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63)화 (63/256)

58화

“심나연 박사, 미쳤어?”

수혁은 인상을 썼다.

“조강지처 같은 역겨운 말 좀 쓰지 마. 그쪽이 그러니까 그 새끼도 선을 모르고 혓바닥을 놀리잖아.”

“이번 싸움은 진짜인가 보지?”

심 박사가 다시 팔짱을 꼈다. 그에 수혁은 심드렁하게 웃었다.

“진짜, 가짜가 어디 있어. 어차피 서로 좋아서 페어링한 것도 아니고. 심 박사, 당신이 임의로 정한 거잖아.”

“김윤조는 내가 정한 게 맞는데. 난 좀 더 협조적이고 안정적인 에스퍼를 원했어. 김윤조가 너 아니면 안 된다고 우기지만 않았어도 말이야.”

그건 처음 듣는 얘기였다. 수혁은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였다.

“김윤조가?”

“그래. 김윤조가 너를 원했어.”

잠깐 입꼬리가 풀릴 뻔했다. 멍청하게도 기뻐하려던 수혁은 금방 그 개새끼의 진짜 꿍꿍이를 떠올렸다.

“내 능력 때문이겠지. 대단한 복수를 꿈꾸시는 모양이니까.”

김윤조가 자신을 선택해도 강수혁이 아니라 트리플 S급 에스퍼를 택한 건데 착각할 뻔했다. 다른 강력한 에스퍼가 있으면 언제든 갈아탈 놈이다. 그런 것에 괜히 의미를 부여하고 그래 봤자 자신만 한심해진다.

‘지금 내가 뭘 본 거야? 조건 따져서 픽한 거라고 삐진 거야 지금?’

심나연은 기가 막혔다.

지금 이것 미친 것들이 바쁜 제 연구실에 연달아 들이닥쳐서 무슨 등신 퍼레이드를 벌인단 말인가.

‘무슨 게이 청춘 드라마 찍나, 이 또라이 새끼들.’

김윤조가 마음을 고쳐먹으니, 이번엔 강수혁 쪽에서 딴마음이 생겼다.

“이건 무슨 천일의 앤도 아니고.”

“뭐?”

“그런 게 있어.”

둘의 감정싸움에는 되도록 끼지 않는 편이 좋다.

워낙 참기름 바른 럭비공 같은 놈들이라 옆에서 밀어붙였다가 엉뚱한 사달이 날 수도 있다. 불과 어제만 해도 김윤조가 강수혁을 공격하지 않았나. 물론 강수혁이 원인 제공을 하긴 했지만.

신체는 점점 가까워지는데 감정은 점점 멀어진다. 이런 관계는 사소한 계기로 파국으로 치닫기 일쑤다.

군대라는 조직은 소속된 인간을 필요성과 중요성으로 판단한다. 그 과정에서 인간성은 말살되기 마련이다.

강수혁이라는 막강한 무기의 폭주를 막기 위해서 자폭 장치를 고안했다. 무시로 명령을 무시하고 항명하기 일쑤인 놈을 제어하기 위해서 가이드 프로젝트도 추진했다. 한마디로 말해 가이드는 트리플 S급 에스퍼를 위한 보조적인 수단에 불과하다.

만약 강수혁과 김윤조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달아서 둘 중 하나가 폐기되어야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상부의 선택은 불 보듯 뻔했다.

‘김윤조를 폐기하겠지.’

심 박사는 그런 결과를 원치 않았다.

특수 위성 AI와 김윤조의 결합은 그 어떤 시스템보다 강력하며 안정적이었다. 위기에 처한 김윤조의 강력한 의지에 자율 학습 중인 AI가 반응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이건 창조주인 심 박사 본인이 의도한 바 이상이었다. 어쩌면 가이드 김윤조는 심나연 일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걸작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양산화를 한다고 하더라도 추후 제작되는 가이드는 김윤조의 수준을 못 따라갈 확률이 높다. 게다가 누구보다 특수하고 강한 가이드를 잃고 싶지 않았다.

불붙은 시한폭탄 같은 두 놈이 맞붙어서 정말로 거한 사고를 칠까 솔직히 우려스러웠다.

아까 강수혁 편을 들면서 김윤조에게 그만 나대라고 잔소리를 한 것도 비슷한 맥락이었다. 군부의 저울추는 강수혁으로 완연하게 기울어져 있다. 여기서 김윤조가 계속 강수혁과 마찰을 빚어 봐야 김윤조 본인에게 불리하다.

이쯤에서 완충 장치를 마련하는 편도 괜찮긴 하다.

강수혁이 진심으로 김윤조를 제거하려 들기 전에 어느 정도 관심을 분산하는 편이 장기적으로 안전하다.

‘김윤조, 타이밍이 나쁘다. 근데 너도 진지하게 강수혁이랑 잘해 보려는 건 아니잖아.’

심나연은 속으로 미안함을 삼켰다. 그리고 강수혁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좋아. 대신 네가 내게 협조할 게 있어.”

“어떤 협조?”

“여러 가지 많은데. 일단 오늘은 피부터 내놔.”

심나연은 급하게 채혈 기구부터 준비했다.

사실 채혈은 필요 없다. 김윤조를 제작할 때 사용했던 완벽한 생체 데이터가 있다. 추가 제작을 핑계로 귀한 트리플 S급의 생체 샘플을 뜯어낼 심산이었다. 일전에 장선욱 중장이 강수혁 것이라며 직접 넘겨준 데이터에 관한 의문을 완벽하게 풀 기회였다.

강수혁은 미친놈 보듯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순순히 소매를 걷었다.

거대한 주사기를 신나게 꽂은 건 좋았다. 그런데 피스톤을 당기기 힘들었다. 바늘이 막혔다. 당연히 피도 나오지 않았다.

“왜 이래? 불량인가.”

강수혁이 고개를 저었다.

“바늘이 꽂힌 채로 즉시 재생해서 바늘구멍이 막힌 거야.”

“뭐라고? 그러고도 네가 사람이냐? 그 짧은 사이에 재생하게?”

심나연은 혀를 찼다. 재생력이 주삿바늘도 삼켜 버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예전엔 이 정도는 아니었다. 아이 땐 다쳐서 밴드를 붙이고 다닌 적도 있었다. 캐릭터 밴드 한 통을 다 쓰기도 전에 그럴 일이 없어지긴 했지만. 그때 쓰다 남은 밴드가 아직도 심나연의 책상 서랍에 들어 있다.

성장하면서 능력이 더 발달하는 케이스는 흔하긴 하다. 그러나 재생이 주요 능력인 에스퍼라도 재생력이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없다. 심지어 강수혁의 주력은 염력이 아닌가.

에스퍼라는 허울 좋은 핑계로 퉁치기엔 너무 나갔다. 오히려 에스퍼를 가까이에서 연구하는 심나연이 이기에 도리어 비상식적으로 느껴졌다.

“손 떼 봐.”

심나연을 밀어낸 강수혁은 팔에 꽂힌 주사를 뽑아냈다. 저렇게 무식하게 뽑으면 당연히 혈관이 터지고 피가 솟을 텐데. 놈의 팔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멀쩡했다.

“체세포도 필요해?”

“있으면 좋지.”

“바늘 안에 들어 있어.”

강수혁이 빼낸 주사기를 건넸다.

심나연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바늘 끝을 관찰했다. 정말로 바늘 안에 흰 살점이 들어 있었다. 아주 적은 양이긴 해도 살을 생으로 뜯어냈는데 팔에 아무런 상처도 나지 않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너, 인간 맞냐?”

떨떠름하게 묻는 말에 강수혁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예전엔 그런 줄 알았는데 최근엔 잘 모르겠달까. 이참에 알아보고 나한테도 좀 알려 주든가.”

얼씨구. 본인이 인간 꼴이 아닌 줄은 안다. 심나연은 못마땅함을 감추지 못했다.

“일단 이걸로는 택도 없어. 혈액도 없고.”

“그래?”

주변을 두리번 돌아보던 강수혁은 이내 자리를 비운 연구원 책상으로 향했다. 마침 거기엔 연구원이 사용하던 각종 비품이 있었다. 그중에서 강수혁은 일회용 메스를 집어 들었다.

심나연은 저도 모르게 주사기를 칼처럼 쳐들었다. 강수혁이 메스를 휘두를 때를 대비한 거지만, 솔직히 의미 없다. 그래도 사람의 본능이라는 것이 의미 없는 반항이라도 하게 만든다.

“뭐 해? 피 받을 준비 안 하고.”

“뭐?”

“혈액 샘플 달라며.”

강수혁은 미간을 구기면서 메스 끝으로 제 팔뚝을 가리켰다. 그제야 상대의 의도를 알아챈 심나연은 허둥지둥 비품 캐비닛을 열었다. 비커와 실험용 접시를 들고 가늠하다 비커를 집어 들었다. 그것도 초대형 사이즈로.

“아주 국그릇을 들고 오지 그래?”

거대한 비커를 보고 강수혁이 어이가 없는지 한마디 했다.

“기왕 주는 김에 많이 줘.”

심나연이 비커를 대자 강수혁이 그 위에 제 팔을 올렸다. 그러곤 사정없이 메스를 그었다.

그 미친 광경을 본 심나연은 전신에 소름이 쭉 돋았다. 피가 팍 터지리라 상상했는데.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아까와 달리 핏기가 약간 비치나 싶더니 금방 사라졌다.

“에이 씨.”

짧게 신경질을 낸 강수혁이 마구잡이로 제 팔뚝을 그어 댔다. 양손으로 비커를 받치고 있던 심나연은 제가 뭘 보고 있나 했다. 이게 무슨 생 라이브 슬래셔 쇼인지.

“으어.”

심나연은 기겁했다. 그 와중에 더욱 무서운 건 저렇게 미친 듯이 그어대는 데도 핏방울 하나 받아내기 힘들다는 점이었다. 뼈에 닿을 만큼 메스가 깊게 들어갔을 때 딱 한 방울이 거대한 비커 속으로 떨어지긴 했다.

“됐다. 한 방울로 어떻게 해 볼게.”

유전자 증폭기를 써서 어떻게든 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는 데는 역겨운 광경으로 인해 울렁거리는 속이 큰 역할을 했다. 상큼한 뭔가를 마시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았다.

“많이 달라며.”

이쪽이 됐다는데 정작 미친 새끼가 기를 쓰고 피를 짜내려고 들었다. 살을 긋다 못해 뻘건 근육 사이로 슬쩍슬쩍 허연 뼈가 보였다. 심나연의 토기가 한층 강해졌다.

“하. 진짜 시발. 해보자 이거지?”

자해에 환장한 미친 새끼가 고개를 비틀면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상한 부분에서 약발이 오른 놈은 고작 손톱 만한 메스 날로 완전히 제 팔뚝 뼈를 잘라 버릴 기세였다.

뼈가 긁히면서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어깨를 잔뜩 움츠린 심나연은 오만상을 구기면서 상대를 말렸다. 피는 여전히 나지 않았다.

“개새끼야, 이젠 됐다니까.”

“기다려 봐.”

이번엔 강수혁이 방법을 달리했다.

그냥 긋는 대신에 팔뚝의 넓은 부분을 빠르게 삼각형으로 잘라냈다. 그러니까 수박 맛을 볼 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심지어 삼각뿔 모양의 살덩이를 들어내기까지 했다.

쪼르륵.

넓게 파인 살이 재생하면서 피를 약간 흘렸다. 비커 바닥을 간신히 적실 정도는 되었다.

“진작 이렇게 할걸.”

상처는 빠르게 차올랐다. 뚜껑처럼 잘라낸 부분을 팔에 덮으려다가 포기한 수혁은 그것을 비커 안에 빠트렸다.

“선물.”

더는 참지 못했다. 심나연은 허리를 꺾으며 헛구역질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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