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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56화 (133/256)

56화

윤조는 된장국을 열심히 퍼먹으면서 물었다.

“보기보다 되게 가정적이시네요.

“가정적?”

“네. 집안일도 잘하고 요리 실력도 좋고. 사람 돌보는 것도 잘하시고.”

“처음 들었어.”

수혁이 입꼬리를 올렸다.

“정말입니까? 이렇게만 하면 누구나 가정적이라고 할 것 같은데요.”

“이렇게 하게 만든 사람이 누구누구 하나뿐이거든. 그런 얘기를 할 만큼 가까운 사람도 없었고 말이야.”

어제 갖은 지랄을 떠는 중에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자의식도 없이 능력을 쓰는 신생아를 어느 누가 감당하겠냐고. 당연히 정부 양육이라고. 자신을 포기한 부모에 대한 원망이 없어 보였다. 부모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일까.

위탁 양육이 나쁘다고 할 순 없다. 어떤 면에서는 부모보다 더 나은 전문가를 통해 나름대로 소중하게 보필은 받았을 거다.

문제는 성장하여 위탁 양육을 벗어난 강수혁이 바로 군부에 소속되었다는 점이었다. 그전에 위탁 양육을 군부 산하 시설에서 맡았을 가능성이 크다. 무려 트리플 S급 에스퍼를 일반 전문인에게 맡기진 않았을 거다.

아이가 아닌, 귀중한 ‘자산’으로 먼저 취급받는 삶은 어떤 것인가.

현재 윤조도 사람이기 전에 군인이고, 군인이기 전에 가이드로서 먼저 인식된다. 하지만 윤조는 어디까지나 스스로 그렇게 되길 선택했다.

남자에게 다리를 벌리게 되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한 난감한 상황에 빠지긴 했다. 그래도 제 선택이 가져온 결과이기에 감수하고 있다.

하지만 강수혁은 달랐다. 그에겐 어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태어나 보니 에스퍼다. 그것도 인권을 무시할 만큼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자의식이 생기기도 전에 그의 운명은 정해졌다.

태어날 환경을 스스로 고르는 사람은 없기에 어느 정도는 어쩔 수 없긴 해도 인권 박탈은 가혹하다. 일반인은 자신의 처지가 불쌍하다는 인식 정도는 있는데, 강수혁은 그마저도 없다.

자폭 장치라는 위험한 물건을 등에 지게 하고도 모자라 가이드까지 들이대는 군부를 보며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만약 윤조 자신이 당했다면 그냥 특작부 전체를 다 날려 버리고 시원하게 자폭했을 거다. 그에 비하면 강수혁은 상당히 이성적이고 자비롭게 행동했다. 정확하게 윤조 하나만 공격했으니까. 물론 그가 자신에게 한 짓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 별개였다.

겉보기에 정신머리가 썩은 개망나니라도 그렇게 구는 나름의 이유는 있다. 그것도 상당히 좆같은 이유가.

과거를 알게 되니 희미하게 동정심이 일 것 같기도 했다.

스톡홀롬 증후군이라고 해도 뭐 어쩔 수 있나 싶다. 이러나저러나 강수혁과는 어쩌면 뒈질 때까지 얽힐 것 같으니 조금이라도 잘 지내보는 쪽이 건설적이다.

무엇보다 강수혁과의 페어링을 강력하게 주장한 건 바로 윤조 자신이었으니. 이렇게 될 줄 모르고 그의 능력만 본 제 어리석음을 탓할 수밖에.

그 많은 된장국을 싹싹 긁어먹고도 모자라 더 받아서 밥까지 말았다.

“오늘따라 밥이 꿀맛이네요.”

“그렇게 막 먹고 또 체했다고 지랄하기만 해 봐라.”

이상하게 핀잔하는 음성이 밉게 들리지 않는다.

“어차피 이따가 연구실 갈 겁니다. 어제 훈련 데이터도 검토하고 그 김에 컨디션 조절도 좀 하고요. 네 번은 너무 나갔어요. 세 번까진 제가 참겠으니, 네 번은 소령님이 좀 참아 주세요.”

“두 번 하고 쉬고 두 번 하는 건?”

방금 누가 밥맛이 꿀맛이라고 했나. 밥맛은 역시나 밥맛일 뿐이다. 입맛이 뚝 떨어진 채로 미친 소리를 짖어대는 개새끼를 빤히 봤다.

“…….”

농담이어도 빡치는데 저 망나니는 반쯤 진심이었다.

동정심이 일다가도 쏙 들어갔다. 하여간 조금 덜 미워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개소리 금지.”

딱 개새끼가 진지한 만큼 윤조도 진지하게 답했다.

“알았어. 누가 보면 잡아먹는 줄 알겠네.”

잡아먹으려고 했던 주제에.

불우한 과거니 뭐니 해도 이 망할 새끼가 뻔뻔한 개새끼임은 변하지 않는다.

* * *

윤조는 연구소에 들렀다.

훈련 데이터를 분석하는 심 박사 외에도 다른 군 소속 연구원들이 있었다. 그들은 윤조를 보고 눈인사만 할 뿐, 특별히 말을 걸진 않았다. 바쁘신 분들이다.

“안녕하십니까, 박사님.”

윤조는 심 박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하고는 인큐베이터를 작동시켰다.

“김윤조, 여기가 무슨 공짜 안마소야? 이 비싼 기계가 네 전용 안마기냐고. 네가 쓰고 싶다고 알아서 막 돌리고 그러게.”

물어보지도 않고 알아서 척척 세팅한 후에 드러누워 눈을 감는 윤조를 빤히 본 심 박사가 막 인공 양수가 차오르는 유리 덮개를 툭툭 쳤다.

-컨디션 저조하니까 좀 써도 되지 않습니까. 어제 강 소령님 상대하느라 죽는 줄 알았습니다.

“자업자득이야.”

심 박사가 코웃음을 쳤다.

“그만 좀 싸워라. 싸우는 게 지겹지도 않냐?”

-솔직히 저도 지겹습니다. 그런데 강 소령님이 자꾸 열받게 하니까요.

“열받게 하는 개망나니인 건 나도 인정하는 바인데 이번에 둘이 싸우는 꼴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 하니까 덮어 놓고 네 편은 못 들겠다. 너도 만만찮아.”

-제가요?

“야, 천하의 강수혁한테 그렇게 막말 지껄이고 모가지가 붙어 있는 게 다행인 줄 알아.”

-…….

“너, 강수혁이 소령인 건 아냐?”

-알고 있습니다.

“개망나니가 정말 너 많이 좋아하긴 하나 보다.”

그러면서 심 박사는 오늘 윤조가 멀쩡하게 걸어 들어올 줄은 몰랐다고 덧붙였다. 허리 부러져서 응급으로 실려 올 줄 알았다고도 덧붙였다.

전 같으면 좋아한다는 소리에 진저리를 쳤을 텐데. 오늘은 딱히 그렇지는 않았다.

된장국의 마법인가.

윤조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강수혁은 윤조를 좋아한다. 그 감정이 보통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발생하는 자연스러운 감정과는 매우 거리가 먼 인공적인 감정이라고 해도 말이다.

“가이드 생기더니 강수혁 성질 많이 죽었어. 최 대령이 해외 합동 훈련 참가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더라.”

-해외 훈련이요? 누가요? 제가요?

윤조는 유리 덮개 저쪽에 있는 심 박사를 응시했다.

“그래. 조만간 가이드 보유국끼리 합동 훈련 있어. 대(對) G형 게이트 모의 훈련. 8년 전 사건 이후로 G형 게이트는 초국가적 대응을 하기로 조약을 체결했잖아. 정기 훈련하는데 S급 에스퍼 위주로 모여. 당연히 가이드도 참가하고. 이번에 너랑 강수혁도 보낼까 하고 논의 중이야. 그렇지 않아도 타국에서 강수혁 참가를 강하게 요청하기도 해서.”

-이전엔 그 훈련을 참가한 적이 없습니까?

다국적 훈련을 참가했다는 소식을 들어본 일이 없다.

“없지 당연히. 집안에서 새는 바가지를 밖에, 그것도 물 건너 밖에 어떻게 내놓냐? 그 새끼 통제 안 되는 걸 알아채는 순간부터 각국이 폐기 혹은 공동 관리를 요구할 텐데.”

그러면서 심 박사는 인큐베이터 안 윤조를 곁눈질했다.

“아무리 개망나니라도 말이야. 일단은 트리플 S급이다 보니 타국에서 가이드를 몰래 접근시켜서 홀라당 채갈 수도 있잖아. 강수혁은 가이드에 아주 민감한 편이기도 하고. 본인이 귀찮아해서 나가지 않았지만, 나간다고 했어도 상부에서 막았을 거라고 봐.”

-그럼 이번에는요?

“네가 있으니까.”

당연할 걸 묻는다는 듯이 심 박사가 대답했다.

“이번 훈련 보고를 토대로 상부에서 둘 페어링에 대한 신뢰를 어느 정도 확보했다고 판단했나 봐. 너희 2인조 실전 배치를 추진하래.”

-그 상부가 정확하게……?

윤조가 물었다.

“장선욱 중장이지, 달리 누가 있겠어.”

-그렇군요.

이번에도 쓸데없는 질문이었다.

-장선욱 중장님이 강수혁 소령에게 관심이 많으신가 봅니다. 피드백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을 몰랐는데요.

“사고란 사고는 다 치고 다니는 개망나니에게 관심을 안 주려야 안 줄 수가 없지. 거기다가 장 중장이 강수혁을 키우다시피 하기도 했고. 여러 사람이 반대하는 가이드 프로젝트를 뚝심 있게 밀어붙인 사람도 장 중장이고 말이야.”

-장선욱 중장님이 강 소령님을 키웠다고요?

그런 얘기는 처음 들었다. 윤조는 저도 모르게 유리 덮개에 손을 턱 댔다.

“음. 위탁 시설에서 이쪽으로 넘어왔을 때가 강수혁 열한 살 때였나? 그때 장 중장이 중령이었지, 아마. 내가 소위였을 때니까 그때쯤 맞다. 장 중장이 보호자 겸 훈련자였어.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꼬맹이 새끼가 같은 소위라고 얼마나 싸가지 없게 굴던지.”

심 박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열한 살에 임관했다고요?

“열한 살 때 이미 웬만한 S급을 능가했어.”

-하지만 미성년자인데. 임관 시켰다는 말은 작전에도 투입했다는 뜻 아닙니까? 인권 유린에 아동 학대예요.

윤조는 언성을 높였다.

“미성년자이기 전에 에스퍼잖아. 사회에선 당연히 군대로 보내고, 군대에선 당연히 군인 취급이지.”

-강 소령님 성격이 그 꼬라지로 개판 난 이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뭐, 탓이 없다고는 할 수 없지.”

심 박사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래 놓고 말을 안 듣는다고 자폭 장치도 달았어요? 와, 진짜 너무했다. 저라도 항명하겠습니다. 항명이 뭡니까? 탈영 후에 무장 테러 단체라도 들어갔어요. 강수혁 소령님, 성격 더러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진짜 보살이네요, 보살.

“어쭈, 네 에스퍼라고 편드냐?”

심 박사가 짐짓 놀렸다. 하지만 지금 윤조는 친밀한 상관의 농담을 받아 줄 기분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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