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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그랑주 포인트 (73)화 (73/256)

67화

페널티를 던지자마자 윤조는 임성준에게 함교로 이동하여 즉시 강수혁을 데리고 귀환하라고 요청했다.

임성준은 요청대로 깔린 이율희 함장을 구조하고 들이닥치는 해군을 피해 강수혁을 이끌고 심 박사의 선실로 대피했다. 거기까지 대략 1분 남짓 걸렸다.

함교 습격으로 인해 중무장한 해군들이 선실을 찾아왔다. 당연한 대응이었다. 마침 그때 정신을 차린 강수혁이 페널티로 저지당한 분노를 발산했다. 대상은 하필 무장한 채로 달려온 해군 쪽이었다.

이쪽으로 겨누어진 자동 화기가 갑자기 귀신 들린 듯 저절로 앞으로 확 당겨졌다. 겨냥하던 해군이 총을 놓지 못하고 넘어지는 사이, 공중에 뜬 총구는 각자의 주인 이마를 향했다.

“누구한테 총을 내밀어? 뒈질래?”

활성화된 트리플 S급을 처음 본 해군은 금방 기가 질렸다.

“안 돼. 강 소령, 참아. 제발 참자, 응?”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최정 대령이 막아섰다. 여기서 더 하면 진짜 함대 전멸이라며 이런 일로 서로 목숨을 걸 필요는 없지 않냐고 일단 최정이 쓰러진 해군을 일으켜 밖으로 내몰았다. 그리고 등 뒤로 문을 닫고 선실을 지켜선 채 서로 간의 시선을 차단했다.

총은 이내 바닥으로 다 내려앉았다. 그걸 임성준이 빠르게 밖으로 이동시켰다. 어디냐는 심박사 물음에 함상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일단 앉자.”

심 박사의 권유에 윤조가 손목을 잡아 이끌자 강수혁은 마지 못해 의자에 주저앉았다. 윤조는 그런 그의 곁에 바싹 붙어 앉았다. 그러자 강수혁이 어물쩍 윤조의 손을 잡았다.

잠시 후 최정이 통신했다.

-해군 말이 장선욱 중장님이 우리 수송기 편으로 급하게 날아오고 있대. 도착까지 90분 정도 걸릴 거야. 그때까지만 스탠바이해. 나는 함상으로 간다.

“1시간 반이나? 꼰대 느려 터져서는.”

강수혁은 내내 화가 난 상태였다.

“여기가 태평양 한가운데인데 90분이면 아주 어제부터 출발했겠다야. 꼰대치곤 부리나케 뛰어오는 거야.”

심 박사가 농담조로 맞받아쳤다. 하지만 평소처럼 강수혁을 마구 긁지는 않았다. 그만큼 강수혁의 상태가 불안정했다.

에스퍼-가이드답게 즉석 합동 작전을 잘하고서 끝마무리가 좋지 않았다. 칭찬받아도 모자란 판에 페널티를 받았으니 얼마나 화가 났겠는가. 물론 이율희 중장을 지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판단이었다.

-경고 : 분노 상승. 대상 에스퍼 : 강수혁

-경고 : 성욕 급상승. 대상 에스퍼 : 강수혁

-경고 : 가학 급상승. 대상 에스퍼 : 강수혁

AI의 경고가 지속적으로 이어져서 윤조의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결국 인 이어를 통한 AI 음성 알림을 껐다.

현재 강수혁의 뇌파 패턴으로만 따지자면 윤조의 허리가 거센 추삽질에 분질러져도 벌써 분질러졌을 상태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강수혁은 난폭한 감정 상태와 다르게 의자에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곁에 앉은 윤조의 손을 꼭 잡고 주무르는 것 말고는 말도 거의 삼갔다.

그래서 더욱 불안했다. 강수혁을 제외한 나머지 셋은 수시로 눈빛을 교환했다.

능력 사용 직후 가벼운 페널티까지 맞은 불안정한 에스퍼를 진정시키는 효과적인 방법은 ‘그것’뿐이지만, 당장은 T.P.O.가 맞지 않았다.

밖에는 무장한 해군이 우르르 몰려왔고 선실에는 심 박사와 임성준이 있었다. 특히 후자 둘은 능력 발휘 후에 강수혁이 어떤 상태에 빠지는지 뻔히 알았다. 심 박사는 진지하게 윤조와 강수혁을 주시했고 임성준은 있어선 안 될 자리에 있는 사람이 되어 찔끔거렸다.

“소용없겠지만 진정제라도 놔 줄까?”

“됐어. 참을 수 있어.”

강수혁은 심 박사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래. 참아 봐. 참는 것도 버릇 들어야 해.”

내내 윤조의 손을 잡고 있던 수혁은 갑자기 심 박사의 침대로 향했다. 여전히 손을 붙잡고 있는 터라 윤조는 저절로 딸려 갔다.

“참는다면서요?”

“참을 거야.”

“저, 제가 나갈까요?”

임성준이 먼저 사라지겠다고 제안했다.

-안 돼.

밖에 있던 최정이 반대했다. 일이 완전히 마무리되기 전에 서로 오픈 채널을 유지한 탓에 최정 또한 내부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장 중장님 도착하기 전에 괜히 돌아다니다가 더 곤란해지는 수가 있어. 다들 거기 있어. 장 대위도 제 위치에서 대기 중이야.

최정의 반대에 임성준은 어쩔 줄을 모르고 서성였다.

“이리 와, 김윤조.”

아무리 작전 후 성관계가 당연하다지만, 심 박사에 임성준까지 있는 곳에서는 절대로 못 한다.

기겁한 윤조가 그를 기절시키기 위해서 페널티를 한 번 더 준비하는 동안, 강수혁은 윤조를 침대 가장자리에 앉혔다.

“야, 강수혁.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심 박사마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할 때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윤조는 상대가 직접적으로 달려들기 전까지 대기했다.

의외로 강수혁은 윤조를 쓰러트리는 대신 도리어 제가 침대 위에 넘어졌다. 정확하게는 윤조 허벅지를 베고 누웠다. 심지어 고개 방향은 윤조의 배 쪽이었다.

“참는다고 계속 얘기하잖아. 이 빌어먹을 새끼들아. 사람 말을 좀 믿어.”

돌아누운 강수혁이 짜증을 냈다.

“그리고 좋은 말로 할 때 페널티 넣어 둬라, 김윤조.”

“예.”

팔짱을 끼고 돌아누운 채로 씩씩대는 강수혁에게 페널티를 날릴 이유는 없었다. 윤조는 즉시 준비하던 페널티를 취소했다.

“피곤하면 말로 하지. 자식. 사람 놀라게 하고 있어.”

심 박사가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툴툴댔다. 임성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하필 제 쪽으로 얼굴을 대고 누운 자세가 다소 머쓱하긴 했다. 하지만 가까운 동료 두 분을 모시고 절찬리에 라이브 섹스 쇼를 벌이는 것보다야 백번 낫다.

윤조는 고집스럽게 눈을 감고 숨을 고르는 에스퍼를 토닥였다.

“90분 동안 우리도 쉬자. 임 중위, 거기 구석에 있는 책상 의자 쓰고 나는 이쪽 소파 쓸게.”

“네. 대령님.”

상황이 정리되자 심 박사도 임성준도 내심 긴장을 풀면서 각자 구석으로 구겨졌다.

사실 전투 후에 피곤한 건 전부 마찬가지였다. 여태까지 강수혁의 불안정한 상태 때문에 쉬지 못했던 그들은 이내 소파와 의자에 몸을 말고 눈을 붙였다.

윤조만이 눈을 뜨고 강수혁의 안색을 살폈다.

망나니 에스퍼의 잘생긴 이마가 일그러져 있었다. 주름진 미간과 콧등에 식은땀도 맺혔다. 손바닥으로 맺힌 이슬을 닦아 내자 강수혁이 눈을 감은 채로 꾹 다물고 있던 입을 살짝 움직였다.

“머리 아파. 페널티 후유증 같아.”

조금 따끔할 정도의 짧은 페널티였는데 강수혁이 괜히 엄살을 부렸다. 그러나 작전 후의 각종 여파를 버티고 있는 사람을 상대로 객관적인 사실을 따질 상황은 아니었다.

“많이 아픕니까?”

“뇌파 패턴 보면 알잖아.”

혹시나 해서 정말로 검토해 보았다. 하지만 어디에도 고통의 흔적 따윈 없었다. 불쾌감과 짜증에 성욕이 뒤범벅되어 있을 뿐이었다.

아프기보다는 빈정이 상한 거다. 페널티 때문에. 제 뜻을 저지당해서. 그리고 뒤이은 귀찮은 상황 덕분에 제 가이드를 충분히 즐기지 못해서.

유치한 투정에 뻔한 수작인 걸 알면서도 윤조는 별다른 타박 없이 순순히 받아 주었다.

“그러네요. 많이 아프겠습니다. 느껴집니다.”

별 뜻 없이 추임새처럼 속삭였다. 이쪽이 엄살을 전적으로 수용하자 도리어 강수혁이 눈을 뜨고 윤조를 올려다봤다.

“너, 그 아까 그랬던 것처럼 계속…….”

“아니요. 지금은 평소 상태입니다. 페널티가 예상보다 아픈 것 같아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강수혁은 윤조의 말이 진심인지 궁금해했다.

윤조가 그를 믿지 못하는 만큼 강수혁도 윤조를 신뢰하지 못했다. 거짓이면 뭐 어떤가. 망나니가 모처럼 애써서 인간답게 인내하는데 듣고 싶은 말을 들려주어 격려하는 것도 좋다.

“죄송합니다. 소령님 막으려면 그 방법밖에는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해군 중장을 해치는 건 큰일이라서요.”

“……사과까지 할 일은 아니야. 네가 말리지 않았으면 정말로 귀찮게 되었을 거니까. 평소만큼 아프지도 않았고.”

다소 건조한 톤의 대꾸가 돌아왔다. 뇌파에 의문과 불쾌가 동시에 뜨는 걸 보니 이 상황이 어색한 모양이었다.

“긴장도가 너무 높습니다. 수면을 통해서 긴장도를 낮추세요.”

“너는 안 쉬어?”

“가이드는 에스퍼의 안정이 우선입니다. 그리고 별로 피곤하지 않습니다. 지켜 드릴 테니 편안히 쉬십시오.”

“하.”

누운 사람이 코웃음 쳤다. 연두부 주제에 누가 누굴 지키냐고 따질 줄 알았다. 하지만 강수혁은 잠잠했다.

-새로운 감정 패턴이 감지됩니다. 추정 : 즐거움

순간 윤조는 놀랐다. 강수혁의 감정을 채집한 지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즐거움’의 발견은 처음이었다.

물론 즐거울 때도 있을 거다. 한집살이를 시작한 후에 강수혁이 웃는 모습도 자주 봤다. 하지만 그때는 약속에 따라 감정 동조를 최소한으로만 유지했다. 막연한 기분과 상대의 존재를 느낄 뿐, 명확한 패턴을 채집하진 않는다.

전투 직후에 페널티를 맞고 그 ‘절차’도 밟지 않았는데 즐겁다니. 덩달아 긴장도와 함께 감정 패턴 또한 점점 완만해졌다. 아직 성욕 패턴이 활발하긴 해도 다른 부정적 감정은 확실히 잦아드는 중이었다.

‘설마 섹스 없이도 안정이 가능한 건가?’

놀랍다. 이건 어떻게 봐도 획기적인 변화였다. 당장 심 박사에게 보고하고 싶었다. 하지만 제 허벅지를 베고 숨을 고르는 강수혁을 방해하기 싫은 마음이 더 컸다.

윤조는 혼자서 조용히 그의 뇌파 패턴을 꼼꼼히 기록했다. 완만하게 흐르는 곡선이 꼭 오케스트라 선율을 그린 듯했다. 여태껏 봤던 뇌파 중에 가장 평화롭고 조화로운 흐름이었다.

‘뇌파마저 잘생기면 어쩌자는 거야.’

제 무릎 위의 에스퍼를 바라보는 가이드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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