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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21화 (98/256)

21화

중간에 낀 윤조는 어쩐지 두통이 이는 것 같았다.

“박사님, 저 머리 아픕니다.”

“머리가 왜? 저 새끼가 귀한 머리도 때렸니? 패널티는 확실하게 줬어? 안 줬으면 내가 위성 접속해서 지금 주게.”

“아줌마, 무슨 소리야? 난 아무 짓도 안 했다니까.”

패널티란 말에 기겁한 강수혁이 억울함을 호소했다. 그러든 말든 심 박사는 깡그리 무시한 채 윤조만 봤다. 그리고 강수혁도 윤조를 봤다. 억울해 죽으려는 눈빛으로.

아무리 강수혁이 밉지만, 하지 않은 일의 책임을 묻을 순 없다. 심지어 박 중위를 대신 응징했고 또 수치스러운 자세였지만 연구실까지 얌전히 옮겨 주기도 했다. 윤조는 일말의 양심을 따르기로 했다.

“그게 아니라 그냥 머리가 좀 아픈 거라서요. 소령님 때문이 아니니 패널티 부과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쉽네.”

이미 위성에 연결해 패널티를 마지막 실행 버튼만 누르면 되는 상황에서 심 박사는 패드를 내렸다. 패드 화면이 슬립 모드로 들어가기 직전 윤조는 500%라고 적힌 수치를 발견했다. 저 정도면 강수혁이 꼬박 하루 폐인이 될 수치였다.

윤조는 조용히 눈앞에 있는 조그만 체구의 중년 여성을 살폈다. 심 박사는 패널티를 부과하지 못해 진심으로 아쉬워했다. 순간 소름이 끼쳤다. 역시 심 박사에겐 반항하지 않는 편이 좋다. 그걸 저 멍청한 미친개만 모른다.

“뭐가 아쉬워? 아줌마, 너무하지 않아? 사람을 이렇게 차별할 수가 있어?”

“네가 사람 같은 짓을 해야지. 윤조는 얼른 옷 벗고 인큐에 들어가자. 강수혁 뭐 해? 빨리 옷 안 벗기고!”

여전히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 사이에서 윤조만 치였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윤조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트레이닝복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오만상을 쓰면서 애를 쓰는 윤조를 가리킨 심 박사가 다시 강수혁을 종용했다.

“저 꼴을 좀 봐. 불쌍하지도 않아?”

불쌍하기까지야. 윤조가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젖꼭지만 보고서도 흥분하는 변태에게 몸을 맡기느니 아프고 서러워도 혼자 벗는 편이 백번 낫다.

“젠장.”

가까이 다가온 강수혁은 윤조의 트레이닝복 허리춤을 잡아 휙 끌어올렸다.

“됐습니다. 제가 합니다.”

“됐어. 나중에 또 뭐라고 욕하려고.”

극구 거절하는 윤조의 손길을 강수혁은 간단하게 뿌리쳤다.

원체 힘이 세서 그런 건지, 혹은 일부러 거칠게 벗겨 낸 건지 몰라도 윤조는 균형을 잃고 옆으로 휘청거렸다.

“쟤 넘어지면 안 돼! 두부 박살 나!”

심 박사의 다급한 외침이 울려 퍼졌다.

턱.

심 박사의 외침과 함께 단단한 팔이 윤조의 옆구리를 받쳤다. 뒤이어 강수혁은 윤조의 티셔츠를 마구 뜯어냈다.

찌익. 찍.

윤조의 전신을 비롯하여 특히 목에 눌리고 잘린 자잘한 상처가 급격하게 늘었다.

“아픕니다.”

“겁대가리 상실한 두부 새끼가 제 몸 아픈 줄도 아네. 기특하게.”

윤조의 항의에 남의 고통을 즐기는 사디스트다운 대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않아도 불편해 죽겠는데 기분까지 뒤틀린 바람에 윤조의 안면이 완전히 썩어 버렸다.

역겨워 죽겠다는 눈빛으로 쏘아보는데도 강수혁은 히죽 웃기만 했다. 혐오를 즐기는 걸 보니 마조히스트 기운도 다분하다. 다채롭게 미친 개새끼.

“그런데 옷이 왜 이따위야. 이런 거지 같은 걸 누가 줬어? 군 보급품도 아닌데.”

마구잡이로 옷을 죽죽 잡아 뜯던 강수혁이 대뜸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퍽.

날아온 패드 모서리가 강수혁의 뒤통수를 때렸다.

“나다, 이 새끼야! 어느 미친놈이 얘 단벌 전투복 망가뜨려 놔서 하는 수 없이 그거 입혔다. 네가 할 말 있냐?”

그 패드의 주인인 심 박사가 척척 걸어왔다. 바닥에 떨어진 패드를 다시 집어 든 심 박사는 그걸로 강수혁의 어깨를 사정없이 두들겨 팼다. 군 자산인 패드를 그렇게 마구 망가뜨려도 되나? 또 강수혁은 때려 봤자 소용없다. 이쪽 팔만 아플 뿐이다.

“옷 벗길 줄도 몰라서 찢냐? 네가 짐승이 아니면 뭐야? 대답해 봐.”

역시나 강수혁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도리어 심 박사를 향해 못 볼 꼴을 봤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걸 입히니까 별 지저분한 새끼가 찝쩍대고 그러잖아.”

반쯤 망가진 패널이 공중에서 우뚝 멈췄다.

“누가?”

“박병관.”

“그래서?”

“오래된 병참 기지 옆에 자빠져 있어. 요추 박살 났을걸?”

심 박사는 더는 강수혁을 때리지 않았다.

“왜?”

“내가 처박아서.”

“그래?”

윤조의 신상에 대해서는 히스테리 수준으로 걱정하던 사람이 막상 다른 에스퍼에 대해서는 뼈가 시릴 만큼 냉담했다. 요추가 박살 났다는 데도 심 박사는 별다른 야단도,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심지어 히죽 웃기까지 했다.

“쌤통이다. 그 새끼 안 그래도 밉상이었는데.”

심 박사는 은근히 기분 좋아 보였다. 그때 윤조는 강수혁의 비뚤어진 성질머리의 원천을 본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조치는 해야 할 것 같습니다만.”

윤조의 건의에 심 박사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내가 군의관에게 연락할게.”

박사가 군의관에게 연락하러 간 사이 윤조는 강수혁을 밀어내고 넝마가 된 옷을 스스로 벗었다. 전투복과 달리 트레이닝복은 재고가 넉넉해서 다행이었다.

“안에 원래 입던 쫄쫄이라도 입든가.”

“제 전투복은 외피, 내피 모두 특수 제작이라서요. 헬멧과 조인트를 완전히 갈아야 해서 앞으로 일주일은 더 걸릴 겁니다.”

“군복 입어. 군용 티셔츠는 안 비치잖아.”

“재생 직후엔 아무 옷이나 입으면 피부 발진이 일어납니다.”

“다른 건 없어?”

“없습니다. 이 옷이 마음이 들지 않으면 아예 벗고 다니는 건 어떻겠습니까?”

윤조가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

오만상을 찌푸린 강수혁이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상의를 다 벗어 던지고 막 하의에 손을 대는 때였다. 윤조는 진한 시선을 의식하고 고개를 들었다.

“계속 보실 겁니까?”

“뭘?”

“저요.”

“왜 보면 안 되는데? 뭐 감추고 싶은 거라도 있어?”

“하. 말을 꺼낸 제가 잘못입니다.”

어차피 온갖 추잡하고 난잡하고 수치스러운 짓을 다 했는데 감출 건 또 뭔가. 동성 군인끼리 샤워장도 함께 썼다. 물론 가이드가 되기 전 평범한 하사관이었을 때까지만.

탈의를 끝낸 윤조는 완벽한 나체 상태가 되었다. 연구실 공기가 차가워 솜털이 바짝 섰다. 인큐베이터로 걸어가 시동 버튼을 눌렀다. 그때 심 박사가 망가진 패드 두고 메인 콘솔 앞으로 갔다.

“프로세스는 이쪽에서 입력할게.”

“알겠습니다.”

윤조는 반쯤 기듯 인큐베이터 속으로 들어갔다. 부축해 줄 만도 한데 강수혁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않았다.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 엉뚱한 방향을 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따라가자 특별한 기기도 없는 맨 기둥만 있었다.

‘왜 저래.’

하여간 이해가 불가능했다.

윤조가 자리를 잡자마자 덮개가 자동으로 내려오고 발밑에서부터 인공 양수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한 두 시간만 있어.”

-두 시간이나요?

양수는 특별한 연결 없이도 윤조의 뇌파를 전기 신호화해서 심 박사 쪽 패널로 전송했다.

“관절 재생은 근육 재생보다 오래 걸려.”

심 박사는 양수에 거의 잠긴 윤조를 확인하고 인큐베이터 패널을 잠시 조작했다. 이후 주변을 정리하더니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디 가려고?”

멀뚱히 있던 강수혁이 심 박사를 향해 물었다.

“늦었으니까 퇴근해야지.”

“저 새끼는 어쩌고?”

“두 시간 뒤에 재생 과정 끝나고 나오면 옷 입혀서 숙소로 데려다줘.”

“누가, 내가?”

“그럼 네가 하지, 누가 해?”

그러면서 심 박사는 새 트레이닝복과 다른 속옷 일체가 든 종이가방을 강수혁의 가슴팍에 턱 던졌다. 강수혁은 밑으로 떨어지는 종이가방을 반사적으로 붙잡았다.

“난 간다. 나갈 때 연구소 문단속 철저히 하는 거 잊지 말고.”

휙 돌아서는 심 박사를 강수혁이 멍하게 봤다. 인큐베이터에 들어 있던 윤조도 고개만 달랑 들었다. 이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다.

-저, 박사님?

“내가 이 새끼한테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 순간 김윤조와 강수혁은 한마음이 되었다. 저 천재 박사는 왜 이런 이상한 상황에 자신들을 빠트리는가.

“무슨 짓 할 거면 공주처럼 안고 들어오질 말든가. 내가 봐선 별일 하지 않을 것 같고, 별일 할 것 같으면 김윤조, 패널티 팍팍 먹여. 리미트 해제 승인 미리 해 놨어.”

반쯤은 장난처럼 대답한 심 박사는 정말로 연구소를 나가 버렸다.

명령이 있어도 심 박사가 나가면 강수혁도 당연히 나갈 줄 알았다. 상관의 명령은 개똥으로 아는 자식이니. 사실 그편이 윤조도 편했다. 두 시간 재생한 뒤에 상황 봐서 숙소로 이동하기 귀찮으면 아예 인큐베이터에서 하룻밤 푹 자도 된다. 개 훈련사 동영상이나 시청하면서.

바람과 달리 강수혁은 자리를 뜨지 않았다. 오히려 상대는 연구실에 굴러다니는 간이 의자를 하나 끌어와 인큐베이터 옆에 두고 앉았다.

‘5분 정도는 기다리겠지.’

한 5분이 지났다. 그래도 강수혁은 그 자리에 있었다.

또 15분이 지났다. 지금쯤이면 심 박사가 자차로 부대 밖 장교 전용 아파트 단지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었다.

‘정말 두 시간을 기다릴 셈인가?’

이대로 끝까지 다 기다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진하게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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