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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50화 (127/256)

50화

-……

김윤조는 기가 막힌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손을 떨치지는 않았다.

-강수혁, 야이 미친 새끼야. 네 가이드가 좋아 죽겠냐? 엉? 이거 오픈 채널이라고! 여기 다아 듣고 있어. 개짓거리는 훈련 끝나고 따로 해.

갑자기 심 박사가 이죽거렸다.

“시끄러워, 만년 솔로 주제에.”

수혁은 가진 자의 여유로움으로 맞받아쳤다. 김윤조가 뜨악한 표정으로 수혁을 응시했다.

-야! 너 말 다 했어?

-심나연, 참아. 여기서 화내면 지는 거야. 근데 넌 이미 진 것 같다.

최정이 끼어들었다.

-놔! 저 새끼 오늘부로 김윤조 리스트에서 지운다! 내가 못 할 것 같아?

수혁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상대를 깔끔하게 무시했다.

“그럼 1시 방향부터 갈까?”

-네.

수혁은 김윤조의 손을 잡고 산책하듯 시가지를 거닐었다.

-전방, 3시 방향.

펑.

-위, 11시 방향.

퍼펑.

1초 정도 차를 두고 목표물의 출현을 예고하는 가이드의 보조에 따라 수혁은 튀어나오는 목표물을 정확하게 제거했다.

시가지 수색과 목표물 파괴가 끝날 때까지 내내 손을 잡았다.

건물 안으로 들어갈 때는 김윤조를 두 팔로 안고 사뿐히 날아올랐다. 그리고 지하로 내려갈 때는 김윤조를 제 뒤로 완벽하게 숨겼다. 숨겨진 목표물을 수색해 제거 중에 건물 파편이 떨어질 때는 괜히 손을 펴서 김윤조의 이마 인근을 가렸다. 혹시라도 맞을까 봐서.

-헬멧 쓰고 있거든요.

“귀한 헬멧이잖아. 고장 나면 3주 걸린다며?”

김윤조는 낯짝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렸다.

“이런 훈련도 은근히 재미있긴 하네. 그렇지?”

-꼭 놀러 나온 사람 같습니다.

심드렁한 응답이 돌아왔다. 솔직히 놀러 나온 기분이긴 했다.

“데이트가 이런 걸까.”

-데이트라뇨?

김윤조가 기겁했다.

“손잡고 길거리 걸어 다니면 다 데이트 아닌가?”

-제정신이세요? 전투복 입고 모의 시가전용 유령 도시 수색 중이라고요.

두부 새끼는 상황의 부절적함을 거론할 뿐 우리가 데이트할 사이냐고 반박하진 않는다. 역시 데이트할 사이는 맞는 거지? 커플 아이템을 준비하는 게 틀림없다.

“어때? 그런 기분을 내면 되는 거지. 모든 건 마음 먹기에 달려 있어.”

수혁이 답했다.

-강수혁, 다시 말하지만. 이거 오픈 채널이야.

최정이 끼어들었다.

-개망나니 새끼가 드디어 돌았네. 완전히 돌았어. 다 쓰러져 가는 폐허 돌아다니면서 모의 외계인 처리하는 게 잘도 데이트겠다. 너, 정신 감정 좀 받아야 해.

심 박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데이트 해 본 적도 없으면서 아는 척하긴.”

수혁은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야이 미친놈아! 누가 없다고 했어? 너 내가 가만히 안 둔다!

-나연아, 너는 저 새끼 못 이긴다니까.

지랄하는 놈들을 깡그리 무시한 수혁은 제 가이드와 함께 남은 데이트를 즐겼다.

* * *

드디어 모의 시가전이 끝났다. 격납고로 돌아온 윤조는 수신기 볼륨을 죽이면서 헬멧을 벗었다.

“휴.”

훈련 내내 제멋대로 지껄이는 놈 천지였다. 훈련이 파행으로 치닫지 않은 것이 용했다.

갖은 개소리로 사람 속을 뒤집어 놓은 망나니 새끼에, 그 망나니를 이겨 먹지 못해 수시로 버럭대는 심 박사 하며. 둘을 말리느라 끼어드는 최정 대령까지. 솔직히 훈련만 아니면 통신을 끄고 싶었다.

‘훈련 중에 개 짓거리하는 건 둘째 치고 뭐, 데이트? 데이트할 놈이 없어서 망나니랑 하겠냐고. 상부 명령으로 동거하는 것도 싫어 죽겠는데.’

속으로 욕설을 마구 날렸다. 기왕 동거하는 김에 덜 싸워 보겠다고 이래저래 비위를 맞춰 줬더니, 미친 망나니 새끼가 별 망상을 다 품는다.

그렇게 비위를 맞춘 결과가 훈련 참가로 나타난 건 좋은데, 저 새끼가 썩은 김칫국물을 원샷하는 건 사절이었다.

“훗.”

헬멧에 눌린 머리를 벅벅 문지르는 윤조를 향해 강수혁이 웃었다. 기분 좋으시단다. 어련하시겠는가.

뭔가 개소리를 하려는 것 같아서 윤조는 얼른 자리를 벗어났다. 그렇지 않아도 훈련 결과가 궁금하던 참이었기에 최정을 향해 물었다.

“성과가 어떻습니까?”

“기대 이상이야. 명중률 100퍼센트야.”

최정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거 아닌가? 가이드 없을 때도 이 정도는 했어.”

간이 의자에 거만한 자세로 앉은 강수혁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가 더 거슬렸다.

윤조는 제 잘난 맛에 사는 에스퍼 놈을 깔끔하게 무시했다. 대신 훈련 결과를 모니터링하기 위해 최정과 심 박사 쪽으로 다가갔다.

“파손 기기가 1개입니다. 직접 영향으로 인한 건 아니고, 요격 소음에 놀란 야생 고라니가 도망치면서 밟는 바람에 터졌습니다.”

오퍼레이터 중 한 명이 두 대령에게 보고했다.

“그럼 실질 피해 손상률 0퍼센트네요?”

“네. 시가전도 마찬가지입니다. 경미한 손상이 세 군데. 붕괴 건은 제로입니다. ”

“30퍼센트 손실은 각오했는데.”

“심나연, 거긴 어때?”

심 박사가 패드를 조작하더니 냉소했다.

“시스템 안정도 내내 최상 유지. 개망나니 컨디션이 좋긴 하네. 김 준위 덕분이겠지만.”

“실전 투입 가능하겠어?”

“이대로만 유지한다면.”

윤조는 심 박사에게 다가가 패드 화면을 직접 봤다.

훈련장 곳곳에 간이 진동 감지 장치를 심어 놨다. 요격 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 사항을 측정하기 위해서였다. 각각 훈련지에 100개 이상.

손상률을 최소화가 이번 훈련의 주목적이었다. 당연히 사전에 계획했고 그걸 강수혁에게는 통지하지 않은 것도 사전에 조율된 결과였다. 강수혁이 인지하면 훈련 결과가 오염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큰 그림자가 윤조 위로 쏟아졌다. 강수혁이었다.

“요격을 통한 페어링 강화 훈련이라고 했잖아.”

“맞아요.”

“그런데 왜 요격률이나 명중률을 따지지 않고 손상률을 신경 써?”

심 박사의 패드를 훔쳐보고 상황을 파악한 강수혁이 낯을 딱딱하게 굳혔다.

“훈련의 진짜 목적이 따로 있었군. 그것도 모르고 난 멍청이처럼 놀아났고. 군말 없이 성실하게 훈련에 협조했더니. 이 새끼들이. 이거 디자인 누가 했어?”

험악한 표정을 본 최정이 기겁하며 한 걸음 물러났다. 훈련 계획 수립자가 자신이라고 아주 광고하고 있었다.

“숨긴 적 없어. 이번 훈련의 당사자는 엄연히 김 준위고 강 소령의 그의 훈련 보조잖아. 훈련 당사자에게 통보했다고.”

망나니의 눈초리가 윤조를 향했다. 갑자기 그런 건 왜 신경 쓰는지 영문을 몰랐다. 윤조는 멀뚱한 표정을 지으며 설명했다.

“원래 부수적 피해에 관심이 없으시지 않습니까. 알려 봤자 무시하시거나, 또 신경 쓴다고 해도 괜히 요격률이 떨어질 수 있으니까요.”

“이 새끼가 누굴 뇌도 없는 기계로 알아.”

이상하게 빡친 강수혁이 윤조의 멱살을 잡으려 했다. 그때 심 박사가 끼어들었다.

“강수혁 너, 뇌 있었어? ”

“시발. 지금까지 툭 하면 전기 충격으로 튀긴 뇌는 내 뇌가 아니라 그럼 누구 뇌야?”

“뇌가 있는데 이때까지 출격만 했다고 하면 아파트 단지를 다 무너뜨리고 그랬어?”

광대 목소리로 과장하여 놀라던 심 박사는 이내 윤조를 돌아보았다.

“우리 개망나니, 뇌 기능 상실이라 어떡하지? 윤조야, 네 고생길이 훤하다.”

“각오했습니다. 진짜 불구로 태어난 개도 인내심을 가지고 훈련하면 똥오줌을 가리는데요, 뭐.”

“그래도.”

“제 걱정은 하지 마십시오. 다음 훈련은 어떻게 됩니까?”

그때였다.

쾅!

격납고의 거대한 철제 문짝이 훅 날아갔다. 저 멀리 있던 헬기 한 대가 터졌다. 문짝에 맞은 거였다.

“아.”

최정이 멍하게 탄성을 질렀다. 그러곤 순식간에 늙었다.

오랜만에 망나니의 거지 같은 성질머리 뚜껑이 열렸다. 그를 증명하듯 강수혁의 홍채가 완연한 오팔색으로 빛나고 있었다.

“김윤조, 너 말 다 했어?”

“별것도 아닌데 왜 그렇게 화를 내십니까?”

“나를 속여 놓고 별거 아니야? 이 새끼가!”

“아아, 멱살은 안 됩니다. 이 전투복 수리하는데 3주 걸렸습니다. 장장 3주.”

윤조의 멱살로 향하던 강수혁의 손이 멈칫했다. 전투복에 인큐베이터 망가뜨린 일로 윤조 스스로 진짜 진저리 날 정도로 지랄을 떨었다. 치사하고 더러워서 앞으론 안 건드리겠다는 상대의 다짐을 받아내기까지 얼마나 고생했던가.

“잡으려면 허리를 잡으십시오.”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길고 단단한 팔이 윤조의 허리에 감겼다. 그러곤 별다른 신호도 없이 고속으로 날아올랐다.

“으억.”

헬멧을 쓰지 못해 머리가 바람에 휘날렸다.

“가앙수혀억! 다음 훈련으은!”

공중을 향해 외치는 최정 대령의 목소리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이윽고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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