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화
다 늘어난 목둘레를 주섬주섬 편 직후, 윤조는 변태를 흘끔 보고는 연구동 방향을 가늠했다. 하여간 변태 놈들이 우글거리는 망할 부대에서 혼자서 운동을 하겠다는 생각부터가 잘못되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귀찮은 듯 대충 인사한 윤조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아까 뜻하지 않게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린 바람에 다리가 갓 태어난 새끼 사슴처럼 떨렸다. 간신히 걸을 수는 있었지만 그게 다였다. 할 수 있는 선에서 열심히 노력했지만, 막 걸음마를 배우는 어린애도 이보다는 빠를 것 같았다.
느려 터진 윤조의 뒤를 강수혁이 졸졸 따라왔다.
“왜 저를 따라오십니까?”
“내가 널 왜 따라가. 내 숙소가 이쪽일 뿐이야.”
말이 안 되는 핑계였다. 마음만 먹으면 고속열차도 따라잡은 위인이.
“아, 예. 그럼 먼저 가십시오.”
윤조는 옆으로 비켜서며 먼저 가시라고 손짓까지 했다. 하지만 강수혁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그럼 그렇지.’
윤조가 코웃음을 치는데도 강수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재생력이 뛰어난 만큼 낯짝 두께도 남다른 걸까. 양심과 도덕을 상실한 뻔뻔한 이기주의자를 진지하게 상대해 봤자 어떻게 이겨 먹을 방법이 없다.
“너는 그 아줌마 연구실로 가는 건가?”
“아줌마라뇨? 심나연 박사님은 에스퍼 생체학계 권위자이시며, 무려 대령이십니다. 소령 위에 중령, 중령 위에 대령. 상관에 대한 예우를 지키십시오.”
상관은 존칭한다.
군이 아니더라도 인간 사회에서 너무 당연한 예의범절을, 강수혁은 전혀 지킬 생각이 없었다. 윤조의 지적에도 그는 콧방귀만 심드렁하게 뀌었다.
“어쩌라고. 그런데 그거 알아? 준위와 소령은 소령과 대령 차이의 두 배야.”
뭐 그렇게 말하면 윤조도 특별히 할 말이 없긴 했다. 하지만 강수혁을 두고 최소한 아저씨라고 막말하진 않는다. 미친개라고는 하지만 어쨌든.
뉘엿뉘엿 해가 졌다. 긴 그림자가 비행장에 늘어졌다.
다리가 하도 흔들리는 바람에 걷는 속도가 현저하게 떨어졌다. 심 박사가 말했던 대로 여든 먹은 영감 같은 속도였다.
“이 속도로 가다가는 연병장에서 야박하겠군.
강수혁이 윤조의 허리를 또 잡아 올렸다.
“헉.”
예고도 없이 양발이 공중에 덜렁 떴다.
발과 다리 무게 때문에 윤조의 무릎과 고관절이 비명을 질렀다. 이번엔 허리도 아팠다.
“난폭하게 들지 마십시오. 다리 아픕니다. 관절을 다치면 컨디션 조정 작업이 길어질 수 있어요. 걸어갈 테니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쌀쌀한 눈빛이 윤조에게 날아와 꽂혔다.
“가지가지 하는군. 연두부 새끼.”
솔직히 내팽개칠 줄 알았다. 패널티 부과 준비를 하던 윤조는 뒤이은 강수혁의 행동에 경악했다.
놀랍게도 강수혁은 윤조의 다리를 모아 다른 팔에 걸쳤다. 갑자기 왜 영화를 찍고 난리인 건지. 미친개의 느닷없는 행동은 큰 충격을 가져왔고, 윤조는 쩍 벌어진 입과 눈을 내내 다물지 못했다.
지표에서 살짝 떠오른 강수혁은 이동했다. 땅 위를 부드럽게 미끄러지는 형태가 꼭 자기부상열차 같았다. 속도도 무지하게 빨랐다. 음속 비행급은 아니라도 여든 살 영감 속도로 걷던 윤조에게는 가히 폭주였다. 강한 맞바람이 윤조의 머리카락과 옷자락을 뒤흔들었다.
‘으아아. 이게 무슨 사태야.’
윤조가 기억하는 한, 다른 사람에게 이런 방식으로 안긴 건 처음이었다. 그것도 하필 강수혁 소령에게. 이 상황이 너무 어색해서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동 속도가 너무 빨랐다. 괜히 꿈질거리다가 땅바닥에 갈리는 건 사양이었다. 싫지만 안전을 위해 윤조는 양팔로 강수혁의 목을 단단히 붙들었다.
“훗.”
그런 윤조를 본 강수혁이 조소했다. 가소롭다, 혹은 네가 별수 있겠냐? 그래 봤자 연약한 두부 새끼, 그러게 좆도 아닌 새끼가 왜 나대냐 어쩌고 하는 뒷말은 말로 하지 않아도 텔레파시처럼 윤조에게 생생하게 전달되었다.
“너무 빠릅니다. 어쩔 수 없어요.”
윤조는 즉시 항의했다.
“누가 뭐랬나?”
그럼 왜 웃고 지랄인 건데. 윤조는 잠시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하지만 그 이상 항의는 삼갔다. 기왕 안겨 가는 김에 연구동까지 무사히 도착하고 싶었다.
연구동에 금방 도착했다. 연구동 앞에서 내려놓으리라 예상했다. 심 박사와 강수혁은 떨떠름한 사이니까 연구실 안까지 들어갈 리가 없다.
이동하는 사이 보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라고 윤조는 내심 안도했다. 그리고 데려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려고 했다. 그러나 강수혁은 멈추는 대신 연구동의 열린 창문을 이용해 건물 속으로 들어갔다. 군대 건물답게 휑한 복도에선 콘크리트 냄새가 났다.
“실내 비행은 금지입니다.”
“시끄러워.”
비행 가능한 에스퍼가 느린 엘리베이터를 탈 리가 없다. 대신 소용돌이 모양 계단 중앙의 뻥 뚫린 공간을 이용해서 깊은 지하 연구실로 바로 내려갔다.
심나연 박사의 연구실은 지하 8층에 있었다. 그 아래는 메인 서버실이 있으므로 사실상 심 박사의 연구실이 최저층이었다. 사령부 내 최고 기밀 시설이라는 뜻이기도 했다.
보안을 위해 계단과 연구실을 분리하는 두꺼운 철문에는 개폐용 입력 장치가 없었다. 안에서 열어주지 않으면 아예 들어갈 수가 없는 구조였다. 대신에 구식 초인종이 있었는데 그 위에 [손님은 여길 눌러 주세요]라는 손글씨를 조각한 나무 팻말이 붙어 있었다.
“초인종은 무슨. 웃기고 있네.”
강수혁은 두 팔로 윤조를 안고 있을뿐더러 저 우스꽝스러운 초인종에 손을 댈 심산도 전혀 없었다. 대신에 윤조가 초인종을 눌렀다.
딩동.
구닥다리 물건답게 아주 정겨운 종소리가 났다. 직후 문 한쪽 덮개가 열리면서 손바닥 전체를 대는 패널이 나타났다. 윤조가 손을 바닥을 대자 문이 열렸다.
안쪽에서 카랑카랑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미친놈이 사람을 또 넝마 짝으로 만들어 놨네.”
심 박사는 골이 아픈 듯 본인의 옆머리를 꾹꾹 눌렀다.
“안고 있는 걸 보니 이번에야말로 척추를 똑 부러뜨렸나 보지?”
“누가. 이 새끼한테 손댄 적도 없어.”
강수혁은 계급이 두 단계나 높은 심 박사를 향해 건방진 대답을 돌려주었다.
웨이브가 살짝 남은 커트 머리에 손가락을 집어넣어 두피를 꾹꾹 누르는 심 박사는 윤조에게 눈빛으로 진위를 물었다.
“관절이 살짝 풀렸을 뿐입니다. 신경은 멀쩡합니다.”
“뭐? 그런데 왜 안고 들어와?”
윤조의 대답에 심 박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리 아파서 못 걷는다고 징징대잖아.”
“제가 언제요? 그냥 걸어갈 수 있는데 소령님이 느려 터졌다고 짜증 내면서 막무가내로 안아 들었지 않습니까?”
윤조의 항변에 더욱 놀란 심 박사는 이번엔 강수혁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우리 개망나니, 랜딩 연습하다가 실수해서 대가리 박살 났었니? 급하게 재생해서 기억이 완전히 안 돌아온 거야? 갑자기 왜 이래? 왜 윤조한테 잘해 줘? 나 무섭다.”
“이 새끼가 두부 몸인 걸 왜 날 탓해? 그리고 내가 무슨 불사신인 줄 아나. 대가리가 박살 났는데 재생하게. 기왕 만들 거면 좀 튼튼하게 만들어 좀, 아줌마.”
면전에서 아줌마라고 하다니. 심 박사가 열받아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겉보기에 일반인인 심 박사는 A급 에스퍼였다. 그것도 모든 강화 변이가 오로지 두뇌에만 몰빵된 특수한 에스퍼. 자산 가치로 따지면 유일한 가이드 김윤조 혹은 트리플 S급 에스퍼 강수혁보다 몇 수 윗급이었다.
가이드 시스템도 타국에서는 20년을 연구하여 간신히 완성한 최첨단 기술이다. 그걸 심 박사는 제로 단계에서 도전하겠다고 선언한 지 2년 만에 뚝딱 만들어 냈다. 한마디로 강 소령이 미친개라면 심 박사는 미친 천재였다. 신체는 보통 인간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각종 기발한 수단을 강구해 강수혁 따위 자는 사이에 쓱싹 하는 것도 가능했다.
미친 천재답게 성격도 약간 괴팍하고 군인답지 않다. 그래서 계급에 관계없이 편안하게 대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아무리 그래도 강수혁은 선을 너무 넘었다.
윤조는 눈만 굴려 위계질서 개념과 더불어 겁대가리를 상실한 또라이를 흘끔 봤다.
“이 천둥벌거숭이 또라이 새끼야. 나는 또 무슨 창조신이라고 사람을 만들어. 그리고 네 기준이 두부 아닌 사람이 어디 있냐.”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도 심 박사는 인큐베이터를 빠르게 조작했다. 그러곤 김윤조를 연구실에 대강 던져놓고 돌아서는 강수혁을 향해 명령했다.
“옷 벗겨서 저기 눕혀 넣어.”
“뭐?”
“네?”
강수혁과 더불어 윤조까지 심 박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귓구멍 막혔어? 탈의!”
“내가 왜?”
“제가 할 수 있습니다.”
윤조의 대답은 깡그리 무시한 심 박사는 강수혁을 향해 다시 윽박질렀다.
“그럼 대령인 내가 하리?”
“귀찮게.”
“네 가이드는 네가 챙겨야지, 네 더러운 성질머리에 온갖 까탈은 다 받아 주는 착한 파트너잖아. 안 그래?”
“착하기는 얼어 죽을. 저 새끼가 착하다고? 아줌마가 속고 있는 거야.”
“안 착하면? 너 같은 미친놈이랑 순순히 자 줬겠냐?”
성관계를 언급하자 강수혁은 바로 입을 다물었다. 대신에 심 박사를 죽을 듯이 노려보았다. 심지어 에스퍼 활성 상태가 되려는지 홍채가 오팔색으로 일렁였다. 그러나 심 박사는 전혀 움츠러들지 않았다. 도리어 허리춤에 양손을 얹고 ‘어쭈? 해보자는 거야?’라는 식으로 강수혁을 똑같이 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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