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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15화 (92/256)

15화

가이드가 되는 순간 강수혁이 첫 목표일 줄은 미리 알았다. 윤조가 가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한 가장 큰 이유는 따로 있지만, 강수혁의 안정적인 임무 수행을 위해 보조 격인 강화 인간을 만드는 프로젝트라는 당시 상관의 설명도 제법 역할을 했다.

상관을 원망할 생각은 없다. 실제로 그는 전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문제는 그 강수혁이 이렇게까지 개호래자식인 줄은 상관도 몰랐다는 점이었다.

대외적으로는 국가적 위기에서만 출동하는 최강의 에스퍼. 영화배우 뺨치는 외모에 아우라를 지닌 최종 병기. 마른 성격에 우수 넘치는 눈빛으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찬양받는 국민 영웅.

가이드 프로젝트에 참여하게 되면 그 강수혁의 파트너가 되어 게이트와 외계 생명체에 대항한 작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물론 작전은 드물지 않게 있다. 강수혁이 기분이 매우 좋을 때나, 혹은 기분이 극심하게 나쁠 때. 그는 출동 명령이 내려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게이트로 돌진했다.

반대로 이도 저도 아닌 평상시에는 완벽한 게으름뱅이가 되었다. 그는 부대 어딘가에 처박혀 아무리 호출해도 코빼기도 비치지 않는다. 심지어 부대 시찰하러 온 쓰리스타의 호출도 씹었다.

힘만 믿고 날뛰는 천둥벌거숭이에 개망나니.

그것이 강수혁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들의 일관된 평가였다.

-개새끼. 빌어 처먹을 개……새끼.

뒤늦은 억울함이 치가 떨렸다. 세웠던 중지를 말아 주먹을 쥐어 내질렀다. 인큐베이터 유리가 퉁퉁 울렸다.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 이깟 비참함과 억울함을 못 이길 거면 애초에 목숨을 걸고 가이드 프로젝트의 피실험체로 나서지도 않았을 거다.

윤조에게는 이루어야 할 사명이 있다.

가이드로서도, 군인으로서도 아닌, 인간 김윤조로서 반드시 이루고 싶은 강렬한 목표가. 거기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수혁이라는 인간 말종을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그까짓 구멍이 찢어져도, 척추가 내려앉아도 재생만 되면 그만이다. 산 채로 몸이 짓이겨지는 공포와 충격도 버텨 냈는데 이까짓 하찮은 가학 따위.

얼마든지 벌려 주고 얼마든지 찢겨 줄 거다. 비참함에 자존심이 산산이 조각나고 억울함에 분노가 차올라도 괜찮다.

그래 봤자 강수혁은 김윤조의 손아귀에서 영영 벗어나지 못한다. 그처럼 유용한 에스퍼를 절대로 놓아줄 수 없다.

8년 전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졌던 그날.

입대를 결심하면서 세웠던 목표를 이루기 전까지는 절대로.

퉁. 퉁.

주먹이 인큐베이터를 내리칠 때마다 흔들리는 인공 양수가 뜨거워진 눈시울을 씻어 냈다.

03. 그 가이드와 에스퍼

삐이익.

취사 완료를 알리는 전기밥솥처럼 인큐베이터가 재생 치료 완료를 알렸다. 만 75시간 만의 일이었다.

양수가 배수되고 곧이어 온수 세척이 시작되었다. 윤조는 재생하는 동안 마셨던 양수를 토해 냈다. 구석구석 온수 줄기가 닿았다. 양수가 충분히 씻기자 이번에는 온풍이 나왔다. 하지만 그보다는 빨리 갑갑한 인큐베이터를 벗어나고 싶었다.

툭툭.

유리를 두드려 신호를 보내자 심 박사가 코드를 입력했다.

삐익.

인큐베이터 커버가 열렸다. 윤조는 화학 약품 향기가 가득한 연구실 공기를 달게 마셨다.

다가온 심 박사가 큰 목욕 타월을 내밀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감사하게 타월을 받았다.

“조직 재생은 성공적으로 끝났어. 재활은 내일부터 하지.”

“아닙니다. 오늘부터 바로 하겠습니다.”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연약한 신체 자체가 썩 달갑진 않다. 하루라도 빨리 재활해서 멀쩡하게 움직이는 편이 마음이 놓인다.

재활이라고 해 봐야 대단한 건 아니고 재생한 근육과 뼈에 대한 감각을 살리는 정도다. 이미 여러 차례 반복한 과정이라 꼭 재활 전문가가 없어도 알아서 진행할 수 있다. 이게 모두 강수혁의 지속적인 지랄 덕분이었다.

“늦은 오후라 계속 쉴 줄 알고 재활 담당자 배치 안 했어. 이번엔 척추 부상이라서 무리하지 않는 게 좋아.”

혼자서 충분히 재활 훈련을 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심 박사는 고개를 저었다. 재생 결과에 따른 전문적인 판단이므로 무시할 수 없다.

“그럼 가볍게 산책만 하겠습니다. 인큐 안에만 있었더니 너무 답답합니다.”

몸을 닦으며 윤조가 대답했다.

“산책 정도라면.”

심 박사는 더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에 미리 준비한 내의와 트레이닝복을 향해 턱짓했다.

“내피 여분이 없어. 담당 군수업체에 발주했는데 마무리 공정이 늦어진대. 전투복은 뭐.”

“인도까지 얼마나 걸린다고 합니까?”

“몰라, 2주보단 짧게? 병참도 에스퍼 전투복 물량 쳐내느라 죽겠나 보더라고. 하여간 에스퍼들 물건 좀 곱게 쓰지. 어쨌든 당장 전투복은 사용 불가능. 당연히 전투 참가는 금물이고. 덩달아 망나니 새끼도 휴가네. 그동안은 대형 게이트나 자이언트형이 나타나지 않기를 빌어야지. 설마 이 새끼 이러려고 네 하반신 작살낸 거니?”

심 박사가 의심했다.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가정이라 오히려 웃음이 났다.

“설마 그렇기야 하겠습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심 박사를 향해 윤조는 싱긋 웃었다.

“가이드라고 네 에스퍼 편드는 거야?”

“끔찍한 말씀,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잘게 진저리를 친 윤조는 넘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걸어 속옷과 트레이닝복을 집었다.

“확률상 극히 희박하니까 드린 말씀입니다. 국내에 자이언트형이 마지막으로 나타난 건 8년 전입니다.”

“그거야 그렇지. 하지만 만약의 경우라는 게 있잖아. 요즘 게이트 발생 빈도도 심상치 않고 말이야.”

게이트 발생 빈도가 역대 어느 해보다 높긴 했다. 거기다가 예측을 넘어선 랜덤 발생도 심심찮았다.

윤조는 티셔츠를 끌어 내리면서 덧붙였다.

“만약 그럴 일이 생기면 저 없이 강수혁 소령님 혼자서라도 나서실 겁니다. 그분이 그래도 대형 게이트는 확실하게 처리하지 않습니까?”

“나는 바로 그게 걱정이야, 그게.”

심 박사가 짜증 섞인 한숨을 쉬었다.

트레이닝복 바지 끈을 조이는 윤조를 향해 심 박사가 양말과 운동화를 건넸다.

“어때? 입을 만해?”

“네. 괜찮습니다. 자극적이지 않아서 좋습니다.”

심 박사가 준비한 물품은 군용이 아니었다.

군내 보급 피복은 내구성과 활동성을 우선하여 재질이 거칠었다. 당장 인큐베이터에서 막 나온 윤조의 피부로는 감당할 수 없다. 심 박사는 따로 사제 트레이닝복과 운동화를 준비한 것이다.

“신생아용 옷 만드는 재질이야. 내피 여분이 올 때까지는 그거 입어. 이건 여분 걱정은 말고. 많으니까.”

“감사합니다.”

신생아용이라 그런지 부드러운 만큼 얇기도 얇았다.

핏도 낭창해서 성인 남자 그것도 군인이 입고 다니기에는 약간 창피한 모양새였다. 하지만 다른 대안이 없으니 어쩔 수 없다. 벗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그것도 미친 에스퍼 놈들이 득시글거리는 특수작전사령부 안에서는 절대로.

“염색 안 해도 되겠어? 머리가 탈색되었는데.”

그 말에 윤조는 인큐베이터 유리에 제 모습을 비춰 봤다. 살짝 젖은 머리가 평소보다 한 톤 밝았다. 멋내기 염색을 한 대학생 같은 모습이었다.

“아직까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옷이라도 흰색으로 준비할 걸 그랬네.”

“그래도 검은색이 덜 튀지 않겠습니까?”

“내가 보기엔 검은색이라 더 좀…… 그래 보이는데.”

심 박사가 드물게 말을 돌렸다.

좀 그래 보인다는 말의 의미를, 윤조는 잘 알고 있었다.

외모가 이질적인 만큼 오히려 평범한 옷을 입을 때 위화감이 더 커진다. 한마디로 색달랐고 그래서 자극적이었다. 이목을 끌면 시비도 많이 털린다.

심 박사는 그 점을 걱정했다. 재생 직후는 약간의 주먹다짐으로도 시퍼런 피멍이 들 만큼 피부가 연약한 상태였다. 군에서는 흔치 않은 흰색을 입어 ‘규격 외’임을 밝히는 쪽이 도리어 나을 수도 있다.

심 박사는 늘 들고 다니는 패드를 켜서 빠르게 조작했다. 현란한 손가락 움직임이 피아노 연주처럼 보였다.

“흰색으로 가져오는데 1시간 정도 걸릴 것 같은데. 어때? 기다릴래?”

이미 연구실에서 갇힐 만큼 갇혔다. 참으라면 못 참을 시간도 아니지만. 굳이 옷을 다시 바꿔 입기에는 또 너무 번거롭고 답답한 시간이었다.

“아닙니다. 그냥 검은색 입겠습니다. 눈에 안 뜨이는 곳으로 다니겠습니다.”

윤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 네가 알아서 해.”

대령이라는 계급을 이용해서 1시간을 무조건 기다리게 할 수 있음에도 심 박사는 더는 강권하지 않았다. 고작 준위에 불과해도 유일한 가이드라는 점이 윤조의 의사 결정에 힘을 실었다. 사실 준위 김윤조보다는 가이드 김윤조로 통하고 있기도 했다.

가이드가 되기 전, 윤조는 외모에 꽤 자신이 있는 편이었다.

규칙적인 식사에 규칙적인 훈련, 규칙적인 수면까지. 틀에 박힌 군 생활은 볼품없는 대학 신입생을 균형 잡힌 근육을 자랑하는 엘리트 군인으로 탈바꿈시켰다. 단정한 마스크까지 더해서 휴가를 나가면 여러 사람의 이목을 사곤 했다. 특히 여자들의.

그것도 이젠 옛말이었다.

가이드 프로젝트의 피실험체가 되어 DNA 단계에서부터 완벽하게 재조립되었다. 현재 윤조의 몸은 군인치고는 상당히, 일반인 기준으로도 살짝 마른 편에 속했다. 아주 형편없는 정도는 아니었다. 문제는 전체적인 색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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