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화
후보는 심 박사가 주도적으로 선정한다고 했다. 그치의 평소 취향으로 미루어 보건대 후보가 될 만한 조건은 다음과 같다. 낯짝 반반하고 행동거지가 제법 그럴싸한 상급 에스퍼. 물론 두루두루 동정심도 자극하는.
‘임성준? 아니면 장세인?’
수혁은 에스퍼 둘을 떠올렸다.
‘임성준은 얌전해서 후보가 될 이유가 없고 역시 정세인 쪽이 가능성이 있어.’
정세인은 텔레파시와 파동 생성 능력으로 S에 랭크 되었다.
원래는 유순한 편이었는데 어느 순간 냉랭해지더니 수혁만큼은 아니라도 제법 삐딱선을 탔다. S급 텔레파시 능력자는 소수이기 때문에 자산 가치가 매우 높다. 얼굴도 제법 반반하고 무엇보다 폭력 성향이 적다. 거기다가 여자다. 수혁이 김윤조라도 구멍을 쑤시겠다고 달려드는 남자보다는 저쪽을 택할 거다.
‘미리 제거할까.’
정세인과는 많은 작전을 함께했지만 끈끈한 동료애 따위는 없다. 오히려 서로 소가 지붕 위의 닭을 보는 정도로 서먹했다. 수혁은 세인의 텔레파시 능력이 껄끄러웠고, 세인은 아무래도 수혁의 파괴적인 능력이 못마땅해했다. 휘말려서 죽을 뻔한 적이 제법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정세인을 죽이지 못할 개인적인 이유는 현재로선 없다.
그렇다고 선뜻 제거하기도 조금 난감한 편이긴 했다.
여태껏 수혁이 일으킨 많은 사건 사고로 인해 다양한 인명 피해가 났으나 그 안에 상급 에스퍼는 없었다. 그들은 수혁의 능력 범위 안에서 벗어나거나 본인을 지킬 힘이 있었다. 제거가 쉽지 않을 터. 특히 살의를 금방 감지하는 텔레파시 능력자는 더욱.
또 정세인의 자산 가치를 따질 때 제거했을 경우 군 상부는 전에 없이 격노할 거다. 다른 에스퍼라면 당장 처분하겠지만, 아쉽게도 군부는 수혁을 죽이진 못한다. 죽이지 못해서 가이드까지 만들어 냈으니까.
대신 패널티를 부과할 거다. 예상대로라면 격리실에서 한 일주일 정도 괴성을 지르면서 뒹굴게 하겠지. 김윤조의 몸을 박살 냈을 때도 그랬다.
문제는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과연 후보가 정세인만 있을까. 다른 후보가 계속 발탁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다. 후보가 밝혀지는 즉시 계속 죽일 수도 있다. 일주일 패널티 파티를 거듭 반복한다면 견딜 수 있을까. 미치진 않을까. 죽는 것보다 미치는 편이 더 끔찍하다.
또한 에스퍼를 무의미하게 소모하는 걸 군부가 좌시하지 않을 거다. 강수혁이 아주 귀중한 자산이라도 모든 에스퍼의 생명과 비견한다면 저울추는 저쪽으로 기운다. 에스퍼를 죽이면 죽일수록 패널티 기간이 점점 길어져서 종국에는 폐인이 되거나, 아예 폐기 수순을 밟을 가능성이 있다.
수혁은 손을 들어 제 목덜미를 문질렀다.
목뼈를 따라 살짝 솟아오른 살점이 만져졌다. 붉은 흉터는 목과 머리카락 경계에서 두 갈래로 나뉘고 각각 귀에 못 미치는 뒷머리에서 끝이 난다. 흉터 안에선 일정한 간격으로 전기 스파크가 발생한다. 살이 지져지면 재생력이 즉시 복구한다. 무수히 반복하는 사이 붉게 살이 부풀어 올랐다.
이것은 군부가 강수혁에게 보내는 강력한 경고 메시지다. 늘 활성화된 폭발 장치를 잊지 말라는 경고.
에스퍼는 매년 수천 명이 태어난다. 게다가 수는 점점 늘고 있다.
그중에서 ‘랭크’를 부여받고 군부에 반강제로 소속될 만큼 강한 전투형은 소수다. 하지만 죽어가는 에스퍼를 충분히 대체하고도 남을 정도는 된다. 그리고 수혁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한 에스퍼가 또 태어날 수도 있다. 강력한 에스퍼가 손에 들어온다면 군부는 즉시 수혁을 대체할 거다.
자신을 폐기하면서 김윤조도 과연 같이 폐기할 것인가.
그렇다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말이다. 하지만 여태껏 군 상부가 보인 태도로 보건대 그럴 가능성은 희박했다. 가이드만 있으면 어떤 에스퍼든 편리하게 부릴 수 있으니까. 귀중한 프로토타입을 함부로 폐기할 리 없다. 도리어 기다렸다는 듯이 후보 에스퍼를 붙일 거다.
‘그걸 김윤조는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 테고.’
그 지점이 못마땅했다.
‘시발, 믿음이 오가는 파트너는 무슨 얼어 죽을. 그냥 가이드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다리 벌리는 것뿐이면서.’
순간 부아가 치밀었다.
가이드 김윤조의 존재가 처음 공개되었을 때 그러니까 수혁이 박살을 낸 몸을 전부 재생한 직후. 김윤조를 보는 에스퍼들의 시선은 아주 가관이었다. 꿀이 질질 흐르는 페로몬 덩어리를 영접한 멍청한 얼굴들.
그걸 또 김윤조 저 새끼는 즐기는 듯이 은은한 미소로 대했다. 그러다가 수혁과 눈이 마주쳤을 때는 미소가 싹 사라졌다. 대신 냉랭한 조소에 적개심이 함께였다. 그걸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열이 받았다.
물론 반항하지 못할 정도로 약한 상태에서 선제공격을 감행한 것에 대한 불만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를 부과하지 않았나.
일주일. 장장 168시간 동안 불타는 고통을 생생하게 겪었다. 안타깝게도 만능에 가까운 에스퍼 강수혁이 할 수 없는 소수의 일 중에 자살이 포함되어 있었다.
머리는 때려 부수면 가능성이 있을 수도 있지만 차마 시도는 못 했다.
재생력 A급 이상인 에스퍼 중 일부에게서 두부가 완전히 박살이 났을 때, 약간 남은 뇌세포가 증식해 재생하는 경우가 종종 보고되었다.
뇌 재생의 후유증으로 그들은 대부분 기억이 사라졌다. 뇌 재생률이 40%를 넘어가면 기억이 신생아 수준으로 리셋되어 똥오줌을 가리지 못하기도 한다. 집중 학습으로 금방 개선되긴 하지만, 기저귀는 백 퍼센트 당첨이다.
아직 두부 완파까지는 당해 본 일이 없어서 뇌의 재생 여부는 확신할 수 없지만, 다수 전문가는 강수혁 또한 뇌세포 재생이 가능할 거라고 했다. 하지만 기저귀행은 죽어도 사양이다.
그런 이유로 자살을 시도하지 못하고 일주일간의 패널티를 고스란히 견뎌야 했다. 그러면 서로 공평하게 한 대씩 주고받은 거 아닌가?
솔직히 손해는 수혁이 더 봤다. 이쪽과 달리 김윤조는 즉시 마취되었을 테니까.
이후로 서너 차례 뼈도 부러뜨린 적이 있는데 고의는 아니었다. 그냥 힘 조절이 좀 어려웠을 뿐이다.
수혁은 일반인과는 대면하지 않는다. 주변에 있는 건 에스퍼 새끼들뿐이다. 수혁의 힘을 뻔히 알면서 괜히 얼쩡거리다가 휘말려 뒤지는 건 그쪽 에스퍼의 소관. 그렇기에 팔뚝을 잡거나 다리를 걸었을 뿐인데 피하지 못하고 그대로 걸려서 뼈가 뚝 부러지는 새끼는 수혁도 처음이었다.
덜렁거리는 팔뚝을 들어 올리며 눈을 휘둥그레 뜨는 놈을 처음 봤을 때 수혁이 느낀 당혹감이란. 다른 놈이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패널티가 싫어서 다치는 즉시 군의관이나 심 박사에게 연락을 취하는 친절도 발휘했다. 직접 연구실로 옮길 수도 있으나 그랬다가 다중 골절이 될 것 같아 삼갔다.
하지만 망할 연두부 새끼가 고의가 아니었음을 믿질 않는다. 다른 에스퍼는 이런 적이 없다나?
‘내가 다른 지질한 에스퍼 새끼와 같냐고.’
하여간 이후로도 연두부 새끼를 대할 때는 최대한 힘 조절을 했다. 하도 힘을 빼는 바람에 몸이 굳을 정도였다. 그러나 김윤조의 적개심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뒤끝 더럽게 긴 게 누구랑 아주 똑같아.’
수혁은 심 박사를 떠올리며 얼굴을 구겼다. 가이드로 개조하면서 심 박사 본인 세포를 샘플로 쓴 거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생각에 잠기다 보니 어느새 30분이 지났다. 평소엔 따박따박 말이 많은 새끼가 유달리 조용했다. 수혁은 인큐베이터를 흘끔 살폈다.
“야, 자냐?”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이번에는 똑바로 인큐베이터 유리 덮개를 보았다.
돌아누운 놈의 미끈한 등짝과 여전히 통통한 엉덩이가 고스란히 보였다. 미동이 없이 조용한 것으로 보아 잠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자는 척하는 걸 수도 있다.
“김윤조.”
이름을 불러도 반응이 없었다. 일어서서 인큐베이터 반대편으로 향했다.
놈의 얼굴과 반듯한 어깨가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마침 늘어진 팔이 젖꼭지를 가렸다. 팔꿈치 아래로 사납지 않은 곡선을 가진 허리와 엉덩이와 더불어 가지런히 포개진 다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다리 사이에 얌전히 붙은 적당한 크기의 성기도.
“아니 무슨 생각으로 가랑이 털을 다 밀어 놓은 건지.”
누구 아이디어인지 궁금했다. 김윤조 본인인지 혹은 심 박사 그 인간인지.
가이드 프로젝트 과정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체모를 전부 밀었을 수는 있다. 그렇다면 머리도 없어야 한다. 머리카락은 길렀으면서 겨드랑이와 가랑이는 왜 민둥산인지. 선택적 발모에도 합당한 이유가 따로 있을까?
있다면 다름 아닌 에스퍼 농락일 거다. 이런 식으로 자극하여 가이드를 향한 성적 흥분을 유도하는.
수혁은 대번에 고개를 돌렸다. 원래 자리로 돌아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눈살을 찌푸리면 자꾸 저쪽으로 돌아가려는 고개를 억지로 멈췄다. 안 보고 있어도 머리가 방금 본 민둥한 가랑이를 자꾸 그려 댔다.
“시발.”
손으로 머리를 벅벅 문질렀다. 손이 지우개가 되어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편리할까.
이미 욕망을 이기지 못해 여러 차례 선을 넘었다. 이제는 능력을 사용한 후에는 자연히 김윤조와 잔다. 어떨 때는 작전 전에 인근에서 잘 수 있는 곳을 미리 파악해 두기도 한다. 김윤조와의 섹스를 기대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마다 불쾌감은 더욱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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