심의 가책을 느낄 거고.
“얼마든지 가능하십니다. 잘생기고 능력 있고 요리도 잘하시고. 길거리에 나가면 예쁜 이성들이 쫙 줄을 설 겁니다. 소령님은 그냥 고르시면 돼요.”
“그렇단 말이지? 용기가 생기네.”
“솔직히 지금까지 없으셨던 게 이상한 거예요. 아, 없으셨던 건 맞죠? 있다는 얘기는 못 들어서.”
솔직히 있었겠냐? 저런 망나니의 재생산을 막기 위해서라도 없어야 했다.
“없었어.”
역시.
“아! 진짜 사람들이 남자 볼 줄 모릅니다. 강 소령님 같은 알짜를 가만히 두다니요. 아니면 너무 높은 산이라 애초에 포기한 건가?”
“훗.”
강수혁이 웃었다. 역시 칭찬은 미친 개망나니도 웃게 만든다.
“애인이라. 있으면 좋지.”
“그렇죠.”
물론 강수혁의 진짜 성질머리와 저질러온 각종 악행에 관해 아는 순간 그 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질 확률이 1,000퍼센트. 아무리 잘 생기고 돈 많고 능력 끝내줘도 툭하면 사람을 불구 만들기를 즐기는 미친 사이코패스 새끼와 살려는 정상인은 없다에 손모가지 걸 수 있다.
‘뭐 당장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닌데.’
윤조는 씩 웃었다. 아부에 기분이 좋은지 강수혁도 마주 웃었다. 평화로운 식탁이었다.
식사 후 설거지하는 김윤조를 뒤로한 수혁은 창문을 열어 환기했다. 창문 인근에 독수리를 능가하는 동체 시력으로 벌레가 있는지 확인했다. 불빛을 감지하고 날아드는 나방과 풀벌레가 있긴 해도 촘촘한 방충망 덕분에 집 안까지 들어오진 못했다. 벌레는 역시 핑계인 모양이었다.
‘벌레는 무슨. 좆같은 개새끼.’
수혁은 속으로 쌍욕을 삼켰다. 고작 벌레 핑계 좀 댔다고 열받은 건 아니었다. 김윤조 저 새끼가 분명히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금방 사라지긴 했지만, 늘 가이드를 필요 이상으로 의식하는 에스퍼에게는 찰나의 변화도 과하게 전달되었다.
‘뭐 기왕 하는 거 기분 좋은 게 좋다고? 시발, 좋게 얘기하면 내심 역겨워하는 주제에.’
김윤조가 수혁을 질색할 이유야 차고 넘친다. 시작부터 끝까지. 심지어 어제도 크게 싸우지 않았나. 두 꼰대의 난입과 뒤이은 섹스로 극적인 타협을 보긴 했다. 마음에 들든 안 들든, 김윤조가 미친 마조히스트 새끼가 아닌 이상 자신을 수시로 죽을 지경으로 몰아갔던 개망나니 에스퍼에게 호의를 가질 리가 만무하다.
지독한 만남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수혁은 입맛이 썼다. 과거를 되돌릴 순 없다. 그럴 능력이 있었다면 수혁은 제가 태어나기 전에 저를 낳은 부모를 없애 버렸을 거다.
‘김윤조와의 시작이 이렇게 엉망이 아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뒤늦게 제 행동이 후회되었다. 하지만 후회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는가. 사과할 만한 짓도 아니었다. 차라리 미워하게 두는 것이 낫다. 최상은 역시 안 얽히는 것.
현 상태에서 최선은 심나연이 다른 가이드 제작에 성공하여 그쪽으로 옮겨 가는 거다.
그럼 김윤조는 역겨운 상대를 앞에 두고 저런 가식과 내숭을 떨지 않아도 된다. 페어링을 해제하더라도 김윤조가 작전 협조 요청을 받으면 응할 생각이 있다. 강수혁의 힘을 이용하기 위해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고 동성에게 다리도 벌리는 미친 악바리에게 트리플 S급 자유이용권 정도는 주어야 마땅했다.
김윤조는 폭력과 거리가 먼 에스퍼와 페어링하여 수혁에게서 벗어난다. 또 수혁은 과거 패인을 반복하지 않고 새 가이드와는 처음부터 상식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평화롭게 군 생활을 하다가 뒈질 날이 오면 잘 뒈지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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