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2층 빈방을 찾았다. 다행히 침대를 비롯한 기본적인 가구는 있었다.
윤조는 붙박이장에 상자를 통째로 집어넣고 문을 닫았다. 그러곤 넓은 침대에 벌러덩 누웠다.
아까부터 언짢음이 영 가시질 않았다.
“무슨 뒷북을 치고 있어. 자기랑 얽히는 게 싫지 않냐니, 그런 질문은 살해하려 들거나, 강제로 성폭행하기 전에 하셨어야죠, 강수혁 소령님.”
천장을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일일이 화를 내는 것도 성가셨다. 가라앉은 기분은 한숨 자고 나면 기분이 훨씬 나아질 거다.
항상 그랬다. 아무리 절망스럽고 열이 받아도 윤조는 잤다. 죽고 싶고 미칠 것 같을 때도 깊은 잠을 자고 나면 개운해진다. 가이드가 되면서 재생 및 수면에 습관이 들어서 그런 건지 뭔지. 어쨌든 김윤조가 가진 여러 가지 능력 중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도움이 되는 슈퍼 파워였다.
꾸물거리면서 침대 속으로 기어서 들어갔다. 눈을 감으려다가 번쩍 떴다. 이불에선 오래 묵힌 곰팡내가 났다. 뒤늦게 살펴보니 이불 상태가 썩 좋지 않았다. 이대로 자다간 피부 발진이 일어난다. 윤조는 덮었던 이불을 확 걷어내면서 일어났다.
아까 내피는 물로 헹궈서 널어놨다. 축축하게 젖은 걸 입고 잘 순 없다. 헌병대가 가져온 상자 안에 알레르기 방지 가공을 한 실내복이 있다. 그걸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윤조는 문득 깨달았다.
“안 가렵네.”
정말 이상했다. 속옷도 없이 강수혁의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있는데 조금도 가렵지 않았다. 인간의 각질에 민감하게 반응하기에 남의 옷 따위는 아예 입을 수가 없다. 아무리 깨끗이 세탁한 옷이라도 이 정도 오래 입고 있으면 보통 가려워진다.
심 박사가 내피 대신에 괜히 신생아용 거즈로 만든 트레이닝복을 준비한 게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젯밤에도 강수혁이 입었던 티셔츠를 장시간 동안 입고 있었다. 상체 어디에도 발진의 흔적은 없었다. 오전 샤워할 때도, 그리고 좀 전에 샤워할 때도 몸은 깨끗했다.
“허. 신기한데. 망나니 옷은 발진이 안 나.”
이불에 닿은 팔다리만 슬슬 가렵기 시작했다. 오래 접촉한 것이 아니기에 금방 가라앉을 정도였다. 하지만 강수혁의 옷으로 가린 부분은 역시 이상 없이 상쾌했다. 심 박사와 의논을 해 봐야 할 일이었다.
강수혁이 입은 옷만 발진이 안 난다니. 다른 의미로 온몸이 간지러웠다. 뇌파 동조의 부작용이 성적 충동뿐만이 아닌 건 분명했다. 고가의 내피를 대체할 것을 찾았지만 그게 강수혁의 옷이라는 점이 못내 찜찜했다.
“그래도 서너 벌 훔쳐 놔야겠다.”
혹시나 모를 때를 대비하여 말이었다. 기왕이면 긴 팔 셔츠와 긴 바지로. 그래야 이불에 닿는 부분을 최소화할 수 있다.
“잠깐. 시트를 훔치면 되잖아?”
집 안이 깔끔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분명히 이불도 여분이 있을 거다. 옷방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하고 막 방문 고리에 손을 댈 때였다.
예고도 없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그 바람에 이마를 방문에 찧었다.
“앗!”
덩달아 문 모서리에 내민 쪽 발도 까였다.
윤조는 반사적으로 물러서며 절뚝였다.
“엄청 아프네. 아 씨.”
발톱이 멍들 것 같았다.
“그러게 누가 문 앞에 있으래?”
“뭐요?”
남의 방문을 멋대로 연 장본인이 윤조를 탓하고 나섰다. 심지어 그는 문 앞을 가로막는 윤조를 밀치고 들어왔다.
“노크할 줄 몰라요? 그리고 누가 제 방에 들어오라고 했어요?”
“내 집이야.”
밑도 끝도 없이 치사하게 나오네. 개새끼가. 어느 시절 사상이야.
“이젠 ‘우리’ 집이고요. 엄밀하게 말해 부대 부속 건물로 정부 소유입니다.”
“어쩌라고? 그럼 정부한테 항의하든가.”
막무가내로 남의 방에 들어온 침입자는 침대를 보더니 갑자기 손을 휘둘렀다. 묵은 냄새 가득한 이불과 시트가 갑자기 휘리릭 말렸다. 매트리스까지 둥둥 떠오르더니 문밖으로 날아갔다.
“그건 왜 가져가십니까? 저 바닥에 자라고요?”
“…….”
침대를 붙잡으려고 방 밖으로 막 몸을 던질 때였다. 흰 물체가 윤조의 안면으로 불쑥 들어왔다.
“억! 깜짝이야!”
균형을 잃고 뒤로 나자빠졌다. 바닥과의 강렬한 충돌을 예상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윤조는 어정쩡한 상태로 바닥 위를 부유했다. 강수혁이었다.
“방해돼. 비켜.”
인상을 구긴 강수혁은 윤조를 문에서 먼 방구석으로 이동시켰다. 그러곤 휑한 침대 프레임에 흰 물체를 깔았다.
그건 다른 매트리스였다. 뒤이어 흰색에 톡톡한 이불 세트도 날아들었다.
“어?”
“남의 이불 훔치지 말고 필요한 건 그냥 말해. 집기는 넉넉하게 있어. 모자라면 마트에서 가져오면 되고.”
“제 말이 들렸습니까?”
“한집에 있는데 어떻게 안 들려.”
누가 보면 집 안에 벽이 없고 문이 없는 줄 알겠다.
“보통 사람은 못 들어요.”
“나도 보통 사람이 아니라 미친 개망나니 아니었어?”
강수혁은 대수롭지 않은 듯이 윤조가 한 욕을 언급했다.
그에 윤조는 얼른 제 말을 제대로 되짚었다. 다행이게도 망나니 말고는 더한 욕은 안 했다. 아니 들켰으니 다행이라고도 할 수 없나? 거기다가 쌍 중지는 날렸는데. 설마 그것까지 봤을까.
“그, 미친 개망나니라고는 안 했는데요. 망나니라고만 했지.”
대답하면서도 윤조는 우물쭈물 눈치를 보았다.
“그게 그거지.”
퉁명스럽기 짝이 없는 태도와 달리 강수혁은 침대만 갈았을 뿐 별다른 짓을 하지 않았다.
변했다고 우기더니. 여러모로 새롭긴 하다.
잠깐! 윤조는 문득 소름 끼치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조용한 혼잣말이 다 들렸다면? 샤워 소리도 생생하게 들릴 거고…… 화장실에서 싸는 소리도 다 들릴 거 아냐?
“어억! 그럼 저 샤워하는 소리도 다 들린 거네요? 샤워 하기 전에 그!”
“시원하게 싸더라.”
얼어붙은 윤조를 향해 수혁이 결정타를 날렸다.
“으아아아악! 시발!”
윤조는 양손으로 귀를 막으면서 발을 마구 굴렀다. 수치스럽고 부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시발!
“차라리 대답하지 말지 그랬어요! 왜 알려 주고 그래요!”
“뭐? 저건 이래도 지랄, 저래도 지랄.”
수혁이 신경질을 부렸다.
아무리 그래도 생리 현상까지 공유하고 싶진 않다. 앞으로 연구실에 들렀을 때나, 강수혁이 외출했을 때만 싸야겠다.
심호흡을 반복하며 끓어오르는 창피함을 어느 정도 밀어냈다. 그래도 얼굴엔 여전히 열감이 남아 있었다. 윤조는 수혁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괜히 새로 깐 이불만 노려봤다.
남의 싸는 소리도 몰래 듣는 변태 놈과 이불을 공유하다니. 저거 그냥 가져가라고 하고 발진이 나도록 두는 편이 낫지 않을까. 윤조는 사뭇 진지하게 고민했다.
“사생활이 먼지 만큼도 없는 건 알겠습니다.”
“뇌까지 연결한 마당에 사생활은. 내 감정을 일일이 다 들여다보는 주제에.”
“작전 중이 아니면 굳이 안 들여다봅니다. 그런데 소령님은 사생활 사찰을 하잖아요. 그것도 원초적인 수준까지.”
윤조가 발끈했다.
“사생활을 지키고 싶으면 혼잣말하는 버릇을 고쳐. 무슨 정신병자도 아니고 툭하면 혼자 말하고 지랄이야.”
“혼잣말은 한국인의 자연스러운 습관입니다. 양말 찾으면서 노래 안 부르는 사람처럼 그러지 마십시오.”
괜히 찔려서 나라와 민족 핑계를 댔다.
“양말 찾으면서 노래를 왜 불러?”
“야앙말이 어디 있을까아. 이런 거 안 해요?”
국민 가락을 들은 강수혁이 못 볼 꼴을 본 것 마냥 오만상을 찌푸렸다.
“너, 완전 음치구나. 집 안에서 노래 금지.”
“아. 진짜.”
정말로 사사건건 말이 안 통한다.
양말을 찾을 때 노래도 안 부르는 이런 삭막한 새끼와 뭘 하라고요, 장선욱 중장님?
생긴 건 멀쩡하게 생겨서 정신머리 어디 한 군데가 고장이 나도 단단히 났다. 가이드 시스템만 아니었다면 상종도 안 할 새끼였다.
애초에 이런 놈인 줄 알았으면 등짝으로 연구실 바닥을 기는 한이 있더라도 다른 에스퍼로 하겠다고 고집을 피웠을 텐데.
한때 강수혁이 1순위에서 떨어질까 봐서 내심 걱정하던 자신을 패고 싶었다.
그때였다. 침대 정리를 마친 강수혁이 다시 손을 휘둘렀다. 저 멀리서 작은 물체가 윤조를 향해 곧장 날아왔다.
“받아.”
“뭡니까?”
일단 잡고 보니까 두유였다. 냉장고에서 금방 꺼내 온 것처럼 시원했다. 마침 출출하긴 했다. 하지만 강수혁이 이걸 왜 자신에게 주는 걸까.
“이걸 왜?”
“밥 먹기 전 간식.”
군인이 워낙 체력 소모가 심한 직종이다 보니 수시로 간식 먹는 것이 생활화되어 있었다. 아는 사람끼리 간식을 주고받는 건 이상할 것이 없다.
다만 두유를 내민 사람이 강수혁이고, 그가 여태껏 자신을 비롯하여 어떤 누구에게도 살갑게 간식을 챙겨 준 적이 없다는 점만 아니라면.
“마셔.”
“…….”
윤조는 강수혁이 내민 뜻밖의 선물을 향한 의심을 거두지 못했다. 침묵의 함의를 알아챈 강수혁의 입매가 일그러졌다.
“독 안 탔어, 새끼야. 먹기 싫으면 이리 내. 갖다 버리게.”
“아깝게 왜 버립니까. 이리 주세요.”
도로 가져갈까 봐서 윤조는 얼른 빨대를 떼서 두유에 폭 꽂았다. 한 모금 빨아들이자 시원하고 고소한 액체가 입 안으로 번졌다. 달아올랐던 얼굴이 점차 식었다.
“앞으로 저 화장실 갈 때는 알아서 5km 밖에서 대기하십시오.”
“네가 무슨 사춘기 남학생이야? 그런 사소한 일로 내외하게? 군인 새끼라 훈련받을 때 다른 사람 싸는 소리도 지겹게 들었을 거면서.”
역시나 순순하게 나올 리가 없다.
“평범한 인간이면 몰라도 저를 상대로 수시로 세우는 소령님 같은 변태와는 그런 거 공유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내외라는 말 쓰지 마십시오. 부부 같아서 소름 끼칩니다.”
“부……!”
부부라는 단어에 강수혁이 입을 다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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