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윤조는 인큐베이터 유리 덮개를 퉁퉁 두드렸다. 그러자 강수혁이 이쪽을 봤다.
-이제 가셔도 됩니다.
유리 덮개 위에 윤조의 말이 떴다. 강수혁은 잠시 눈길을 찌푸리더니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됐어. 저 아줌마 보기보다 뒤끝이 굉장히 길고 지저분해. 마음에 안 드는 말 한마디 좀 했다고 인간 리모컨을 만들지 않나.”
-예?
방금 뭘 들은 거지? 강수혁이 무슨 말을 했는데 그걸 들은 심 박사가 가이드를 만들었다고? 그런 얘기는 처음이었다. 윤조는 고개를 유리 덮개 쪽에 바싹 붙였다. 그러자 강수혁이 눈살을 찌푸렸다.
“불어터진 생선 같으니까 얼굴 저쪽으로 치워.”
-소령님이 뭐라고 하셨는데 박사님이 가이드 프로젝트를 실행한 겁니까? 혹시 지구를 멸망시키겠다 혹은 인간을 멸종시키겠다, 뭐 그러셨습니까?
“뭐래, 이 미친놈이. 지구를 왜 멸망시켜? 그리고 인간이 멸종시킨다고 멸종될 종자냐? 너 같은 거까지 만들어 내는 꼴을 보면 바퀴벌레보다 오래 살 거다.”
미친개한테 미친놈으로 취급당하다니. 자괴감이 살짝 들었다.
-그럼 뭐라고 하셨는데요?
“알 거 없어.”
코웃음이 되돌아왔다.
-와, 진짜 파트너끼리 이러기 있습니까? 차암 믿음이 오가는 사이입니다.
“파트너는 무슨. 넌 그냥 리모컨이야. 그것도 고장 난 리모컨.”
강수혁이 유리 덮개를 통통 치면서 비웃었다. 대답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네네. 젖꼭지가 달린 리모컨이죠.
“야이 씨! 안 봤어, 이 새끼야!”
약점이 찔린 강수혁이 발끈했다.
“그깟 희멀겋고 납작한 가슴에 붙은 불어 터진 콩알 같은 걸 누가 좋아한다고!”
-좋아한다고 한 적 없습니다만? 그리고 남자 젖꼭지는 원래 콩알 사이즈입니다.
혼자 급발진하는 등신을 상대로 윤조는 무구한 표정을 지었다. 가증스럽게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기까지 했다.
이 화제를 꺼내는 순간부터 이길 도리가 없음을 뒤늦게 깨달은 건지, 강수혁은 이내 못마땅한 눈초리와 함께 고개를 홱 돌렸다.
“하여간 안 봤어.”
-예에에, 안 본 것으로 쳐 드리겠습니다.
끝까지 조롱으로 되받아친 윤조는 속으로 툴툴댄 윤조는 옆으로 돌아누웠다. 인큐베이터 안에서는 정자세로 누워야 하지만 어쩐지 그러고 싶었다. 미친개를 조금이라도 외면할 방법이 이것뿐이었다.
‘가라니까 왜 안 가고 그래. 짜증 나게.’
아까 심 박사는 강수혁을 여전히 개망나니 취급하면서도 윤조에게 왜 갑자기 잘해 주느냐고 물었다. 물론 속사정을 모르는 사람이 보면 갑자기 개과천선한 것처럼 보이겠지만,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강수혁을 보고 겪은 윤조의 생각은 전혀 달랐다.
‘괴롭히는 방법도 가지가지야, 진짜. 총체적으로 변태적인 새끼.’
일부러 윤조 앞에서 얼쩡대면서 속을 벅벅 긁어 놓으려고 저러는 것이 분명했다. 둘은 면상만 봐도 변비가 걸리고 두드러기가 올라오며 먹었던 것이 다시 세상 밖으로 튀어나오려고 하는, 그런 관계니까.
돌아누워도 등 쪽이 괜히 의식되었다. 인큐베이터 안을 밝히는 간접 조명을 껐다. 침대를 가리는 암막 커튼을 두르는 효과를 냈다. 그래도 뭔가 기분이 언짢고 불안했다. 차라리 잠이 들면 좋으련만.
재활 핑계로 연구실을 나가기 직전까지 75시간 동안 내내 수면한 덕에 잠이 올 리가 만무했다.
‘하는 수 없지.’
윤조는 AI에 명령하여 수면 유도제를 인공 양수에 섞었다.
심 박사의 확인 및 승인 없이 임의로 사용할 수 있는 약물의 종류와 약은 제한되어 있다. 하지만 수면제도 아니고 유도제 사용 여부는 윤조 스스로 판단 가능했다. 소량이라도 인공 양수를 통해 직접 침투시키기 때문에 약효는 확실했다.
의식이 금방 가물거렸다. 윤조는 곧 깊은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04. 트리플 S
커다란 원형 물탱크 같은 인큐베이터를 밝히던 은은한 조명이 나갔다.
수혁은 곁눈질로 유리벽 안을 살폈다. 기분 나쁜 형광 물질에 담긴 인체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수혁에게 투시력은 없다. 대신에 눈이 원래 좋았다. 매우. 독수리와 같은 시력에 야행성 고양잇과 맹수 같은 동체 시력도 추가였다. 연구실 있는 기기들이 내뿜는 수십 개의 작은 조명 덕분에 연구실 안은 대낮이나 마찬가지였다. 인큐베이터도 예외는 아니었다. 형광 물질 덕분에 살짝 뿌옇긴 해도, 김윤조 전신을 또렷하게 분간할 수 있었다. 특히 이쪽으로 불쑥 내민 희고 통통한 엉덩이를.
‘왜 돌아누워. 정신 사납게.’
자꾸 눈길이 그쪽으로 갔다. 고개까지 돌리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억지로 시선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저게 어떻게 남자 새끼 엉덩이야. 꼭 연두부같이 생겨서는.’
연두부는 연두부인데 누르면 바로 뭉그러지는 기분 나쁜 촉감은 아니었다. 말랑하면서도 탱탱해서 꼭 단단한 젤리나 떡 같았다. 그렇다고 해서 미끈거리지도 끈끈하지도 않다. 따뜻하고 부드럽다.
원래 저렇게 생겨 먹은 건 아닐 거다. 가이드가 되면서 전신을 갈아치운 덕분에 저런 아기 같은 몸이 되었다.
산 사람의 몸을 갈아치우다니. 그걸 계획한 심 박사도 미친 작자고, 그걸 하겠다고 자원한 저 새끼도 보통 돈 놈이 아니었다.
자신보다는 훨씬 작아도 180cm에 가까운 키에 균형 잡힌 몸매, 마른 근육이 붙은, 몸뚱이 생긴 모양은 어딜 봐도 성인 남자인데 그 외의 모든 것이 그에 맞지 않았다.
목소리와 태도는 성인 남자다. 그런데 피부는 아기 같고 보들보들한 머리카락에 동안은 소년 같다.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 살은 꼭 여자 같기도 하다.
분명 눈과 귀는 남자라고 인지하는데 촉감과 후각이 남자가 아닌 것으로 인식한다. 거기서 발생하는 기묘한 차이가 수혁을 자꾸 자극했다. 자극은 금방 성욕으로 바뀌곤 했다. 그럴 때마다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다.
“시발.”
욕설이 튀어나왔다. 정말 시발 같은 상황이었다.
단둘만 남은 공간, 손닿을 거리에 있는 김윤조, 하필이면 벌거벗은 채 엉덩이까지 이쪽으로 내밀고 있다. 인큐베이터 덮개 따위 그저 손짓 한 번이면 박살 낼 수 있다. 저 야한 몸을 열고 들어가고자 한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패널티가 있다곤 해도 저 새끼 몸에 직접적인 상해만 입히지 않으면 된다. 잘 때는 일부러 때리지 않는 이상 거의 발동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마음대로 해도 무방하다.
“시발.”
욕이 또 나왔다. 이번에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쿵.
무의식적으로 디딘 발에 힘을 주고 말았다. 덕분에 연구실 바닥 마감재에 금이 갔다.
“아, 시발.”
욕설이 탄식처럼 샜다. 발을 들자 군화 밑창에 박힌 파편이 우수수 떨어졌다.
“이모가 또 화내겠는데.”
발을 털던 수혁은 순간 얼굴을 확 일그러뜨렸다.
“미친 인간한테 이모는 무슨. 시발. 진짜 이모도 아닌데.”
괜히 부아가 치민 나머지 수혁은 일부러 멀쩡한 바닥재도 짓밟아 부쉈다. 서너 장 연달아 밟아 부수자 기분이 나아지긴커녕 너무 하찮고 유치한 짓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만두었다.
‘아까 갈 걸 그랬어.’
언제부터 심 박사 명령을 잘 들었다고. 심지어 저 연두부 새끼도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
하지만 어쩐지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면서 아까 일이 떠올랐다.
욕하고 도망가는 김윤조를 쫓았다. 어차피 속도로는 결코 수혁을 당해낼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죽도록 달리는 꼴이 우스워서 일부러 천천히 따라갔다. 매에 버금가는 시력을 동원해 김윤조의 찰랑이는 엉덩이를 감상하면서.
어디서 저런 트레이닝복을 찾아냈는지. 아예 가리는 것보다 더했다. 하도 얇아서 몸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날 뿐만 아니라 살이 올라붙을 때마다 검은 천 사이로 희끗희끗 비쳤다. 차라리 흰색이었으면 나았을 것을. 일부러 저런 걸 입었나 싶을 정도로 야했다. 하여간 수혁을 자극하는 데는 도가 튼 새끼였다.
잡고 나서 저 옷부터 어떻게 할까 하는 찰나 박병관 그 지저분한 새끼가 김윤조에게 손을 댔다. 갑자기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김윤조가 특유의 입담으로 멧돼지 몸뚱이에 두더지 낯짝이 붙은 새끼를 쫓아낼 줄 알았는데. 상상보다 예의를 갖추는 꼴을 보고는 심사가 비비 뒤틀렸다.
특히 박병관 새끼가 온갖 더러운 추파를 던지는 데도 저 성깔 더러운 가이드 새끼가 얌전 떨면서 상부에 보고하겠다고만 대답했을 때, 꼭지가 살짝 돌아 버렸다.
하늘 같은 소령한테는 막말 퍼레이드면서 고작 중위 따위에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박병관 새끼의 요추가 제 발에 박살이 난 후였다.
실컷 구해줬더니 젖꼭지 좀 봤다고 대뜸 지랄하는 새끼를 연구실까지 얌전하게 데려온 이유는 이 망할 특작부 내에 박병관 같은 새끼가 우글거리기 때문이었다. 다른 이유는 없다. 지금 심 박사의 지시를 얌전히 따르는 것도 같은 이유였다.
퇴근하던 심 박사가 던진 종이백 안에는 저 망할 새끼가 입을 옷이 들어있는데, 아까와 똑같은 천에 색깔만 흰색이었다. 이걸 입고 또 갓 태어난 사슴처럼 비틀거리면서 걷는 중에 어느 변태 새끼가 건드릴 줄 어떻게 아는가.
자신을 제외한 에스퍼는 전부 싹 다 미친 변태다. 그리고 수혁은 제 물건을 다른 놈과 공유하는 취미가 없다. 누가 어깨에 손만 대는 꼴을 봐도 꼭지가 도는 지경이다. 물론 박병관 새끼는 인간적으로 추악한 혓바닥에 징그러운 눈빛을 하긴 했다.
문득 아까 김윤조가 한 말이 생각났다.
‘테스터 후보가 더 있다고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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