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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25화 (102/256)

25화

양수를 닦는 중에도 김윤조는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호흡과 맥박, 뇌파가 일정하지 않았다면 쪽팔리든 말든 심 박사가 사는 군인 전용 아파트 단지까지 한달음에 달려갔을 거다.

아무리 생각해도 싫다.

강수혁이라는 한 인간이 살아온 방식을 완벽하게 거스르는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 그저 군부에 의해 프로그램되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의식이 없는 중에도 제게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가이드의 존재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불쾌감을 인지하는 즉시 맨손으로 목 근육을 후벼파 숨은 동맥을 끄집어냈을 거다. 혹은 소시지를 터트리듯 꽉 움켜쥐어 뼈까지 모조리 박살 낼 수도 있다. 그러나 수혁의 손바닥에 매끄러운 피부가 닿는 순간 그런 살의는 순식간에 증발했다.

이게 가이드다. 뇌파를 한번 연결한 후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도저히 대적할 수 없는 인공생명체. 가이드의 영향력은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 커지기만 할 뿐. 가이드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쯧.”

제 무력함을 또다시 인지한 수혁은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어 김윤조에게 입혔다. 체격 차가 있다 보니 수혁의 티셔츠는 놈의 엉덩이까지 넉넉하게 내려왔다. 펄럭거리지 않도록 티셔츠 밑단을 잘 모아 감았다. 그리고 양팔로 잠든 상대를 안아 들었다.

품에 안은 몸이 빠르게 식었다. 뜨거운 샤워까진 몰라도 침대 속에 빨리 집어넣는 편이 여러모로 좋을 것 같긴 했다.

“좋긴 뭐가 좋아.”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진저리를 치면서 수혁은 빠르게 이동했다. 연구실을 나오자마자 계단 틈 사이를 교묘하게 이용하여 수직으로 상승했다.

김윤조가 알았다면 실내 계단 비행은 금지라고 잔소리했을 거다. 놈이 의식이 없는 덕분에 고막이 편해서 좋았고 한편으로 너무 조용해서 이상했다. 아무래도 시건방진 잔소리에 익숙해진 듯했다.

수혁의 미간이 완전히 구겨지고 입매가 뒤틀렸다. 싫은데 몸은 착실하게 귀하신 가이드님을 수발들고 있다.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특작부는 엘리트 부대라 구성원 대부분이 직업 군인이다. 따라서 상당한 수준의 연봉과 함께 부대 내에 적당한 수준의 개별 숙소를 제공한다.

김윤조는 가이드가 된 직후 준위라는 매우 애매한 계급으로 진급했다. 그전에는 하사였다. 따라서 당시 하사관 전용 소형 아파트를 배정받았다. 하사관 중에서도 가장 낮은 계급이라 하필 1층 그것도 구석이었다. 준위로 진급한 후에 상층을 요청하면 바로 바꿀 수 있는데 김윤조는 가이드가 된 후로도 같은 집에서 살았다. 자는 놈의 손가락을 이용해서 도어 록을 열었다.

“아.”

멍청하게도. 아까 김윤조의 손바닥을 이용했으면 연구실 메인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었을 거란 생각이 이제야 떠올랐다. 지금이라도 도로 연구실로 돌아갈까 잠시 망설였으나 이내 포기했다. 그러기엔 너무 귀찮다.

현관을 들어서자마자 거실이 보였다. 일단 김윤조를 가까운 거실 소파에 내려놓았다.

“으음.”

여기까지 오는 동안 죽은 듯이 조용하던 놈이 작게 신음했다.

막 손을 떼던 수혁은 저도 모르게 바짝 얼어붙었다.

수혁은 바짝 굳은 채로 움찔거리는 흰 낯짝을 빤히 봤다.

김윤조는 눈을 뜨는 대신 이내 고른 숨을 쉬기 시작했다. 약간 일그러졌던 놈의 미간도 판판하게 펴졌다.

김윤조가 계속 자는 것을 확인한 후에 수혁은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숨을 멈출 만큼 긴장했음을 깨달았다. 짜증이 머리 꼭대기까지 솟구쳤다.

“으음……은 무슨.”

성격 나쁜 새끼가 유달리 약해 보이는 모습이 못마땅한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일일이 반응하는 수혁 자신의 모습이 진심으로 좆같았다.

작은 반응 하나하나에도 이럴 필요가 있을까. 썩을 가이드 시스템.

이렇게까지 가이드에게 연연하는 것이 과연 정상인가? 절대로 아니다. 아니어야 한다. 부작용이 나도 단단히 났다. 이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 다른 놈은 해도 강수혁이 할 짓은 절대로 아니다. 심 박사에게 단단히 따져서 빨리 이 지랄을 끝내도록 해야 한다.

거칠게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자연스럽게 놈의 다리를 짚었다. 소파를 짚을 수도 있는데 그냥 그렇게 되었다. 안 짚고 그냥 일어설 수도 있지만, 뭐 사람이 모든 행동을 일일이 의식하진 않는다. 그냥 그렇게 된 거다.

“살이 왜 이렇게 거칠어?”

인공 양수는 망할 미치광이 과학자가 만들어 낸 최고의 약물이다. 오죽하면 인공 양수 개발 작전 코드명이 ‘엘릭서’였을까. 사람이 만든 가짜 엘릭서라 죽은 자를 부활시키진 못해도 넣어 두면 갈라진 살을 척척 붙이는 효과는 있다.

심 박사는 거기서 더 나아가 엘릭서 공식 중 일부를 이용하여 마법 크림을 출시해 피부 미용 업계를 뒤집어엎을 상상까지 했다. 군 상부에서 기밀 보안을 이유로 일부 상업화를 허락하지 않아서 이를 박박 갈면서 손가락만 빨고 있는 걸로 알고 있는데.

그런 약물에 푹 담갔던 살갗이 거칠다고? 발작 중에 뭔가 잘못된 걸까.

제 느낌이 확실한지 확인하기 위해 수혁은 놈의 다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거친 감촉은 착각이 아니었다. 다행이게도 발진이나 혹은 염증 반응은 아니었다.

닭살이었다. 셔츠만 입은 채로 이동하는 중에 드러났던 살갗 위주로 솜털이 바짝 돋아 있었다. 혹시나 정말로 발진이 있지는 않은지 확인하려고 드러난 팔다리를 비롯해 제 티셔츠로 가린 상체 안쪽, 등까지 꼼꼼히 살폈다.

수혁이 손길이 지나가는 자리마다 솜털이 누그러졌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로 곧추섰다. 손길에 따라 피부 결이 바뀌는 모습이 꼭 카펫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곧고 흰 다리에 돋은 닭살을 열심히 쓸어내렸다. 그러다가 별안간 손을 멈췄다.

“아니, 이게 무슨 짓이야.”

수혁은 제풀에 깜짝 놀랐다. 남의 소파 밑에 쭈그려 앉아 넋을 놓고 남의 다리나 만지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무슨 볼썽사나운 짓인지.

“정신 차리자, 강수혁.”

양손으로 제 얼굴을 두 번 세게 쳤다. 미련 없는 사람처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렇다고 저렇게 두고 갈 수는 없다. 감기에 걸리면 심 박사가 갖은 지랄을 떨 것이다. 패널티를 줄지도. 심 박사는 수혁의 신체적 한계에 대해 빠삭하기에 패널티를 변태처럼 잘 활용했다. 간단히 말해 심 박사가 주는 패널티는 절대로 받고 싶지 않다.

‘침대에 집어넣으면 되겠지.’

방 두 개짜리 소형 아파트라 거실도 작은 편인데 집기라곤 3인용 소파와 작은 스크린 하나뿐이어서 썰렁했다. 거실과 연결된 주방도 무슨 분양 견본 주택처럼 휑했다. 식탁은 갓 들여놓은 듯 휴지 하나 없이 말끔했고, 그 외에 사람이 사는 곳이면 으레 있을 법한 싱크대 위에 가재도구도 머그 하나에 작은 그릇 하나, 고무장갑 한 켤레가 전부였다.

“내 집보다 더하군.”

수혁의 집엔 적어도 덤벨과 수건, 빈 생수병이 돌아다녔다. 디퓨져도 있다. 그러자 뒤늦게 묵은 먼지 냄새가 코에 들어왔다. 생활감이 전혀 없었다.

가까운 방문을 열자 계절 옷에 군장, 기타 운동기구 및 청소기기 따위가 있는 창고가 나왔다. 다른 방이 침실이었다. 침실 또한 거실과 비슷했다. 퀸사이즈 침대만 덜렁 있었다.

“뭐 이래?”

일단 김윤조를 침대로 옮겼다. 덮을 이불이 보이지 않아 침실 붙박이장을 열었다.

가득 차서 넘치려고 하는 습기 제거제에 오래된 군복, 그리고 A4 반 정도 되는 작은 쇼핑백 하나가 다였다.

생긴 건 새침하게 생겨서는 사는 공간은 왜 이렇게 홀아비 냄새가 나는지.

“쯧.”

이불 찾기를 포기하고 대신에 거실 벽 패널을 조작해 난방을 가동했다. 침실을 다시 확인하고 돌아서려는 찰나였다.

“으으.”

낮은 신음이 들렸다. 순간 짜증이 치솟았다. 이쯤 되면 자는 척하면서 일부러 수혁을 조종하고 조롱하는 거다. 거칠게 침실로 들어가서 놈의 멱살부터 잡고 봤다.

“이 새끼…… 어?”

수혁은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것이…… 무슨 짓을 해도 생글생글 웃으면서 사람의 약발부터 올리고 보는 또라이 새끼의 눈가가…… 촉촉했다.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닫힌 눈꺼풀 아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르면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달달 떨리는 입술이 떨어졌다. 그리곤 아주 작게 속삭였다. 수혁이 에스퍼가 아니라면, 그래서 초월적인 청각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제대로 듣지 못했을 만큼 작게.

“미……안…….”

별안간 심장 언저리가 출렁거렸다. 명치에서 서늘하면서도 뜨거운, 이상한 느낌의 덩어리가 사방으로 뻗었다. 두 개는 폐 두 짝을 식혔고 한 개는 위장을 달구었다. 무슨 일인지, 수혁의 재생력이 전혀 힘을 쓰지 못했다. 저릿저릿한 통증이 내장 구석구석 퍼졌다.

수혁에게 멱살이 덜렁 들린 김윤조의 고개는 뒤로 꺾여 있었다. 그 바람에 흐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마른 침대 시트 위로 떨어졌다.

툭.

물방울이 면포를 두드리는 소리가 마치 천둥 같았다. 수혁은 천천히 놈의 몸을 내려놓았다. 여전히 숨을 죽인 채였다.

무슨 꿈을 꾸는지 몰라도 김윤조의 가려진 눈동자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악몽이 분명했다. 깨워야 하나.

“일어나, 김윤조.”

흰 몸을 흔드는 수혁의 기세는 아까보다 훨씬 수그러들었다. 목소리도 낮고, 손길도 거칠지 않았다. 발작하고, 몸을 닦이고, 티셔츠를 입혀서 집으로 데려오고, 다시 멱살을 잡는 동안에도 깨지 않았던 김윤조를 깨우긴 턱없이 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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