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그랑주 포인트 (62)화 (62/256)

57화

-편을 드는 게 아니라 상식적으로 그렇단 말입니다. 좀 인간적으로 대했으면 이렇게 망나니가 되지 않았을 거 아닙니까.

“그렇긴 해. 하지만 인간적으로 대하기에는 걘 너무 강했어.”

삐이-

재생 완료했다는 신호가 울렸다. 인공 양수가 빠지면서 소음이 일었다.

“그 새끼가 저지른 짓은 불우한 성장 과정을 핑계로 쉽게 용서할 수 있는 일이 아니거든.”

-뭐라고요? 잘 안 들립니다.

“너한테 한 말 아니야. 일단 나와.”

심 박사는 패드를 조작하면서 돌아섰다.

몸을 닦고 옷을 입는 과정에서 윤조는 최정의 호출을 받았다. 심 박사가 말한 다국적 훈련에 관해 브리핑할 게 있다고 했다.

“가 보겠습니다.”

“앞으로 연락 좀 하고 와, 불쑥 나타나지 말고. 누구처럼.”

“네.”

꾸벅 인사를 한 후 윤조는 연구실을 나왔다.

“강수혁이 뭘 저질렀길래? 뭐, 군수 공장 자체를 터트리기라도 했나? ”

방금 심 박사가 한 혼잣말을 곱씹으면서 윤조는 최정이 있는 본부로 향했다.

* * *

오전엔 김윤조가 나타나서 별별 시답잖은 소리를 늘어놓을 때까지만 해도 심나연은 개망나니 에스퍼의 방문을 예상하지 못했다.

“어? 우리 망나니, 네가 여기까지 웬일이야?”

아까 김윤조가 나타났을 때만 해도 소 닭 보듯 제 일에만 몰두하던 연구원들이 강수혁의 출현에는 누구보다 의식하면서 삐질삐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곤 화장실이며 괜한 전화 핑계를 대며 조용히 연구실 밖으로 대피했다.

솔직히 심나연도 부하들을 따라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망나니 혼자만 연구실에 뒀다가 또 뭘 얼마만큼 때려 부술지 알 수 없다. 모두가 버린 배를 혼자 지키는 선장의 심정으로 자리를 지켰다.

“김윤조 여기 왔었지?”

“김윤조 찾는 거면 번지수 잘못 찾았어. 지금 최정이 불러서 본부로 갔거든.”

“그래?”

김윤조가 없다고 해도 강수혁은 떠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연구실을 서성이면서 주변을 둘러봤다.

특별히 관심도 없으면서 괜히 모니터를 들여다보기에 얼른 다가가 화면을 바꿨다. 중요한 파일을 뒤적이면서 보는 척했다. 봐서 알지도 못할 거면서. 이번에도 파일을 덮어서 못 보게 가렸다.

노골적인 배척에 성질을 낼 법도 한데 강수혁은 한량처럼 서성이기만 했다.

“뭘 찾는지 몰라도 일단 없어. 있어도 없어.”

“뭐 찾으러 온 거 아니야.”

“그럼 왜 왔어?”

냉랭한 추궁에 강수혁은 간이 의자를 하나 끌어와 앉았다. 보아하니 뭔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패드를 보면서 딴청을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심나연은 팔짱을 끼고 놈을 빈틈없이 노려봤다.

수혁은 팔꿈치를 무릎 위에 올리고 손깍지를 꼈다. 자연스럽게 상체를 아래로 숙이게 되었다. 위에서 떨어지는 시선이 정수리에 닿았다. 예전에 꼬맹이였을 때 심 박사가 자신을 내려다보던 시설이 있었다.

그때는 심 박사와 그럭저럭 잘 지냈다. 심지어 이모라고 부르기도 했었다. 심 박사는 누나라고 우겼으나 수혁은 일부러 이모를 고집했다. 이모라는 단어가 주는 묘한 느낌이 제법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때는 서로를 ‘그쪽’, ‘개망나니’라고 부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훗.”

괜히 웃음이 났다.

“왜 웃고 지랄이야.”

“그냥.”

“할 일 없이 온 거면 꺼져 줄래? 난 바빠.”

“요즘도 사제 아이스크림 핑계로 에스퍼에게 출퇴근 비행 요구하고 그래? 나한텐 그랬잖아.”

“언젯적 얘기를 하는 거야.”

심 박사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졌다. 입술도 더 못마땅하게 일그러졌다.

“갑자기 다 지나간 옛날얘기는 왜 꺼내? 나한테 바라는 거 있으면 새삼스럽게 굴지 말고 그냥 말해. 우리 이제 다정하게 농담 따먹고 그럴 사이 아니잖아.”

“그런가.”

“용건만 말해.”

냉랭한 반응에 수혁은 쓴웃음을 지으며 굳이 심 박사를 찾은 용건을 꺼냈다.

“김윤조 발탁한 사람이 정확하게 누구야?”

“갑자기 그건 왜 묻는데? 김윤조 발탁한 게 누구면? 복수라도 하게?”

심 박사가 비딱한 어조로 반문했다.

질문에 대답 대신 의문문을 남발하는 김윤조의 말버릇은 심 박사에게 옮은 것 같다. 아니면 그 반대든가.

“그게 아니라 무슨 생각으로 김윤조 같은 놈을 이러한 중요한 프로젝트에 뽑은 건지 궁금해서. 그 새끼 나사가 하나 빠졌어.”

“내가 뭘 들은 거야? 지금 여기 계신 강수혁 소령님께서, 그러니까 군부 자산은 길가에 굴러다니는 개똥보다 더 하찮게 취급하시는 개망나니께서 내 가이드 프로젝트를 걱정하신 거야?”

김윤조한테 매번 비꼼과 조롱과 각종 개소리를 듣고 살았더니 별로 화가 나지 않았다. 침묵으로써 조롱을 꿋꿋하게 무시했다.

“정말 진지한가 보네. 비꼬아도 화도 안 내고.”

드디어 이쪽의 진지함을 감지한 심 박사가 제대로 응대할 마음이 들었는지 꼈던 팔짱을 풀었다.

“나야. 김윤조 발탁한 사람. 지원자 선별은 전적으로 내가 했어.”

“김윤조를 가이드로 만든 이유가 뭐야?”

“엄격한 조건을 모두 통과한 사람이 김윤조뿐이거든.”

심 박사가 아주 원론적인 이유를 댔다. 그걸 누가 모르나.

“최종 후보가 김윤조뿐이었어?”

재차 물으면서 고개를 들었다. 내내 이쪽을 보고 있던 심 박사와 시선이 마주쳤다. 수혁을 보는 상대의 눈빛이 묘했다. 속으로 무언가를 곰곰이 따지던 상대는 이내 피식 웃었다. 기분이 상했다. 하지만 난동을 부릴 정도는 아니었다.

잠시 뜸을 들인 심 박사는 무성의하게 대꾸했다.

“응.”

“다른 후보는 어느 단계에서 탈락했는데?”

“신체 조건을 만족한 후보는 많았는데 김윤조를 제외한 나머지는 전부 정신 감정에서 떨어졌어.”

“정신 감정?”

의외의 대답이었다.

“신체 변화 단계에서 피실험체가 의욕이 꺾이고 포기하면 안 되잖아. 과정이 엄청나게 고통스럽거든. 버틸 만한 놈으로 고른 거지. 네가 뭐 때문에 묻는지 모르겠는데 말이야. 김윤조가 다른 사람을 제치고 후보가 된 이유를 편하게 설명하자면 멘탈이 튼튼해서야. 좀 있어 보이게 표현하자면 실험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와 남다른 각오지.”

김윤조 멘탈이 튼튼하긴 한데 너무 튼튼해서 탈이다. 김윤조의 멘탈을 등급으로 따지면 트리플 S급 정도는 될 거다.

“그게 다야?”

“그 외에 뭐가 있어야 하는데.”

“딱히 있으란 건 아니고.”

수혁은 말을 돌렸다.

“가이드가 되겠다는 김윤조의 각오를 이제 너도 알 만도 하잖아? 네가 걔를 어떻게 했는데. 아직도 너를 붙잡고 가이드 역할을 잘해 보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말이야. 강수혁, 너처럼 툭하면 성질만 내는 유치한 새끼는 절대로 걔를 이기지 못해.”

“알아.”

수혁은 반박하지 않았다.

“결혼하시면 이렇게만 하십시오. 아내되실 분에게 이쁨받으실 겁니다.”

실컷 밥을 해서 배불리 처먹여 놨더니 놈이 감사 인사랍시고 내뱉은 말이었다. 크게 싸우고 화해하고 진하게 잠자리도 한 후에 딴에는 잘해 보려던 건데. 그 새끼는 다른 사람을 만나서도 이렇게 하란다.

심경이 매우 복잡했다.

화도 나고 배신감도 들고 어처구니없기도 하고 다시 분노가 일었다.

김윤조, 그 새끼는 어디가 고장이 났다.

많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그래서 김윤조에 대해 더 알면 알수록 이 새끼와 얽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리고 수혁은 그 새끼를 감당할 자신이 점점 사라졌다.

어차피 둘이 좋아서 붙어 있는 게 아니지 않나. 김윤조는 그저 강한 에스퍼가 필요할 뿐이다. 그게 마침 강수혁이었을 뿐. 수혁도 김윤조가 가이드가 되기 전에는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다.

그렇다면 누가 가이드가 되든 무슨 상관인가.

뜸을 들이던 수혁은 이내 방문한 진정한 목적을 털어놨다.

“가이드 추가 제작 계획은 없어?”

“추가 제작? 왜, 만든다고 하면 미리 다 망가뜨려 놓게?”

“아니.”

그제야 심 박사는 낌새가 이상한 걸 눈치챘다. 미심쩍은 듯 조심스럽게 수혁을 관찰했다.

“그럼?”

수혁은 복잡한 심경을 구구절절 다 까발릴 마음은 없었다. 한 마디로 압축했다.

“가이드가 하나뿐이라 불편해. 그 하나가 여러 가지로 마음에 안 들기도 하고. 기왕 가이드가 있을 거면 여럿 있는 편이 좋겠어.”

심 박사는 입을 다물고 잠시 수혁을 물끄러미 봤다. 할 말을 잃은 듯 보였다.

“왜? 못해?”

“못하진 않지. 그런데 가이드 싫다고 별 같잖은 개짓거리를 다 하던 네가 직접 나서서 그러니까 찜찜해서. 거기다가 뭔가 묘하게 기분도 나빠. 우리 윤조가 어디가 어때서?”

심 박사가 낯을 구겼다.

덮어 놓고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딱히 싫어할 제안은 아니라고 예상했는데, 이상하게 상대의 반응이 미지근했다.

“뭐가? 프로토타입을 만들 때는 양산화가 목적 아닌가? 이번에는 좀 제대로 만들어. 정신 멀쩡한 놈으로 말이야.”

상대의 의중을 이해하지 못한 수혁의 반응에 심 박사가 입을 열었다.

“대체 가이드가 있으면 좋지. 그런데 뭔가 갖은 고생 다 한 조강지처를 뒤늦게 배신하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조강지처가 내 새끼일 때의 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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