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77)화 (77/256)

71화

“응?”

윤조는 반사적으로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누구보다 청각이 뛰어날 에스퍼의 움직임은 상대적으로 굼떴다. 도리어 침대에서 일어나려는 윤조를 방해했다.

그러는 중에도 비상 알람은 요란하게 울렸고 상황을 알리는 방송도 이어졌다.

-남동쪽 14km 부근 고도 8만 ft. 추정 중형 게이트 급격하게 생성 중. 드론부대 모두 비상 전투 위치로!

게이트? 이렇게 갑자기?

“소령님!”

중형 게이트 발생 소식에 윤조는 다급하게 강수혁을 불렀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하지만 빌어먹을 개새끼는 떨어질 생각도, 뺄 생각도 없었다. 입구에 걸린 귀두가 더 깊이 들어왔다. 윤조는 기겁했다.

“지금 이럴 때가 아닙니다!”

“한 발 빼고 가도 안 늦어. 이제 생성되고 있다잖아.”

에스퍼가 인간성과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건 알고 있다. 특히 트리플 S급의 중량감을 따지자면 경거망동을 일삼기보다는 신중하게 움직이는 게 맞다.

그런데 게이트 발생이라는 비상사태를 맞아 ‘대기’ 상태에 돌입하는 것도 아니고 치던 떡이나 마저 치고 나가도 괜찮다는 얘기에 그렇지 않아도 얼마 없는 어이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인간적으로 소화하기 버거운, 차원이 달라도 한참 다른 대응이다 보니 화도 안 났다. 그냥 생뚱한 낯을 하고 상대를 걷어찼다.

“이 미친 새끼야.”

퍽!

발목이 시큰거릴 세기였다. 하지만 윤조 안에 자리 잡은 성기의 위치는 그대로였다.

원래 밀리지 않을 새끼긴 했다. 그래도 이쪽에 백 크러시가 올 만큼 전력을 다해 가격했는데 꿈쩍도 안 하는 건 인간적으로 너무했다.

퍽퍽!

심지어 강수혁은 피하지도 않았다. 잘생긴 얼굴을 못생기게 구기고는 뒤이은 윤조의 발길질을 계속 맞았다.

“안 아프거든.”

“아프게 해 드려요?”

뇌에 힘을 주었다. 패널티는 싫은지 강수혁이 오만상을 찌푸리더니 결국 떨어져 나갔다.

“흣”

유치한 변태 새끼가 일부러 거칠게 빼는 바람에 윤조는 잘게 떨어야 했다. 눈에 힘이 들어갔지만, 이런 일에 일일이 화를 내기에는 상황이 너무 급했다.

휴지를 찾을 여유도 없어서 벽에 걸린 수건으로 체액을 대충 닦았다. 여분의 내피를 찾아 갈아입는 사이 망할 에스퍼 새끼가 느릿느릿 화장실로 갔다.

“전투 준비 안 하십니까?”

윤조의 다그침에 강수혁은 천천히 돌아섰다. 그리곤 제 가랑이를 강조하기 위해 두 손바닥을 아래로 내밀었다.

“이 꼴로 전투복 입으라고? 이대로 나갔다간 게이트에 대고 좆질 하겠다.”

“……3분 드리겠습니다.”

딴에는 인심을 써서 3분이나 준 건데 돌아오는 건 이쪽을 보지도 않고 세운 중지뿐이었다. 망할 변태 개새끼.

놈을 기다릴 생각은 당연히 없었다. 어차피 상황 사태 파악은 윤조의 몫이다. 미리 정보를 수집해 강수혁에게 전달해야 한다.

윤조가 대충 몸을 닦고 새 내피에 전투복을 완벽하게 장착하기까지 90초 정도 걸렸다.

“저는 갑니다. 통신에 신경 쓰십시오.”

화장실을 향해 외친 후 윤조는 급하게 선실 밖으로 뛰어나갔다.

거대한 인간 말뚝에 급소를 내내 박히던 중이라 발을 디딜 때마다 무릎이 꺾이려 했다. 탄성 회복력이 있는 전투복이 움직임을 보조하지 않았다면 볼썽사납게 넘어졌을 거다.

삐이이이잉! 삐이이이잉!

“이 느려 터진 새끼들아! 안 뛰어? 시발!”

잔뼈가 굵어 보이는 상사(上士)가 전투 위치로 뛰는 병사들 뒤통수에 대고 욕을 갈겼다. 다급함을 넘어서서 절박함과 비장함이 넘치는 표정을 지은 병사들은 이쪽, 저쪽으로 달려갔다.

갑자기 터진 비상사태여서 그런지 그들의 행색도 윤조와 별다를 바가 없었다. 잠이 덜 깨서 눈곱을 비비며 뛰는 병사는 약과였다. 어떤 병사는 샤워 중에 튀어나왔는지 뒷덜미에서 흐르는 비누 거품이 군복 옷깃을 적시고 있었다.

‘다행이다. 나만 이상한 게 아니라서.’

제 이상한 걸음걸이를 신경 쓰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윤조는 안심했다.

삐빅.

전투복이 위성에 연결되자 곧바로 통신이 들어왔다.

-김윤조! 나왔어?

“네, 최 대령님.”

-심나연 선실! 지금 임성준 뛴다.

“알겠습니다.”

최정과의 통신을 마치자마자 심 박사의 선실에 도착했다. 서로 선실이 가까워서 다행이었다. 안에 들어가자 마침 임성준이 도착했다.

“김 준위. 강 소령님은요?”

고개를 살짝 젖는 윤조를 본 임성준은 곧바로 윤조의 허리에 팔을 둘렀다.

심 박사와 가볍게 인사조로 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허리에 다른 남자의 팔이 단단하게 감기는 일은, 강수혁 외에 처음이었다. 강수혁과의 비행 경험이 없다면 어색함이 아무것도 아니었을 텐데. 조금 전까지 진득한 섹스 중이어서 그런 건지 이상하게 차이점이 크게 다가왔다.

강수혁의 팔이 몸을 옭매는 거칠고 단단한 H빔과 같다면 임성준의 팔은 놀이 기구의 두툼한 안전 바 같았다. 실제 굵기와 길이는 강수혁 쪽이 우월하기에, 윤조의 느낌은 정말로 단순한 느낌일 뿐이었다.

“준비됐습니까?”

임성준은 멋대로 점프하는 대신에 윤조에게 시선을 맞추면서 이쪽의 상태를 점검했다. 강하게 붙잡는 중에도 위해를 가할 의도는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듯한 태도가 안정감을 주었다.

“네. 준비되었습니다.”

이상한 파동이 전신을 감쌌다.

뼛속부터 쓱 긁고 가는 기묘한 소름이 발끝에서 정수리까지 빠르게 스쳤다. 직후 윤조는 최정과 심 박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격납고 선창 03.

상대적으로 우선순위가 밀리거나 항모 자체에서 수리 불가능한 장비들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유인 항공기에 비해서 비교적 작고 슬림하지만, 여전히 큰 날개와 몸체를 자랑하는 드론 네 대가 다른 기체들과 함께 고정되어 있었다. 드론 인근에는 각 드론과 세트인 리모트 콕핏도 거치되어 있었다.

드론은 레이저 무기와 각종 정보 수집 장치를 달고 하늘을 난다. 그들을 조종하는 건 함 내의 리모트 콕핏에 앉은 파일럿이었다.

드론과 콕핏의 관계는 꼭 에스퍼와 가이드와 비슷했다. 꼭 작전 후 반드시 상태 체크와 정비를 거쳐야 한다는 점도 같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드론은 얌전히 점검받을 뿐, 정비병을 향해서 좆을 세우지 않는 점일까.

기계적 소음은 있어도 인기척은 드문 격납고에도 수병과 장교가 드문드문 들락거렸다. 그들은 보관 드론의 상태를 살폈다. 여차하면 출격시켜야 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드론과는 제법 떨어진 구석에 리모트 콕핏과 비슷한 모양새를 한 이동형 인큐베이터와 각종 전자 장비들이 있었다.

“동조율 올려.”

“네.”

“헬멧 쓰고.”

심 박사는 윤조를 보지도 않고 명령했다. 곁에 선 임성준이 헬멧을 내밀었다. 심 박사 선실에 두고 온 것을 가져온 것이었다.

뒤이어 임성준이 점프했다가 나타났을 땐 검은 원피스를 입은 장세인 대위가 도착했다. 꼭 장례식장에서나 볼 법한 드레스는 전투 직전의 현 상황에서는 너무 이질적이었다. 어떤 점에선 불길하기도 했다.

장세인을 보고 최정이 혀를 찼다.

“옷이 그게 뭐야. 훈련 중에는 군복 입기로 했잖아.”

“귀항한다고 해서 갈아입었어요.”

그 잠깐을 못 참고 군복을 벗어 던지고 드레스로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지금 옷 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수영복만 아니면 됐지. 아니 수영복이라도 시발, 자기 일만 잘하면 그만이지.”

최정이 잔소리를 퍼부으려 할 때 심 박사가 입을 열었다. 그는 아직도 알로하 셔츠 차림이었다.

“그보다는 개망나니는 왜 같이 안 와?”

“화장실이요. 좀 걸릴 겁니다.”

윤조의 대답에 심 박사는 혀를 찼다.

“하여간 청개구리 같은 개망나니라니까. 게이트가 터졌는데 미적미적 똥이나 싸고. 시발놈.”

똥 싸는 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자위하는 중이라고 정정하기도 어려웠다.

짜증을 내면서도 심 박사는 손을 빠르게 움직였다. 패드와 패널을 조작하여 필요 장비를 윤조의 위성과 연결했다. 그러는 사이에 최정은 모니터를 보면서 빠르게 전술 지도를 짰다.

장세인은 최정에게서 아이돌이 무대에서 쓰는 것 같은 머리띠형 장비를 받아들었다. 그걸 쓴 장세인은 임성준이 항모 어디선가 뜯어온 간이 침상에 누웠다.

깍지를 낀 양손을 배 위에 얹은 장세인은 꼭 관에 누운 시체 같았다. 치마를 입은 터라 임성준은 군용 모포를 허리 아래로 덮어 주었다. 모든 행동이 자연스러웠다.

“장 대위. 준비되었으면 능력 전개해.”

-네.

최정이 내린 지시에 돌아온 대답은 장세인의 육성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장비를 통한 기계음도 아니었다. 놀랍게도 윤조의 뇌 속에 직접 들렸다.

“어?”

“김 준위는 처음이지?”

최정이 목적어를 빼고 질문했다. 하지만 윤조는 바로 알아들었다.

“네.”

“처음에는 이상해도 금방 익숙해질 거야. 이심전심 부스터라고 생각하면 돼. 장 대위가 있는 동안 모든 통신은 장 대위가 대신할 거야. 강 소령은 장 대위 능력 범위 밖이라, 김 준위가 장 대위와 텔레파시 주고받으면서 강 소령 서포트 하면 돼.”

“생각하는 건 전부 전달됩니까?”

“기본적으로 그래.”

-사생활 걱정은 안 해도 돼요. 작전 후에는 자체적으로 기억을 정리하거든. 안 그러면 내가 버틸 수가 없어요. 솔직히 남의 머리 들여다보는 일은 너무 추잡…… 야! 임성준! 강수혁이 똥 싸는 상상하지 마! 더럽게! 그쪽 사고(思考) 차단할 거야.

마지막 일갈에 모든 걱정과 의문이 가셨다.

사람의 뇌라는 건 정말로 필요하고 중요한 생각만 하는 건 아니었다.

전투 중에도 발가락은 가렵고, 코는 파고 싶어진다. 그걸 장세인은 일일이 다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성격이 이상해질 법도 하다.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그런데 내 성격 이상하다고 누가 말했어요? 알려 줘요, 전두엽 갈아 버리게.

“어, 그게.”

-농담이에요. 나 이상한 거 맞아요. 남의 생각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싹 다 미치거나 이상하거나. 그런데 나연 언니, 그 일 그만 생각해요. 너무 끔찍해. 바로 차단합니다.

“안 그래도 머릿속에서 안 지워져서 미칠 것 같았는데. 고맙다, 야.”

심 박사는 도리어 감사했다.

장세인은 불편한 의식의 흐름은 곧바로 끊어 버리는 듯했다. 그러면서 기억 자체를 없애 버리는 걸까.

-아니에요. 기억 없애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워요. 그냥 기억 해리 일부분에 차폐 장치를 하는 거랄까. 그것도 임시라 24시간 정도 지나면 풀려요. 김 준위는 위성 AI라는 기본 방화벽이 있어서 그런지 개인 생각이 마구 들어오진 않네요. 그러니까 내게 할 말이 있으면 속으로 말을 걸어요.

평소 과묵하다고 알려진 에스퍼는 막상 텔레파시를 사용하자 제법 수다스러웠다. 다들 그러려니 하는 걸 보니 원래 이런 듯했다.

윤조가 주의 사항을 듣는 동안 최정이 세팅을 마쳤다. 그가 입체 투사기를 작동시켰다. 무거운 회색 격납고 중간에 형광색이 섞인 입체 영상이 떴다.

북극광처럼 한(寒)색 형광색이 감도는 소용돌이 주변으로 드론이 떴다.

빛나는 태풍의 눈 같은 게이트는 실로 거대해서, 날개 하나의 길이가 10m가 넘는 정찰용 드론이 갓 태어난 초파리처럼 보였다. 주변으로 공격용 드론 부대가 접근했다.

“중급 F형. 곧 열린다.”

최정이 비장하게 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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