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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9화 (96/256)

19화

깜짝 놀란 윤조는 부동자세를 취했다.

“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방금 리모콘에 좆질 하는 변태 어쩌고 했잖아.”

“아아, 그게 들렸습니까?”

윤조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쭉 흘렀다.

“시발 들리지, 그럼 안 들려?”

윤조는 어색하게 하하 웃었다. 반대로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 예. 그렇군요. 청력이 상당하십니다. 과연 트리플 에스급. 하하하.”

아. 이건 망했다. 에스퍼 새끼. 청각이 예민한 걸 깜빡했다. 윤조는 냅다 뒤돌아 뛰기 시작했다.

“너 거기 안 서? 이게 미쳤나!”

“소령님 같으면 서겠습니까? 말이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십시오!”

윤조는 뒤를 향해 외쳤다.

80대 노인처럼 걸으라던 심 박사의 잔소리는 뒷전으로 미루었다. 재활이고 뭐고 없다. 그냥 관절이 나가도록, 근육이 터지도록 달렸다. 하급 에스퍼에 필적하는 스피드로 달아나긴 했지만. 사실 달아날 확률은 희박하다. 강수혁의 비행 속도는 음속을 능가했다.

‘부대 안이니까 음속 비행은 못 할 거고.’

부대 내에서 과도한 능력 사용은 패널티 부과 조건을 충족한다. 바로 강수혁의 뇌를 튀길 수 있다. 일단 윤조는 패널티 프로그램을 준비했다.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다면 바로 보복할 셈이었다.

구 연병장 끝 낡은 병참 건물을 끼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가는 순간, 윤조는 딱딱한 벽에 부딪혔다.

턱!

윤조의 연약한 코가 팍 뭉그러졌다가 다시 펴졌다.

“그런데 길에 뭘 놔둔 거야. 병참 새끼를 빠져 가지고.”

짜증과 함께 고개를 드는 순간 버석한 손이 윤조의 대가리에 턱 앉았다. 시큼한 땀 냄새와 함께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야, 인형 새끼. 앞 좀 보고 다녀.”

가래 끼가 가득한 거칠고 더러운 음성이 윤조의 고막을 두드렸다. 순간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기분이 확 주저앉았다.

“죄송합니다. 박 중위님.”

고개를 숙여 사죄하면서 머리를 잡은 손바닥을 슬쩍 피했다. 윤조는 음흉한 눈초리로 자신을 흘겨보는 그의 눈을 피해 발치를 응시했다. 그러곤 그가 지나갈 수 있도록 옆으로 비켜섰다.

박병관 중위. 근력 A급, 회복력 B급, 스피드 B급, 정서 안정 A급, 기타 능력 없음. 종합 A급으로 각종 작전에서 출중한 실력을 증명한 엘리트 에스퍼였다. 하지만 윤조는 박병관을 강수혁 다음으로, 어쩌면 강수혁보다 더 싫어했다.

“눈깔 제대로 뜨고 다녀.”

칵 퉤. 박병관이 가래침을 뱉었다.

하여간 에스퍼 놈들 눈깔에 무슨 집착증이라도 있나. 매번 눈깔, 눈깔. 시비 털고 지랄인지. 윤조는 속으로 중얼거리면서도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지나가라고 길을 비켰는데도 박병관은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윤조를 보면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김윤조가 박병관을 싫어하는 이유는 썩은 재떨이 냄새 나는 입에 개기름 흐르는 낯짝 말고 따로 있었다.

“넌 에스퍼라면 아무나 다 벌려 준다며? 나도 에스퍼인데 좀 벌려 주지. 가랑이가 쓸쓸해서 말이야.”

바로 이것. 윤조는 못 들은 척했다. 박병관의 영전에 미리 절하는 셈 치고 고개를 다시 한번 꾸벅였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몸을 돌리는데 담배에 찌든 더러운 손이 윤조의 어깨를 잡아 막았다.

얇은 트레이닝복 때문에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불쾌감이 울컥 솟아올랐다. 주먹을 꼭 쥐면서도 윤조는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아니 누구는 취급하고 누구는 모르쇠야? 너 군부 자산이잖아. 나도 군에 복무하는 군인인데 왜 차별해?”

“차별한 적 없습니다. 저는 상부의 명령에 따를 뿐입니다.”

“내가 그 상부인데?”

그러면서 놈은 어깨에 붙은 견장을 내밀었다.

중위. 준위와 받침 한 개 차이지만 계급 차이는 그 이상이었다. 하지만 윤조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모자란 삼촌 같은 대령 최정, 잔소리 많은 이모 같은 대령, 심 나연 박사, 그리고 시시때때로 시비가 붙고 멱살잡이를 하는 군내 최고의 개차반 소령 강수혁에 둘러싸여 있는데 고작 중위에 쫄 이유가 없다. 그리고 자산 가치를 따지는 군부 입장에서는 얼마든지 대체 가능한 중위보다는 유일한 가이드가 더 귀중했다. 그 점을 윤조는 잘 알고 있었다.

“비켜 주십시오.”

완력이 통할 상대가 아니기에 힘으로 밀어내는 대신에 재차 말로 강하게 요구했다.

“좀만 놀자니까. 오늘따라 살이 말랑말랑하네? 군 보급품에 이런 야시시한 츄리닝도 있었어?”

어깨를 잡은 손이 음흉하게 움직였다. 가슴 상부에 닿은 엄지손가락이 살점을 파고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빙글빙글 돌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네가 그렇게 끝내준다며? 강수혁이 그 새끼가 환장한다는데. 그렇게 여자가 따르는 반반한 새끼도 돌아 버린 구멍이라면 얼마나 좋다는 거야? 여자보다 더 좋아?”

“이거 놓으십시오. 자꾸 이러시면 상부에 보고하겠습니다.”

지저분한 손길을 참지 못한 윤조는 박병관의 손목을 잡고 밀어냈다. 역시나 근력 A급이라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앙칼진 게 꼭 고양이 같네. 젖소 무늬 있잖아. 머리랑 등은 까맣고 배는 하얀…… 억!”

느릿느릿 징그러운 말을 잇던 박병관이 큰 타격음과 함께 갑자기 눈앞에서 사라졌다.

쿵.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자 저쪽에 나가떨어진 시커먼 덩치가 보였다. 정신을 잃고 꿈틀꿈틀하던 박 중위는 이내 움직임이 멈췄다. 그리고 윤조의 대각선 방향엔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끼워 넣은 채 한쪽 발을 천천히 내리는 강수혁이 있었다.

아마도 기척도 없이 다가와 저 군홧발로 박병관 옆구리를 가격했으리라. 근력 트리플 S급에게 무방비로 당했으니 최소 내장 파열, 최대 척추 분쇄의 중상이다. 하지만 재생력 B급이니 죽진 않겠지.

발을 땅에 내리자마자 강수혁이 짜증부터 냈다.

“너는 시발. 군인이라는 놈이 제 몸 하나 못 지켜?”

도와준 건 고마운데 왜 성질을 내는 건지. 막 하려던 고맙다는 인사가 목구멍 속으로 다시 쑥 들어갔다. 구겨지는 얼굴을 억지로 펴면서 윤조는 물어본 질문에 답했다. 물론 궁금해서 물어본 것이 절대로 아니겠지만.

“박병관 중위는 A급 에스퍼입니다.”

“에스퍼면 뭐? 대가리부터 튀기면 되잖아.”

“그러려면 뇌파 연결부터 해야 하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윤조는 잡힌 어깨를 툭툭 털면서 말을 이었다.

“박 중위는 추후 테스터 후보 리스트에도 없습니다.”

막 입을 열던 강수혁이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듯 잠시 뜸을 들인 강수혁이 입을 열었다.

“그래? 후보에 누가 있는데?”

묻는 말끝이 묘하게 수상했다.

“기밀이라 저도 모릅니다.”

“너랑 대가리를 연결할 놈을 왜 몰라?”

강수혁이 화를 냈다. 이게 화를 낼 사안인가?

“이미 대가리를 연결한 놈에 대해서도 아는 게 없는데요.”

좀 전에 있었던 대화를 다시 상기시키자, 강수혁은 다시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못했고 강수혁은 다시 화를 냈다. 하여간 더럽게 일관성 있다.

“박병관 저 등신 새끼가 후보 아니란 걸 알잖아.”

“박 중위는 일단 정서 안정 등급이 A니까요. 가이드가 필요 없습니다.”

“나는 정서가 불안해서 가이드가 필요하다는 얘기야?”

왜 새삼스러운 얘기를 하는 건지, 의아해서 윤조는 강수혁을 빤히 봤다. 강수혁은 정말 억울한지 광대를 씰룩였다.

“최근 테스트에서 강 소령님 정서 등급이 아마 D였나? 아니다, 이번에는 F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얼마 전에 신형 전차 두 대와 소송 헬기 1대 박살 내셔서 말입니다. 에프~풰일~낙제.”

윤조는 거듭 강조했다.

군에서 판단하는 정서 안정은 다른 게 아니었다. 군에 대한 협조성과 명령 불복종 사항을 따진다. 한마디로 까라면 군말 없이 까는 쪽이 높은 등급을 받는다.

등급 표준에 따르면 강수혁은 정서 등급 낙제다. 군에 대한 협조성이 제로에 수렴하다 못해 여러 차례 항명에 테러까지 일으켰다. 불명예제대도, 군사재판 회부도, 영창 수감도 아닌 이유는 그냥 강수혁이 너무 강해서 그런 제재가 소용없어서였다. 동시에 워낙 강대한 힘을 소유한 위험 인자이기에 일단 군에서 관리하는 쪽이 나라와 사회의 안녕에 유리하다고 상부가 판단했다.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는 이만.”

“어딜 가, 이 새끼야. 아까 한 말 다시 해 봐.”

와 쫌생이 새끼. 지금 다른 놈한테 무시무시한 일을 당할 뻔했는데 이 상황에서 그걸 따지고 있는 건가?

“아까요? 제가요? 무슨 말이요?”

“아까 분명히 리모컨을 상대로 좆대가리를 세우는 변태 새끼라고 했잖아.”

기억하면서 왜 물을까.

“제가요? 그랬습니까?”

“이게 어디서 씨알도 안 먹힐 오리발을 내밀고 있어?”

강수혁이 윤조의 멱살을 홱 잡아당겼다. 강한 손에 틀어 잡히자 얇은 트레이닝복 목둘레가 길게 늘어졌다.

서늘한 바람이 가슴팍을 스쳤다. 훌쩍 큰 키 때문에 자연스럽게 윤조를 내려다보게 된 강수혁의 시선이 늘어난 목둘레 안으로 떨어졌다. 날카로운 눈매가 위아래로 살짝 늘어났다. 중간에 자리 잡은 홍채가 미세하게 떨렸다.

“뭘 봅니까?”

상대를 따라 윤조는 고개를 숙였다. 벌어진 목둘레 안쪽에 희멀건 가슴, 그리고 유달리 도드라진 유두가 보였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지면서 유두가 쭈뼛 섰다. 손으로 셔츠 중심부를 눌러 가슴을 가렸다. 그리고 다시 상대의 얼굴을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강수혁은 움찔하더니 괜히 먼 산을 봤다.

“이젠 리모컨 버튼을 보기만 해도 흥분하시나 봅니다?”

“야이…… 씨.”

윤조의 조롱 섞인 비난에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한 강수혁은 잡았던 멱살을 거칠게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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