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67)화 (67/256)

61화

07. 태평양 연합 훈련

쏴―.

칼날 같은 뱃머리가 대양의 물살을 갈랐다. 바람이 부는지라 잔잔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막대한 크기를 자랑하는 항공모함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았다.

실상 태풍이 몰아치는 바다에서도 거뜬하게 버티도록 설계되어 있다. 해상 게이트 소멸 및 해상 착륙 외계 지성체를 소탕하기 위한 에스퍼 수송 및 보급을 주 임무로 건조된 함선에는 당연한 기능이었다.

게이트 발생 이후로 명맥이 끊긴 올림픽을 다시 열어도 될 것 같은 규모의 광활한 갑판 위에서 최정은 기지개를 쭉 켰다.

“넓긴 넓다. 처음 탄 사람은 미아가 된다더니. 그럴 법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갑판 위로 나오기 위해서 20분이나 함 내를 뱅뱅 돌았다. 그와 함께 갑판을 찾던 윤조는 제 곁에 선 에스퍼가 길을 왜 찾고 있냐고, 그냥 갑판을 ‘뚫고’ 나가자고 우기는 것을 간신히 말렸다. 도중에 해군 병사에게 안내를 부탁하지 않았다면, 그래서 바로 갑판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면 이 신형 항모의 한중간엔 시원한 바람 구멍이 날 뻔했다.

“윗선에선 이번 훈련에 기대가 큰가 보다. 뽀대나게 제주도를 척 내주고 말이야. 나는 최대 독도 정도 기대했거든.”

“저도 그랬습니다.”

최정의 말에 윤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국내 항모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강습상륙함 이름을 독도로 붙인 이후로 헬기 캐리어를 비롯하여 추후 진수하는 항모에는 섬 이름을 붙이는 것이 관습이 되었다. 단순히 섬 크기 아니라 명성과 지리적 중요도를 따져서 선정했는데, 현재 최정 일행이 탄 항모는 크기나 거느린 구축함과 호위함 등 전대 규모를 포함하여 국내 최대 도서(島嶼)이자 군사적‧지정학적 요충지인 ‘제주도’라는 이름을 계승하기에 손색이 없었다.

거대한 고래와 그를 따르는 작은 돌고래 같은 모습인 제주도 항모 전대는 현재 훈련 전 중간 정착지인 호주 시드니항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거기서 중간 보급을 한 후 호주의 에스퍼 항모를 비롯, 시드니에 모인 다른 동아시아 함대와 함께 피지로 향할 예정이었다. 북미와 남미는 하와이에서 모여 피지로 오기로 했다.

“크기만 크지, 느려 터졌잖아.”

어마어마한 항모 전대를 보고서도 어떤 감명도 받지 못하는 인물이 툴툴댔다.

“날아가면 2시간도 안 돼서 도착할 텐데.”

“소령님만 달랑 가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합동 훈련인데요.”

윤조가 반문했다.

“이런 거지 같은 배를 타고 달팽이 속도로 가느니 미리 가서 호텔에서 휴양하면 되지. 시드니 구경도 하고.”

강수혁은 훈련이 아니라 놀러 가는 줄 안다. 하지만 그런 원론적인 얘기를 해 봤자 통하지 않음을 알기에, 실용적인 면에서 반박했다.

“트리플 S급이 단독으로 나타나면 호주가 잘도 입국시켜 주겠습니다.”

“가이드를 달고 가는데?”

“그럼 더 안 되죠. 에스퍼를 동원해 저를 납치 및 협박해서 소령님을 조종할 거란 생각은 안 해 보십니까?”

“흥. 그래 보라지, 그러는 순간 시드니는 지도에서 사라져.”

“전쟁하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요. 평화 목적의 훈련입니다. 훈련.”

윤조는 머리를 짚었다. 멍청한 망나니가 아무리 사전 정보 숙지를 안 했다지만, 국군이라면 당연히 알 법한 에스퍼 전용 함대의 기본 임무도 간과하고 있다.

“이 항모 전대는 에스퍼 호위도 겸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소령님의 감각 인지 능력이 뛰어나다 하더라도 각 구축함과 호위함에 배치된 B급 에스퍼 감각 전체를 대신하진 못합니다.”

“위성 있잖아.”

“전파 차단 설비라는 게 있거든요. 그 때문에 이 배에 특수 전파 증폭 장치 및 그 외 전파 교란 장비를 갖추고 있습니다. 거기다가 이동형 인큐베이터도 있고요. 한마디로 얘는 지금 움직이는 ‘특작부’란 말입니다.”

“그래, 니 똥 굵다. 이 새끼야.”

유치한 반박과 함께 강수혁은 혼자서 공중으로 휙 날아올랐다.

바지 주머니에 주먹을 찔러넣은 채로 후방 45도 각도로 멀어지는 모습이 투명한 실에 매달려 상승하는 인간 모양의 연(鳶) 같았다.

“출항 직전만 해도 멀쩡하더니, 막상 배를 타고선 왜 저 지랄이야.”

최정이 윤조를 향해 물었다.

“마음대로 안 되거든요. 지금.”

“뭐가? 설마 정말로 혼자 시드니 호텔에서 팽팽 놀겠다는 거? 배 타고 오라는 건 각국 지침이고. 단독 비행 에스퍼는 국제법상 요격 대상이야. 상식도 없어, 저 새끼는?”

“그러게나 말입니다.”

인간 사이즈인 에스퍼가 맨몸으로 비행하면 현재 기술의 레이더로서는 제때 감지하지 못한다. 발견하더라도 이미 늦었거나 대공망이 뚫린 후다. S급에 이르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입국해서 테러를 벌이고 출국할 수 있다.

실제로 에스퍼가 처음 발생하고 20년간은 에스퍼로 인한 각종 테러와 국제 분쟁이 끊이질 않았다. 에스퍼에 대한 통제 수단이 마련된 후에도 에스퍼를 두고 사이코패스라느니, 미친 괴물이라느니 하는 편견에서 벗어나기까지 오래 걸렸다. 덕분에 각국에서는 타국의 에스퍼, 그것도 재생력이나 방사능 저항력을 제외하곤 일반인과 별반 다를 바가 없는 C나 D급에 대해서도 입국 거절하는 경우가 빈번했다.

혹 에스퍼임을 속이고 입국 시도하다가 적발되면 그때부터는 국제 분쟁이다. 각국 주요 국제 공항과 항구에선 에스퍼를 감지하는 B급 이상의 정신계 에스퍼가 세관 공무원으로 근무 중이다.

이번에 훈련 장소로 피지가 낙점된 이유도 이와 관련 있었다.

피지는 작은 국가이며 동시에 정치 혼란이 빈번하여 군 조직인 상대적으로 약했다. 거기다가 22년 전 남태평양에 발생했던 G형 게이트의 여파에서 아직도 헤어나오지 못했다. 사실상 조국 수호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대규모 지진 후에 여진이 이어지듯, G형 게이트 발발 이후에 중소 규모의 게이트가 간헐적으로 발생했다. 주변 바다가 심각하게 오염되어 피지의 주 산업인 관광과 수산업도 망했다.

그래서 피지 입장에서는 아무리 위험한 에스퍼라도 온다면 대환영이다. 게이트가 발생하기라도 하면 호승심이 강한 에스퍼들은 지나가던 외계 괴물을 한 마리라도 없애 주니 말이었다.

그런 피지를 태평양 연합에서 에스퍼 훈련지로 이용했다. 대신 사용료를 비롯하여 방사능 제염과 함께 각종 혜택을 주기 때문에 피지에서는 대규모 에스퍼 전대를 환영하는 바였다.

“목적지는 피지라도 중간 정착지는 호주 시드니라고 이미 말했잖아. 시드니 입항해도 다른 에스퍼랑 달리 강수혁은 호주 입국 못 해. 당연히 공해상에서 대기지. 그 이유도 겸해서 제주도 끌고 온 거잖아. 시드니는 망원경으로 보면서 근처 바다에서 물놀이나 할 신세인데 호텔은 무슨.”

“그걸 출발하고 알았거든요. 국제 합동 훈련이라도 S급은 입국 불가에 공해상 대기라는 걸요. 첫 해외여행이라고 되게 신났다가 그걸 알려 줬더니 이후로 저러고 있어요. 다른 병사는 다 입국되고 하물며 임성준 중위도 특별 입국 허가가 떨어졌는데 왜 자기만 안 되느냐고 자꾸 우기고 있어요. 죽어도 시드니 볼 거라고.”

“어휴. 망할 새끼. 같은 S급이라도 저랑 임 중위가 같아? 어쩐지 우주에서도 눈깔 똑바로 뜨는 새끼가 배 타기 전부터 신나게 선글라스 끼고 자빠졌더라니.”

최정은 강수혁이 사라진 쪽을 향해 혀를 찼다.

“그래서 분풀이 하러 임성준 조지러 간 거야, 지금?”

“아마도요?”

대(對) G형 게이트 훈련은 워낙 대규모라 일개국이 감당할 수준이 아니었다.

임성준은 서울 사건 때 아직 미성년자라 입대 전이었다. 따라서 G형 게이트 훈련의 필요성이 거론되어서 이번 훈련에 참여시켰다.

원래는 제주도함 선실을 배정받았는데 승선 출항한 이후로 어쩐지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알고 보니 함대의 다른 소형 함선으로 피신 간 것이었다. 강수혁과 마찬가지로 입국이 거절된 장세인과 함께.

“아니 강 소령은 갑자기 임 중위를 왜 저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이야? 예전에는 발치에 채는 돌멩이 취급도 안 할 만큼 무시하더니. 장 대위도 갑자기 거리를 두고 말이야.”

“글쎄요.”

임성준이 도망간 이유는 몰라도 장세인이 피신한 이유는 어렴풋이 알 듯했다.

출항하기 전 승선 준비를 하던 과정에서 강수혁이 장세인과 뭔가 대화를 나눴다. 원래 대로라면 장세인은 근처에서 생각만 해도 의사 전달이 되는 텔레파시 능력자이기에 대화하는 줄도 몰랐겠지만, 강수혁은 척추에 붙은 강력한 장치로 인해 텔레파시가 원천 차단되기에 굳이 일반 사람처럼 입으로 말을 해야 했다. 덕분에 윤조가 두 사람이 말하는 드문 광경을 볼 수 있었다.

거리가 있어서 제대로 듣진 못했다. 그렇다고 참견하기도 그랬다. 강수혁의 표정은 약간 구겨진 편이었고 장세인은 대놓고 불편해했다. 동료끼리 안부를 묻고 서로 협조하여 훈련을 잘 마쳐 보자고 응원하는 장면은 절대로 아니었다.

예민하기가 미모사 버금가는 S급끼리 혹여 분쟁이라도 생기면 큰일이기에 윤조는 당시 페어링을 통해 강수혁의 감정 상태를 확인했다.

‘분노, 짜증, 거기다가 성욕이었지.’

분노, 짜증은 원래 기본값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성욕이라니? 그것도 장세인 대위를 향해서? 기가 찼다.

가랑이에 뇌가 저당 잡힌 개망나니 새끼가 가이드인 윤조를 밤낮으로 괴롭히다 못해 이젠 같은 에스퍼까지 괴롭히려고 드나 싶은 순간 윤조는 전에 나눴던 대화를 번뜩 떠올렸다.

망나니는 나가면 이성이 줄을 설 거라는 말에 은근히 웃었다.

‘그런데 하필 그 이성이 같은 특작부 내 S급일 이유가 뭐야?’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사람의 정력을 나머지 한 방울까지 쪽쪽 빨아먹을 땐 언제고 말이 나오기 무섭게 주변부터 탐색하는 건 뭐란 말인가.

심지어 제대로 찾아볼 노력도 하지 않고 그냥 치마 두르면 다 덤비고 보는 멍충이처럼 장세인 대위에게 저러는 꼴을 보니 한심하기까지 했다. 장세인은 딱 봐도 강수혁에 대한 비호감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었다.

‘딸랑거렸기로서니 정말로 믿는 거야?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자기를 다 받아 줄 줄 아나?’

윤조는 비웃음을 금치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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