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윤조는 완전히 녹초가 되었다. 사지에 힘이 없었다.
“허억. 허억.”
수증기를 머금은 날숨이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샜다.
시선이 천장과 언저리를 방황했다. 강렬한 행위에 뇌압이 높아졌는지, 시야가 다소 흐렸다.
천천히 숨을 골랐다. 수축한 혈관이 확장하면서 산소를 빠르게 전달했다. 느린 두뇌 회전이 서서히 제 속도를 찾아갔다.
“무겁습니다.”
“잠시만 이렇게 있자. 힘들어.”
“뭘 잘했…….”
뭘 잘했다고 힘들기까지 하냐고 비아냥대려다가 그만뒀다.
꼭 필요하지 않은 순간에 괜한 힘이 넘쳐서 온갖 사고와 테러를 일삼은 에스퍼의 행동 제어를 위해 가이드가 되었다. 무한한 화력을 자랑하는 망나니가 비번 중에 자택에서 녹초가 되면 좋은 거다.
잘한 게 맞다.
“힘들었다니 참…… 잘했어요.”
망할 놈의 입이 굳이 할 필요가 없는 말을 늘어놓았다.
윤조의 머리 옆 베개에 얼굴을 처박고 있던 강수혁이 움찔했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리더니 천장을 보는 윤조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댔다.
“한시라도 주둥이를 안 다물면 안 되겠냐. 이 정도면 병이야, 그거.”
“…….”
할 말이 없었다.
완전히 돌아온 시야에 천장과 벽이 만나는 모서리가 삐뚜름한 각도로 비쳤다. 가슴 위에는 축축하고 무거운 덩치가 있다. 전신은 나른했다. 대단히 낯선 상황이었다.
“그런데요.”
“진짜. 주둥이 좀 다물라니까.”
“그게 아니라. 저, 하다가 기절하지 않은 거 처음인 것 같은데요?”
윤조는 그나마 자유로운 쪽 손으로 강수혁의 열린 흉갑 근처를 더듬었다. 말을 잘 들은 문제견을 칭찬하기 위해 귀 뒤를 박박 문지르고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 주어야 하는데. 지금 체력과 자세로는 이게 한계였다.
“참 잘했어요.”
“김. 윤. 조.”
귓가에 울리는 음성에서 노기가 느껴졌다.
“비꼬는 거 아니라 칭찬입니다. 아프긴 좀 아팠는데 이 정도면 인큐베이터 안 들어가도 될 것 같습니다. 기분도 좋았고요. 앞으로도 딱 이렇게만 합시다.”
“…….”
노기에 고개를 들었던 강수혁은 별다른 반박을 하지 않았다. 긍정적 평가가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윤조의 위에서 내려온 그는 옆에 눕더니 냅다 팔을 윤조의 허리에 감았다. 뒤에서부터 안긴 모양새가 되었다. 꼭 사귀는 사이 같아서 좀 민망했다.
일단 안겨 있던 윤조는 고요함을 참지 못하고 다시 입을 놀렸다.
“그냥 이대로 있습니까?”
“그럼 뭐 하게.”
윤조의 뒷덜미에 붙은 입술이 움직였다.
“아니 뭐, 하고 나서 보통 이러고 있는가 해서요. 기절 안 할 때 말입니다.”
“보통 뭐를 하는데?”
강수혁이 되물었다. 이런 경우가 처음이라 윤조도 딱히 뭐를 해야 할지 몰랐다.
“잘 모르겠습니다만, 보통 씻거나 먹거나 하지 않을까요?”
“그래?”
그 말에 강수혁이 몸을 일으켰다.
등에 철썩 붙어 있던 뜨거운 피부가 떨어지자 윤조는 괜한 시림에 떨어야 했다.
“그럼 씻고 먹자.”
그 말과 함께 강수혁은 뻥 뚫린 벽을 무시하고 굳이 닫힌 방문을 열고 걸어서 방을 나갔다.
멀쩡한 벽을 뚫고 날아올 때는 언제고 참나. 들어올 때 다르고 나갈 때 다르다더니.
먹었으니 끝이란 건가? 거참 냉정하네. 개새끼.
윤조는 강수혁이 씻는 동안 가만히 누워 있었다.
상대가 욕실에서 나오는 기척이 시원하게 뚫린 벽 구멍을 통해 들리고서야, 후들거리는 다리를 모아 침대에서 내려왔다.
“으.”
일어서자마자 풀린 무릎과 발목 관절이 쑤셨다. 하지만 중력의 작용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다리 사이에서 찝찌름한 것이 슬그머니 샜다.
앞은 제가 싸지른 것, 뒤는 강수혁이 싸지른 것으로 엉망이었다.
근처에 떨어져 있는 강수혁의 티셔츠를 집어서 가랑이를 북북 닦았다. 기절을 안 해서 좋긴 한데. 대신 별걸 다 신경 써야 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조심스럽게 놀려 계단을 내려갔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전신이 찌릿찌릿 울렸다. 그래도 척추가 나간 것 같은 통증은 없었다.
“어쨌든 변하고 있잖아. 긍정적으로.”
강수혁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틀린 말은 아니지.’
사용감이 느껴지는 욕실에 들어가 윤조는 가볍게 온수만 끼얹어 몸을 씻었다. 욕실을 나오자 발치에 새 옷이 있었다.
‘보기보다 꼼꼼하잖아.’
내준 옷을 입으면서 윤조는 인기척이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처음 강수혁 혼자 사는 집이라고 해서 완전 창고 같을 줄 알았다. 군데군데 벽지가 뜯어져 있고 소파는 스프링이 튀어나오고 장판은 들떠서 신발을 신고 다니는 공간, 뭐 그런 그림을 상상했다. 보통 영화 속 빌런이 사는 집이 딱 그렇지 않나.
하지만 여긴 윤조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햇빛이 잘 드는 정갈한 거실이었다.
잘 정돈된 공간엔 적당히 사용감 있는 가구가 여느 가정집처럼 놓여 있었다. 마루 시공한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문으로 사용하는 창문 위에는 돌돌 말린 블라인드가, 양옆으로는 얇은 커튼이 달려 있었다. 회색인데도 체크 무늬가 있어서 삭막하지 않고 따뜻했다.
제가 살던 집보다 훨씬 나았다.
그러고 보니 오전에 주방에 들렀을 때도 살짝 놀랐었다.
물 찾으려고 냉장고를 열었을 때. 기껏해야 투명한 생수병 서너 개에 맥주 캔이나 들어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윤조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차곡차곡 쌓인 반찬통이 윤조를 맞이한 것이었다. 게다가 요리를 하는지 각종 소스에 손질한 채소도 있었다. 모르긴 몰라도 냉동실을 열어 보면 육질 좋은 고기도 가득 차 있으리라.
비록 주택 외부와 마당은 버려지기 직전의 흉가 꼴이어도 집 안은 일반 가정집과 똑같았다.
‘집 관리 담당이 있는 거네.’
고작 소령에게 주거 관리 담당이라니. 계급상으로는 턱없는 대우긴 했다. 하지만 그 소령이 강수혁인 이상 얘기가 달랐다.
좆같은 성질머리의 안녕이 곧 부대의 안녕으로 직결되는 이상 생활 지원을 소홀히 해서 저 속 좁은 망나니의 성질을 긁을 필요는 없다. 더불어 그는 이미 장선욱 중장의 집을 강탈했다. 집도 빼앗긴 마당에 전담 인원 하나 못 붙이겠는가.
결정적으로 저 망나니가 성질을 부려 부대에 입히는 손해를 계산해 봤을 때, 인건비가 훨씬 저렴했다. 분명히 본부 차원에서 생활 지원이 있을 거다.
인기척은 주방에서 났다. 윤조는 그쪽으로 향하면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우리 밥은 어떻게 먹습니까? 부대 식당 갑니까? 아니면 배달입니까?”
“둘 다 아냐. 냉장고에 있는 재료로 만들어서 먹을 거야.”
주방 수납장에서 뭔가를 찾던 강수혁이 대답했다. 냉장고에 식자재가 풍부하긴 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윤조는 갑자기 정색했다.
“설마? 제가 합니까?”
망했다. 상판을 맞대자마자 풀베기부터 시킬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아까 예초기 노릇이 끝나면 식기세척기도 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사이에 취사병이라는 말을 넣지 않은 건 다분히 의도적일 것이다.
“치사하게 이러기 있습니까? 했잖아요. 했으면 시원하게 용서하고 그럽시다, 좀.”
“뭔 개소리야?”
강수혁이 미간을 구겼다.
“계급 4단계나 높으시지 않습니까. 그 말을 뒤집으면 저는 계급이 4단계나 낮은 작고 소중한 부하라는 겁니다. 연두부에 콩국물까지 추가하는 정성을 들일 때는 언제고 또 갈구십니까? 기왕 갈굴 거면 비싼 제 몸값을 생각해서 좀 더 섬세하고 고차원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뭐 그런…….”
상대의 손이 다가오더니 한창 불만을 토하던 입을 꽉 쥐었다. 윤조는 오리처럼 주둥이를 쭉 빼진 채로 눈만 껌뻑였다.
“너, 앞으로 내 반경 5m 내에서 허락 없이 말하기 금지.”
“으우우으응. 웁웁. 우우으음.”
5m라면 집 안에 있을 땐 무조건 허락을 맡으란 얘기 아닌가.
이건 헌법이 보장하는 인권인 의사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하는, 말도 안 되는 명령이었다. 윤조는 제 주둥이를 꽉 잡은 손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도리어 제 입만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상대를 향해 눈을 부릅뜨고 한껏 웅얼거렸다. 말을 못 하면 웅얼거리기라도 하겠다는 의지로.
“대신에 네가 쌀 때 5km 밖으로 퇴거해 주지.”
앗, 그럼 얘기가 다르다.
“웁!”
윤조는 ‘넵!’이라는 대답과 함께 강수혁을 향해 거수를 척 붙였다.
“지금부터 입 다물어.”
대답 대신에 고개를 끄덕이자 강수혁이 입을 놔주었다. 빨갛게 물든 입술을 문질러 푸는 사이 강수혁은 찾던 물건을 발견했는지 몸을 돌렸다. 그러곤 손에 들린 걸 던졌다.
“어?”
물건을 왜 공중에 던져?’
터지는 의문이 입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강수혁과 눈이 마주쳤다. 윤조는 얼른 정색하며 입을 꾹 닫았다.
찌익. 찌익.
날아간 물건이 무엇인지 소리를 듣고 알았다. 박스 테이프였다.
거실과 주방을 잇는 통로쯤에 자리한 식탁은 분명 아까 망나니 손에 반으로 갈라졌다. 쪼개진 식탁은 공중에 둥둥 뜬 채로 저절로 맞춰졌다.
반사적으로 강수혁을 봤다. 그의 홍채에 오팔색 이채가 살짝 비쳤다.
공중에 뜬 초록색 공구 테이프 두 롤이 저절로 반으로 갈라진 테이블 주변을 맴돌았다. 자동화 공장의 포장 시스템 같았다.
임시 수리가 끝나자 식탁은 저절로 제자리를 찾아갔다. 중앙에 둘둘 말린 초록색 줄이 꼭 원래 그런 디자인 같았다.
‘청테이프로 이렇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윤조는 내심 감탄하며 강수혁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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