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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24화 (101/256)

24화

수혁이 느끼는 성적 끌림은 전혀 자연스럽지 못하다. 그것은 가이드 프로젝트로 인한 결과였다. 흥분하도록 프로그램된 거다. 그게 가이드 프로그램의 본질이었다. 성적 충동에 무릎을 꿇으면서도 끝까지 가이드의 존재를 긍정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김윤조에 대한 집착은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다. 김윤조를 향해 느끼는 성적 충동은 가이드에 대한 성적 충동이다. 그게 무슨 차이가 있겠냐고 묻는 멍청이가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혁은 그 차이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다.

가이드가 김윤조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는 역겨운 가정을 해서 가이드가 박병관이라면?

그래도 성적 충동을 느끼지 않고 집착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 그걸 수혁은 확신하지 못한다. 수혁에게 있어 가이드는 김윤조가 최초였다. 즉, 대조군이 없다.

유럽 연합과 북미 연방에 각각 서너 체의 가이드가 있다. 그쪽 가이드에게 강수혁이 넘어가서 귀중한 자산을 잃을 것을 두려워한 국방부가 접촉을 철저히 막았다.

이 건으로 국방부를 비난할 생각은 없었다. 자신도 가이드를 접촉할 생각도, 그에 넘어갈 생각도 조금도 없었으니. 심나연 그 인간이 가이드를 직접 만들어 내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김윤조가 역겨워 죽겠다는 표정을 하면서도 자신에게 다리를 벌리는 것도 어차피 프로그램의 일환에 불과하다. 사적인 감정을 끼워 넣을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망할 새끼를 보고 있자면 감정이 요동치고 사타구니에 힘이 들어간다.

인조 색소를 잔뜩 먹여 바둑알처럼 새까만 눈동자로 수혁을 멀뚱하게 쳐다볼 때마다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다. 김윤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다. 숨을 겹치고 싶었다. 분명히 달콤할 혀를 빨고 싶다.

하지만 그건 진정한 욕망이 아니었다. 군부에 의해 뇌 수용체가 개조되어 일어나는, 혐오스러운 화학 작용에 불과하다. 이렇게 김윤조의 엉덩이와 젖꼭지를 지키겠다고, 그걸 자기만 누리겠다며 지키고 선 것도 그런 설계의 결과다.

“시발.”

거기까지 생각이 닿는 순간, 수혁은 더는 자리를 지킬 이유를 찾지 못했다. 그러한 욕망 자체가 역겨웠다.

“저 새끼가 누구한테 다리를 벌리든 말든.”

안 보면 된다. 그런 정보를 굳이 능동적으로 수용할 필요가 없다. 안 보고 안 듣고, 무시하면 그만이다. 저 새끼도 생각이란 게 있으면 굳이 수혁에게 다른 에스퍼와의 관계 따위를 일일이 떠벌리진 않을 거다.

드디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발치에 걸리는 종이가방을 툭 차버리고 돌아설 때였다.

-삐삐삐.

인큐베이터가 짧은 신호를 발산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리자 어느새 인큐베이터 안에 조명이 들어왔다.

일어났나? 설마 자리를 뜨는 걸 감지하고 심 박사 명령을 따르라고 할 셈은 아닐 거다.

“데려다주기는 개뿔. 시커먼 사내새끼인데. 알아서 가겠지.”

시커멓다는 표현의 어폐도, 또 제2의 박병관에 대한 우려도 깡그리 무시했다.

알아서 옷 입고 알아서 숙소로 꺼지라고 하려는 찰나, 돌아누운 김윤조의 등이 잘게 떨렸다.

“양수 잘못 마시고 체했어? 왜 떨어?”

-삐삐삐.

인큐베이터 패널에 뜬 빨간 경고 마크가 점멸했다. 뭔가 이상이 생겼다는 신호였다.

즉시 인큐베이터로 향한 수혁은 패널부터 확인했다. 뭐가 뭔지 몰라도 김윤조의 뇌파 상태가 불안정하게 움직였다. 그 때문에 경고등이 뜬 것 같았다.

“야, 김윤조! 뭐야? 왜 이래?”

수혁은 윤조를 불렀다. 조명이 들어와서 깬 줄 알았다. 하지만 김윤조는 여전히 돌아누운 채였다. 반대편으로 돌아가서 놈의 안색을 살폈다. 이게 혹시라도 자신을 놀리려고 저지른 장난이면 반쯤 죽여 놓을 생각으로.

하지만 예상과 달리 김윤조는 여전히 수면 중이었다. 아까와 달리 평온한 표정이 아닌,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상체가 앞으로 굽으면서 잘게 경련했다. 다리도 접어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웅크리는 모습이 꼭 태아 같았다.

“야, 김윤조! 내 말 안 들려?”

충분히 들을 수 있는 목소리인데도 상대는 반응이 없었다. 깬 것이 아니라 뇌파 이상으로 인큐베이터가 자동 경고를 띄운 모양이었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도 심 박사에게 연락하기 전에 일단 김윤조부터 깨워야 했다.

퉁퉁.

유리 덮개를 두들길 때마다 안에 든 양수가 출렁였다. 덩달아 김윤조의 몸이 휘청거렸다. 그런데도 놈은 깰 줄을 몰랐다.

“이거 깨져도 내 책임 아니야.”

연구실 방범 카메라를 향해 확실하게 외친 다음 강수혁은 오른손 주먹으로 인큐베이터 잠금 부분을 세게 쳤다.

쾅!

그러자 높은 신호가 삐익― 울리더니 이내 인공 양수가 빠지기 시작했다. 패널을 살피니 장치 이상으로 긴급 정지를 시도한다는 경고가 떴다. 양수가 어느 정도 빠진 후 유리 덮개가 가스 빠지는 소리와 함께 열렸다. 그 사이로 덜 빠진 인공 양수가 쏟아져 내렸다.

원래는 자동으로 위까지 올라가는 덮개를, 수혁은 강제로 밀어 올렸다. 그러곤 양수에 젖어 떨고 있는 김윤조를 깨웠다. 한쪽 팔로 상체를 들어 안고 다른 손으로 창백한 뺨을 아주 살살 때렸다. 검지로 톡톡 치는 수준인데도 김윤조의 고개가 픽픽 돌아갔다.

“야, 김윤조!”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러자 김윤조가 별안간 발작하더니 양수를 토했다. 형광 액체를 두 모금 정도 토한 뒤에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안은 쪽 팔을 마구 떨었다. 덩달아 안긴 몸이 크게 흔들렸다.

“정신 차려!”

“으…….”

정신이 들었는지 놈이 낮게 신음했다. 수혁은 다급히 고개를 숙여 놈을 자세히 살폈다.

“김윤조.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하으.”

창백한 입술 사이로 힘겨운 한숨이 샜다. 툭툭 떨어지는 상대의 고개를 뒤로 젖힌 수혁은 재차 흰 뺨을 톡톡 건드렸다. 인공 양수에 젖은 미간이 한번 꿈틀거리더니 형광 액체를 방울방울 달고 있는 속눈썹이 살짝 떨렸다. 뒤이어 눈꺼풀이 약간 올라갔다.

먹물색 홍채 안에 자리 잡은 새까만 동공이 한껏 풀려 있었다. 수혁은 다른 쪽 손을 들어 빛이 들어가지 않도록 가렸다. 그러자 풀린 동공이 오므라들었다. 초점이 수혁의 얼굴에 모였다.

“강…수혁…….”

“정신 들었네. 너 수족관에서 자다가 발작했어.”

수혁을 알아보고서도 김윤조는 아직 의식이 흐린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입만 뻐끔거리다가 다시 축 늘어졌다. 멍하게 이쪽을 살피던 눈도 가라앉은 눈꺼풀 사이로 사라졌다. 순간 뒤진 줄 알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야! 김윤조!”

수혁은 저도 모르게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때였다.

삐이― 삐삐.

날카로운 신호음이 이어지더니 이내 붉은색 경고등이 해제되었다. 초록색 표시가 떴다. 덜덜 떨리는 수혁의 팔에 안긴 김윤조의 호흡 또한 일정했다. 인큐베이터 패널에 뜬 뇌파를 비롯한 바이털 사인의 곡선도 정상치를 가리켰다.

터질 듯이 부풀었던 심장부가 일시에 푹 꺼졌다. 급격한 혈관 수축과 확장 덕분에 잠시 눈앞이 다 아찔했다.

“시…발. 가지가지 해라, 빌어먹을 새끼.”

하여간 가이드 새끼 평생 도움이 안 된다. 욕설을 뱉은 수혁은 놈을 인큐베이터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고작 오 분 사이에 전신이 딱딱하게 굳었다. 목을 이쪽저쪽 꺾자 뚜둑 소리가 났다.

당장 위기는 모면했으나 저 망할 연두부 놈에게 문제가 생겼다. 일단 심 박사에게 연락을 취해야 했다.

연구실 어디에서도 통신 장비로 추정되는 걸 찾을 수 없었다. 관리 컴퓨터에는 연락 수단이 있을 거다. 메인 컨트롤 패널 화면에 손바닥을 인식시켰다. 지문을 읽은 컴퓨터는 승인되지 않은 개인이라며 접속을 거부했다. 미간에 깊은 주름이 파였다.

개인 통신 장비를 휴대할 것을. 평소엔 연락받기가 귀찮아 숙소에 처박아 두는 개인 통신기가 아쉬웠다.

작전 통제실이 마침 연구실에서 가까웠다. 항상 거기 처박혀 있는 최정 대령에게 상황을 알리면 심 박사에게 즉시 연락을 취할 수 있다. 막 연구실을 나가려다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심 박사에게 비상 연락을 하면? 공주처럼 안고 들어온다느니, 왜 잘해 주냐느니. 이제는 애 잘못될까 봐서 헐레벌떡 전화하느냐고 조롱할 그치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

수혁은 오만상을 찌푸렸다. 더 이상의 조롱은 사양이다. 그냥 이대로 나가는 편이 가장 편한 길이다. 연두부 새끼도 제법 멀쩡하니 말이었다.

그러나 수혁은 연구실 한가운데서 어정쩡하게 서서 발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목 아래로 솜털 하나 걸치지 않은 놈이 형광 물질에 젖어서 쓰러져 있는 상황이 못내 마음에 걸렸다.

“젠장.”

팽개친 종이가방에서 옷을 꺼내 들었다. 얇은 거즈 옷을 어떻게 입힐지 잠시 생각하다가 포기했다. 대신에 옷을 구겨서 김윤조 몸에 남은 인공 양수를 닦았다.

원래 수혁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작전 팀원 중에 중상을 입고 쓰러진 자가 있어도 당장 죽을 위기는 아니거나 혹은 인근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그쪽이 알아서 하겠거니 치부했다. 자신은 돌보는 쪽이 아니라 파괴하는 쪽이니까.

작전 중에도 다른 상황은 일절 고려치 않는다. 최전방에서 음속으로 돌격하여 초대형 외계 괴물에게 소형 핵에 버금가는 물리적 타격을 가하면 된다. 파괴된 괴물의 파편으로 인한 추가적 피해는 다른 에스퍼나 에스퍼를 보조하는 특수부대의 몫이다.

그러니까 비리비리한 몸을 조심스럽게 추슬러 안는 짓 따위는 하지 않을 거란 얘기다. 상대가 김윤조만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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